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420화 (420/1,307)

# 420

“그러고 보니 카이로시아를 본 지 꽤 되었네. 오늘 밤이라도 한번 가봐야 하나? 가는 길에 빌모아 일족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맥주도 필요하군.”

슬쩍 팔목에 마나를 모아보니 전능의 팔찌가 보인다. 모든 마나석의 색깔이 너무 생생하다. 차원 이동한 후 마나를 모으지 않았음에도 이렇다.

“흐음,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게 뭐지?”

현수는 아직 골드 드래곤 켈레모라니가 선물로 준 비늘의 효능을 모르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나로선 나쁘진 않지. 결계 치고 그 안에 들어가 마나 모으는 일은 지겨웠으니까.”

나직이 중얼거리곤 통신문을 내려놓았다.

10장 맥주 20만 캔

“아! 백작님, 다 보셨습니까?”

“그래. 다 보았으니 폐기해도 되네. 아까 사용한 찻잔은 방문 기념 선물이네.”

“아!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통신문을 기재한 게 너무 조악하더군. 하여 종이를 좀 꺼내놓았네. 유용하게 쓰도록 하게.”

말을 마친 현수는 이레나 상단을 나섰다. 그리곤 용병지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같은 순간, 커피잔을 챙기러 접견실로 들어간 윌리엄의 입은 딱 벌어져 있다. 현수가 꺼내놓은 A4용지 10박스 때문이다.

1박스당 500장짜리 5묶음이 있으니 25,000장이다.

아르센 대륙엔 존재하지 않는 꼭 같은 규격의 희디흰 백상지이다. 왕실에 공급한다면 장당 1실버까지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25,000실버는 250골드에 해당한다.

한국으로 치면 2억 5천만 원이다. 값비싼 커피잔 3개 이외에도 이걸 공짜로 선물 받았으니 입이 벌어진 것이다.

“역시 카이로시아 영애님이시군.”

윌리엄은 아름다운 카이로시아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짝을 제대로 만났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한편, 현수는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더운물로 목욕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때문이다.

삐이꺽―!

“어서 옵쇼! 저희 여관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여기도 미판테 왕국의 여관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직 나이 어린 꼬맹이가 완전히 숙달된 접대 멘트를 날린다.

하지만 현수는 소년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안쪽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기 때문이다.

“어이, 친구! 여기야.”

라세안이다.

“언제 온 거야?”

“조금 전에……! 방 두 개 잡았어. 뜨거운 물도 준비하라고 했고. 음식도 주문했네.”

“잘했어. 그나저나 내가 이리로 올 줄 어떻게 알았어?”

“우리가 하루 이틀 같이 다녔나? 이젠 척 보면 안다네.”

“하아, 이거 참……! 아무튼 잘했네.”

“아무튼 앉게 음식이 곧 나올 테니.”

“그러지. 참, 여기서 수도인 멀린으로 가려면 산맥을 지나쳐야 한다는데 그냥은 못 간다며?”

“아! 그거? 나이젤 산맥이라는 건데 거기 드래곤 레어가 있어. 근처를 지나면서 시끄럽게 굴면 가끔 난리를 쳤나 봐.”

“나이젤 산맥?”

“그래, 예전엔 아주 성질 고약한 광룡이 살았지. 자네 스승인 멀린의 손에 목숨을 잃은 놈 말이야.”

“아! 그래? 그럼 그 광룡의 후손인가?”

“아니! 아니야. 전혀 관련 없어. 하지만 저기 사는 드래곤도 하는 행동이나 성격이 보통은 아니지.”

“그래? 아무튼 저길 거쳐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그냥 가면 되지. 자네와 난 괜찮을 것이네.”

어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가! 같은 드래곤끼리도 가급적이면 레드는 건드리지 않는다. 성격이 난폭하거나 급하거나 둘 중 하나인 데다가 폭력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라이세뮤리안은 분명 레드이다. 따라서 나이젤 산맥에 사는 드래곤의 색깔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건드리진 않을 것이다.

그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럼 다행이고.”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탁자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들이 놓인다. 어느새 꼬맹이가 다가온 것이다.

“손님들! 맛있게 드십쇼.”

“오냐! 수고했다. 이건 팁이다.”

꼬맹이는 현수가 준 1실버를 받고는 허리를 직각으로 꺾는다. 근래 받은 팁 가운데 최고액이기 때문이다.

“헐……! 뭐든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이 한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성심으로 모시겠습니다.”

현수는 피식 실소 지었다. 꼬맹이가 닳고 닳은 모습을 보이곤 있지만 바탕은 순수하다는 것을 눈치챈 때문이다.

“그래, 알았다. 목욕물이나 잘 준비해 줘.”

“네에, 손님!”

현수는 어느새 C급 용병 차림인지라 꼬맹이는 크게 어려워하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곤 곧장 객실로 향했다. 그리곤 훌훌 벗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흐으음, 좋군! 하지만 사우나는 한국이 훨씬 낫네.”

식는 물을 적당히 데우느라 계속 마법을 시전하던 현수가 중얼거린 말이다. 목욕을 마친 시각은 오후 6시 경이다.

“나 어딜 좀 다녀오겠네. 자넨 이곳 상황 좀 알아봐 주겠나?”

“어딜 가려는데?”

“응, 점찍은 거 잘 있나 보러 가려 하네.”

“아! 그거…….”

라세안이 싱긋 웃음 짓는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다. 그리고 식사가 마쳐질 즈음이면 어두워진다.

밤에 이루어지는 많은 일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연인들끼리 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물론 말로 하는 커플도 있지만 몸으로 대화하는 부류도 있다.

라세안은 현수가 케이트를 접수하러 가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음흉한 웃음을 짓는다.

“잘하고 오게. 나는 이쪽 상황을 알아볼 테니. 그나저나 언제 올 건가? 내일 아침? 아님 점심?”

“최대한 빨리 올 거야. 그러니 느긋하게 기다려 줘.”

“알았어. 잘 갔다 와. 그리고 천천히 와도 되네. 크흐흐흐!”

라세안의 음흉한 웃음을 뒤로하고 현수는 여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적당한 장소를 찾아 좌표를 확인했다.

“일단 맥주 먼저 챙겨야지? 마나여, 나를 지구로 데려다 다오.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연기처럼 흩어진다.

* * *

“흐음, 여긴……!”

확인해 보니 알렉세이 이바노비치가 선물한 모스크바 저택의 지붕이다. 시각은 새벽 6시가 조금 넘은 듯하다.

현수는 옷을 갈아입고 천천히 걸어 침실로 내려갔다. 거기엔 천사 같은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이리냐가 있다.

조심스레 앉는다고 했지만 기척을 느꼈는지 이리냐의 눈이 떠진다. 그러더니 일어나려 한다.

그러지 말라고 슬쩍 누르니 힘을 뺀다.

“나 때문에 일어난 거야?”

“후아암! 네에, 근데 벌써 일어나셨어요? 옷은 언제 입으셨대요? 어디 가려고요?”

“조금 더 자. 난 시장엘 좀 다녀올게.”

“시장에요? 거긴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말씀만 하시면 제가 사다 놓을게요.”

“아냐! 괜찮아. 조금 더 자! 시장은 내가 갔다 올 테니.”

“후암! 그래요, 그럼.”

선잠이 깨어 그런지 이리냐는 순순히 자리에 눕는다.

저택 밖으로 나온 현수는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곤 모스크바의 중심지로 향했다.

기왕에 온 것이니 충분히 둘러보자는 생각에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누가 봐도 관광객 티가 났는지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도 있었다.

싱긋 웃어주고는 계속해서 윈도쇼핑을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정말 그랬다. 그래서 웃었다.

현수는 계속해서 안목을 넓혀갔다.

그 과정에서 깨우친 바가 하나 있다. 대우그룹을 만든 김우중 회장의 말처럼 세상은 넓고, 할 일을 많은 듯하다.

자그마한 카페에서 토스트와 커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곤 계속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오전 9시가 되었을 때 지르코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무 일찍 전화를 걸면 실례될까 싶어 기다린 것이다.

지르코프는 반가운 음색이다.

하여 전에 부탁했던 맥주가 어떻게 되었냐고 물으니 조만간 콩고민주공화국 마타디 항에 당도할 것이라고 한다.

다음엔 클럽 메트로의 대표 세르게이 블라디미르의 명함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러시아의 대표 맥주가 무엇이냐 물으니 발찌까(Балтика)라고 한다.

북유럽 맥주사인 칼스버그 소유로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제조공장이 있다.

발찌까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 4번 호밀맥주를 권한다. 이게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나머지도 괜찮다고 한다.

참고로 발찌까 맥주는 No.0∼No.9까지 있다.

번호가 높을수록 알콜도수가 높은 것이며, 0은 무알콜이다.

러시아에선 No.4가 가장 많이 팔리지만 한국에선 No.7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수출용으로 제조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많은 양이 필요하다고 하니 맥주 도매상의 위치와 전화번호, 그리고 담당자를 알려준다.

전화를 끊고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전갈을 받았다면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한국에서 오신 미스트르 킴이시죠?”

“그렇습니다. 로만 씨죠? 미스터 세르게이의 연락을 받으셨나 봅니다.”

“네! 근데 우리말 참 잘하시네요. 동양인 같은데……?”

말끝을 흐린다. 국적이 궁금하다는 뜻이다.

“저는 한국인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로만 아킨페프라 합니다.”

“네, 저는 김현수라 하지요.”

가볍게 악수를 하고 나니 로만이 웃는다.

“블라디미르 사장님께서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뭐가 필요하십니까?”

“발찌까 캔맥주를 좀 많이 사려는데 있죠?”

현수의 러시아어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하긴 내국인과 같은 수준인데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물론입니다.”

“많이 사면 싸게 줍니까?”

현수가 부러 웃음을 짓자 로만 역시 웃는다.

“하하, 물론입니다. 근데 얼마나 많이 사려 하십니까?”

로만은 구매하려는 양이 대체 얼마나 되기에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두고 보자는 표정이다.

“이 점포에 발찌까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산다면 얼마에 주겠습니까?”

“네? 전부요?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면서 다 산다고요?”

로만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런 거래는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네. 있는 대로 다 사겠습니다. 참, 무알콜인 0번은 빼고요. 얼마나 있죠? 가격은요?”

“헐……!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얼마나 있습니까?”

“정말 있는 거 다 산다고 했습니까?”

로만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네, 대체 얼마나 많기에 그러죠?”

“흐음, 따라와 보십시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생각했는지 가게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어두운 통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생철 지붕을 얹은 창고 비슷한 건물들이 보인다.

삐이꺽―!

녹슨 경첩이 몸살을 앓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안쪽엔 발찌까가 쌓여 있다. 상당히 많은 양이다.

“이렇게 많은데도 다 산다는 겁니까?”

로만은 많은 양에 질려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현수는 태연했다.

“조금 되는군요. 모두 몇 캔이나 되죠?”

“흐음, 장부를 보면…….”

로만은 창고 안쪽에 있던 장부를 펼쳐 이것저것을 살핀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다해서 20만 4,000캔쯤 됩니다. 병당 출고가가 75센트쯤 되지만 진짜로 다 산다면 60센트에 넘기겠습니다.”

그만한 돈이 있느냐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모스크바 최고의 클럽이라 불리는 메트로에서도 이만한 양을 한 번에 구매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소모되지도 않지만 그럴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냥 해본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상대를 잘못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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