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4
벌써 네 시간째 대련이다.
이들은 현재 현수로부터 한 가지 검법을 전수받는 중이다. 멀린이 수집했던 많은 검법서를 뒤진 끝에 찾아낸 것이다.
챙, 챙! 채챙! 채채채챙!
“으읏!”
루토가 먼저 나가떨어진다. 현수는 쇄도하던 토마스의 검을 받아내며 소리친다.
“늦어! 그렇게 해서 어찌 적의 목을 베겠나? 그럴 땐 조금 더 과감했어야지.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칠 셈인가?”
“죄, 죄송합니다.”
“그냥 공격했다면 상대는 이렇게밖에 피할 수 없어. 그럼 위험이 사라지는 거지. 근데 그걸 예상 못해 멈칫거리면 적에게 시간만 벌어주는 걸세. 안 그런가?”
“시, 시정하겠습니다.”
“토마스, 자네도 마찬가지야. 왜 자꾸 멈칫거려? 과감하란 말이야. 내 고향에 이런 말이 있어.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말 말이야.”
“네? 그게 무슨……?”
“곰곰이 생각해 봐. 내 조상 중의 한 분이 하신 말씀으로 아주 위대한 분이셨네.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분이지.”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요?”
“그래! 마음가짐을 그렇게 가지게. 자!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지금부터는 자네 둘이 자유대련을 하게.”
“네, 알겠습니다.”
루토와 토마스는 차렷 자세를 취함으로써 예를 갖췄다.
하인스 백작이 어떤 신분으로 캐러나데 사막과 마물의 숲을 지났는지를 알게 된 이후 더욱 존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연무장을 벗어나니 카이로시아가 쉐리엔 열매로 만든 주스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
“더우셨죠? 자, 이거 드세요.”
“고마워!”
“어머, 고맙기는요. 제가 이런 걸 준비할 수 있게 해준 자기야가 더 고마워요.”
장차 현숙한 아내가 될 것이 너무도 분명한 모습이기에 현수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주었다
“내가 알아봐 달라는 건 알아봤어?”
“그럼요. 발루네가 비번이니 잘 안내해 드릴 거예요.”
“그래? 알았어.”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스가 담긴 잔을 비우자 카이로시아가 곁에 대기하고 있던 발루네에게 시선을 준다.
“백작님 안내 잘하세요.”
“아이고, 물론입죠. 지부장님!”
“흐음, 그럼 다녀올게.”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카이로시아는 현수가 아직도 7써클 마스터이자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인 것으로 안다. 그럼에도 건드릴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불안한 듯 살짝 아미를 찌푸린다. 마음 같아선 하루 종일 같이 다니고 싶지만 업무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12장 준비되는 영지전
“오오! 이게 누구신가? 오랜만이네. C급 용병 하인스!”
용병지부 접수대 근처에 앉아 졸고 있던 하시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수를 안았다.
“오랜만입니다. 하시쿤!”
“그래, 반갑네. 그런데 혼자서 어떻게 왔나?”
캐러나데 사막과 마물의 숲을 어찌 왔느냐는 뜻일 것이다.
“다 수가 있으니까요. 근데 다들 어디 갔습니까? 북적이던 용병지부가 왜 이렇게 한산하죠?”
현수의 물음에 용병지부장인 하시쿤이 싱긋 미소 짓는다.
“이웃 영지에서 대대적인 용병 모집을 한다 하여 다들 그쪽으로 몰려갔다네. 자네도 생각 있나?”
“이웃 영지요?”
“그래. 테세린 영지는 유카리안 영지와 드리안 영지로 둘러싸여 있다는 거 알지? 참, 사람은 물론 몬스터들도 못 사는 데스랜드도 있군.”
“그럼요.”
“유카리안 영지 바깥쪽에 놀트란 영지라고 있네. 쉐먼 자작가의 영지이지. 그 영지에서 몬스터 토벌을 한다며 용병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하고 있네. 그래서 모두 그리로 간 거지.”
“그래요? 그럼 그게 늘 있는 일인가요?”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물어본 말이다. 이에 하시쿤이 슬쩍 이맛살을 접는다.
“그게 말일세. 조금 이상하기는 해. 놀트란 영지는 산지가 거의 없어서 몬스터가 별로 없는 살기 좋은 영지거든.”
“……! 그럼 혹시, 급하게 그쪽 상황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쪽 상황을……? 뭘? 그리고 왜?”
하시쿤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현수가 실력을 감춘 C급 용병이라는 것은 안다. 그리고 물욕 없음도 안다. 줄리앙이 가져온 최상급 포션 덕에 심각했던 부상을 털고 일어났던 경험 때문이다.
최상급 포션은 B급에서도 제법 실력 있는 용병이 1년 내내 쉬지 않고 일을 해야 간신히 살 수 있는 값비싼 귀물이다.
그런데 현수는 그걸 한 병 반이나 그냥 줬다. 한 병은 동행했던 A급 용병 랄프가 가져갔고, 나머지 반병은 줄리앙이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율리아 영지의 영주 나후엘 자작이 하사한 20골드를 죽은 테일러의 가족에게 주라고 했다. 몇 년은 놀고먹을 돈이다.
현수는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엔 아무도 없다. 하여 은근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최근에 접한 첩보에 의하면 테세린 영지에서 유카리안 영지와의 영지전 승인 신청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쪽 용병들을 저쪽으로 끌어들이려는 수작일 수도 있습니다.”
“……!”
용병지부는 대륙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직접 참가하지 않는 이상 중립의 의무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패한 쪽의 용병지부는 상당한 기간 동안 불이익을 당한다.
그 불이익은 용병 개개인의 생활고와 직결되어 있다.
하여 하시쿤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반갑지 않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쪽 용병까지 저쪽에 붙어 전투가 벌어지면 나중에 틀림없이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현수는 이쯤 해서 확실한 수를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줄리앙과 연락이 닿으면 즉시 돌아오라고 전해주십시오.”
“……? 왜지?”
“로니안 자작님이 전장의 학살자를 불렀다는 첩보가 있거든요.”
“뭐, 뭐어……? 저, 전, 전장의 학살자 토마스……? 특급 용병? 지, 진짜인가? 방금 한 말 정말, 정말인가?”
하시쿤은 말을 더듬을 뿐만 아니라 재삼 확인까지 하려 한다.
“제가 알기엔 로니안 자작님이 이번에 상당히 많은 돈을 쓰신다고 했습니다. 오랜 숙원이잖아요.”
“그, 그야……!”
하시쿤은 몹시 떨고 있다.
전장의 학살자 토마스는 주로 국가 간의 전쟁에 등장한다. 그렇다 하여 영지전을 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러 번 영지전에 참여하여 승리를 이끌었다. 그때 상대편 진영은 글자 그대로 쑥밭이 되어 버렸다.
수많은 기사와 병사, 그리고 용병들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덤비지 않는다면 모를까 누구라도 대적하면 목숨을 빼앗았다.
문제는 토마스라는 전장의 학살자의 뚜렷한 인상착의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진 쪽은 모두 죽었으니 말을 할 수 없고, 이긴 쪽은 나중을 위해 언급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특급용병 토마스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
만일 줄리앙이 저쪽에 있다가 토마스를 만난다면 그건 죽음에 이르는 지름길에 올라선 것과 같다. 하나밖에 없는 금쪽같은 딸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하시쿤의 마음은 급해졌다.
“자, 잠깐만 기다려 보게. 지금 즉시 연락을 해볼 테니.”
하시쿤이 허둥지둥 자리를 비우자 현수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전장의 학살자 토마스가 나타날 것이라는 소문만으로도 유카리안 영지는 막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파리처럼 꼬여 있던 용병들은 기꺼이 위약금을 내고 몸을 뺄 것이다. 기사와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것이고, 이웃 영지의 도움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이번 영지전은 소문만으로도 시작 전부터 반쯤 이기고 들어가는 셈이다.
진짜 전장의 학살자 토마스가 나중에 이 소식을 알고 달려드는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소드 마스터라도 격이 다르다.
현수는 드래고니안들과의 대결을 틈날 때마다 떠올리며 심상 수련을 해왔다. 하여 현재는 소드 마스터 최상급에 도달해 있다.
본인이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조금 더 현묘한 뜻을 깨닫게 된다면 대륙 유일의 그랜드 마스터를 넘볼 수준에 올라 있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토마스를 상대해 낼 수 있다. 여기에 무지막지한 위력을 내는 8써클 마법까지 가능하다. 토마스가 제아무리 강한 자라 할지라도 상대가 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물론 상대의 이름을 팔았으니 그에 대한 대가로 한 수 정도 가르쳐 주거나 술 한 잔을 나눠야 할 것이다.
사실 확인을 하러 갔던 하시쿤은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다행한 것은 테세린 지부 소속 용병들은 아직 계약을 하지 않아 위약금을 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하시쿤의 전언에 따라 테세린 소속은 물론이고 다른 영지 소속 용병들도 속속 놀트란 영지를 떠난다고 한다.
그들의 목적지는 테세린이다. 전장의 학살자를 보기 위함이다.
목적한 바를 이룬 하시쿤에게 물어 테일러의 집을 찾았다. 그곳까지 안내는 이레나 상단의 수문 위병 발루네가 했다. 가보니 테세린 외곽에 위치한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다.
그런데 누군가 그 집의 문을 두들기고 있다.
쿵, 쿵, 쿵―!
“애니! 애니, 안에 있어? 문 좀 열어.”
쿵, 쿵, 쿵―!
“문 좀 열란 말이야. 나야, 네 서방, 티에리야.”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지만 누구 하나 관심 보이는 사람이 없다. 몇몇 노인만 혀를 차며 지나갈 뿐이다.
귀를 기울여 보니 나직이 중얼거린다.
“에이, 저 나쁜 놈! 남편 목숨 값 다 뜯어먹고도 뭘 더 빼앗아가려고 저러는 거야?”
“그러게 말이네. 테일러네 애들 모두 노예로 팔아 치웠다며?”
“그래! 한 아이당 2골드씩 받고 팔아먹었다고 하더군.”
“근데 뭘 더 빼앗을 게 있다고 저러지? 애니는 몸도 아픈데.”
“저 빌어먹을 놈이 사창가에 팔아먹으려 한다는 소문이 있어.”
“뭐어? 폐병을 앓아 피까지 토하는 애니를 사창가에 판다고?”
“그래, 항구 쪽 뱃놈들 많이 드나드는 데 있잖은가? 거기 주점에서 1골드에 산다는군.”
“어휴, 미친놈들! 폐병 걸린 여자를…….”
“그러게. 게다가 남편은 용병 일 하다 죽고, 애들 셋은 모두 노예로 팔렸는데 불쌍하지도 않을까?”
“휴우! 그러게 말이네. 참 기구한 인생이야.”
“내가 듣기론 테일러가 용병 일 하다 죽은 거에 대한 보상금이 꽤 된다고 들었는데 그건 어떻게 되었나?”
“어떻게 되긴? 저기 보이는 저 악당이 다 처먹었지. 저놈 진짜 나쁜 놈이야. 어릴 때부터 아주 싹수가 노란 놈이었다고. 에구, 신은 뭐하시나 저런 놈 안 잡아가고.”
“그러게. 우린 가세! 힘이 없어 도와줄 수도 없으니.”
노인들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본 현수의 눈에는 분노의 빛이 어렸다. 세상에서 말살시킬 인간성 나쁜 놈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이때 더욱 세게 문을 두드리며 소리친다.
쾅, 쾅, 쾅―!
“야, 이 썅년아! 어서 문 열지 못해? 안 열면 다 때려 부순다.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열어! 안 열어?”
쾅! 쾅! 쾅―!
우수수, 우수수수―!
욕을 하며 문을 두드리던 녀석이 발로 걷어차자 집 전체가 흔들린다. 다 썩어가는 오두막이라 그런 것이다.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어이, 거기……!”
“뭐……? 넌 뭐야? 그리고, 어이, 거기……? 새파란 애송이가 어디서 감히 티에리님에게 어이라고 하는 거야?”
애니는 분명 실내에 있다. 그럼에도 대답조차 없어 화가 나던 차에 시비를 건다 생각했는지 몸을 돌려 현수에게로 다가선다.
“야, 이 새끼야! 어른이 뭐라고 말씀하셨으면 얼른 고개 조아리고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는 거 아냐? 어디서 싸가지 없이 어른을 쳐다봐? 너 한번 뒈져 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