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5
욕설을 내뱉으며 다가서던 티에리가 느닷없는 주먹을 휘두른다. 하지만 이에 맞을 현수가 아니다.
휘익―! 빠악―!
“아아악! 내 발, 내 발! 아아아악!”
티에리라는 녀석이 휘두른 주먹은 당연히 허공을 스쳤다.
그 순간 현수의 발이 녀석의 발목을 가격했다. 그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구른다. 물론 두 손으로 발목을 움켜쥔 채이다.
현수는 잠시 바라만 보았다. 그러자 고통이 줄어드는지 불량스런 시선으로 노려보며 일어선다.
어느새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대거를 뽑아 든 자세이다.
“어디서 이런 개 잡종이 감히 내게……! 죽엇!”
휘이익―!
대거는 현수의 의복 바로 곁을 스치고 지났다. 그 순간 반보 가량 물러났던 현수의 신형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주먹 하나가 섬전의 속도로 공간을 갈랐다.
휘익! 퍼억―!
“크아아악!”
강력한 라이트 훅이 안면에 꽂히자 누런 이빨 몇 개와 더불어 선혈이 튄다. 티에리가 비틀거렸지만 현수는 더 공격하지 않았다.
잠시 후, 놈이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었지만 그때마다 간발의 차이로 피함과 동시에 반격을 시도했다.
한 번 공격에 한 번 반격이다. 그렇게 십여 차례 공방이 이어진 끝에 티에리는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모든 이빨이 부러졌고, 몇몇 뼈마디는 으스러졌다.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곳인지라 정상인으로 살긴 힘들 것이다.
피를 흘리고 있지만 현수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곤 애니가 숨죽이고 있는 오두막으로 향했다.
쿵, 쿵, 쿵―!
“계십니까?”
“쿨럭! 누, 누구신가요? 쿨럭, 쿨럭!”
틈새로 광경을 지켜보던 애니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묻는다.
“부군인 테일러와 같이 용병 일을 했던 하인스라 합니다.”
“하인스님이요? 우리 그이와 함께했던……? 쿨럭! 그럼, 금화를 주신 그 하인스님이신가요?”
“네, 테일러와 같이 용병 일을 했죠.”
“자, 잠시만요.”
삐이꺽―!
오두막의 문이 열리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묘한 냄새가 풍긴다. 나무 썩는 냄새와 더불어 불결한 환부의 냄새 등이다.
현수는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현수는 그간의 사정을 물었고, 애니는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돈은 모두 강탈당했고,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다고요?”
“흐흑! 네에. 용병들이 사라지고 저놈이 와서…. 쿨럭, 쿨럭!”
애니의 울음 섞인 하소연은 길었다.
처음엔 여러 가지로 마음써 준 티에리를 좋게 보았다. 하여 어쩌면 팔자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었다.
놈의 속내를 몰랐을 때이다.
티에리는 감언이설로 애니를 꼬였다.
병든 몸에 애까지 셋이나 있지만 티에리는 지극정성이었다. 하여 먼저 몸을 주었고, 나중엔 가진 돈 전부를 주었다.
미래를 위해 불려야 한다던 그 돈은 흥청망청 쓰였다.
돈이 떨어지자 티에리는 애니에게 몸 팔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거절했다. 그러자 아이들 셋을 모두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 돈이 떨어지자 이번엔 애니를 사창가에 팔려고 왔던 것이다.
말을 마친 애니는 기력이 다한 듯 숨을 몰아쉬더니 기절한다.
“이런… 마나 디텍션!”
샤르르르릉―!
손목을 통해 스며든 마나는 애니의 몸 상태를 속속들이 보고했다. 이에 현수는 회복 포션 한 병을 사용했다.
“마나여, 모든 것을 원상으로……. 리커버리!”
샤르르르르릉―!
또 한 번의 마법이 구현되자 창백했던 애니의 안색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흐흑! 이 은혜를 어찌?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혼절에서 깨어난 애니는 몸 상태가 확연히 달라졌음을 알아차리곤 계속해서 눈물만 흘린다.
“애니, 이곳은 사람 살 만한 곳이 못 되니 일단 나를 따라오세요.”
“네,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할게요.”
현수의 뒤를 따른 애니가 당도한 곳은 하인스 상단 테세린 지부라는 간판이 달려 있는 건물이다.
예전엔 코찔찔이 세실리아 여관이라 불리던 것이다.
“헉! 배, 백작님! 어, 어서 오십시오.”
안에서 장부 정리를 하고 있던 얀센이 대경실색하며 튀어나온다.
“어머, 백작님! 안녕하셨어요?”
곁에서 편한 자세로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로사도 벌떡 일어난다.
“아아! 둘 다 편하게 앉게.”
“배, 백작님! 어떻게 말도 없이……?”
“그간 잘 있었는가?”
“네, 백작님 덕분에 저희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비드는……? 잘 크고?”
“네. 병치레 없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하하, 그거 다행이네.”
한편 현수의 뒤를 따라 하인스 상단 테세린 지부에 발을 들여놓았던 애니는 멍한 표정이다. 남편과 함께 용병행을 했던 사람이 백작이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애니를 발견한 얀센이 묻는다.
“근데 저 여인은……?”
“참, 이 여인은 애니라 하네. 나와 함께 여행을 했던 테일러라는 동료의 아내지. 당분간 돌봐주게.”
“네……? 아, 네에. 알겠습니다.”
“많이 지친 상태일 것이니 좀 쉬도록 해주게. 2층에 방 있지?”
“네에, 물론입니다. 여보, 다비드는 내가 볼 테니 애니 씨를 안내해 줘. 그리고 백작님 오셨으니 차도 좀 준비해 주고.”
“네에. 여보!”
로사는 애정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생긋 웃어주고는 애니를 데리고 2층으로 올랐다.
현수는 얀센으로부터 그간에 있었던 일을 들었다.
지난번에 주고 갔던 후춧가루와 연막탄은 모두 팔렸다. 판매 대금은 현재 안전을 위해 로니안 자작이 보관 중이라고 한다.
현재는 이레나 상단이 양보해 준 곡물로 상행을 하는 중이다. 그 때문에 제법 많은 인원을 뽑았다고 한다.
현수는 창고로 사용하는 방에 가서 후춧가루를 더 꺼내 놓았다. 이밖에도 소금을 많이 꺼내 놓았다. 이곳에선 귀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얀센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막대한 양의 소금에 입을 탁 벌렸다. 워낙 귀하기에 이곳 테세린의 음식은 싱거운 편이다.
그런데 5톤 트럭으로 2대 분량이나 나오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잠시 후, 얀센은 팔렸던 애니의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물론 적절한 값을 치러줬다.
애니는 내일부터 하인스 상단 주방 보조이다. 아이들은 심부름꾼으로 쓰다 나이 들면 직원으로 고용하기로 했다.
모든 일을 마친 현수는 영주성으로 향했다.
“멈춰라! 이곳은 테세린의 영주성이다. 신분을 밝혀라.”
현수는 C급 용병 차림이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수고한다. 에밀리! 그간 잘 있었나?”
“누가 감히……? 헉! 배, 백작님!”
“그래, 들어가도 되지?”
“무, 물론입니다.”
현수가 성내로 들어서자 초소 안에 있던 기사가 튀어나온다.
“하인스 백작님!”
“오! 크린스 경! 그래, 검술 솜씨는 좀 늘었는가?”
“네, 백작님 덕분에 초급 마스터가 되었습니다.”
“하하! 그래? 계속 정진하다 보면 금방 중급에 이를 걸세.”
“네, 그래야지요.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뭘 말인가?”
“이 아머와 검, 그리고 방패! 정말 좋습니다.”
“그래, 좋은 걸세. 드워프들이 정성 들여 만든 거니.”
“네, 모든 기사와 병사를 대표하여 진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자네, 자작님이 내 장인이 될 거라는 거 알지?”
“네, 물론입니다.”
기사 크린스는 아름다운 로잘린 영애의 짝으로 하인스 멀린 백작이 내정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추호의 불만이나 시기도 없다. 오히려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존경하는 하인스 백작과 아름다운 로잘린의 결합은 그야말로 신의 축복이라 여기는 중이다.
“자네와 병사들에게 지급한 드워프제 무구가 내 혼인 예물이네.”
“아……!”
크린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왕자와 공주 간의 결합에도 이처럼 많은 무구가 예물로 오가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 없다.
드워프제 무구는 한 왕국당 많아야 100벌 남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인스 백작은 그런 무구들을 무려 1,800벌이나 내놨다.
그중 하나는 특별하다. 영주인 로니안 자작에게 지급된 것이다.
경량화와 스트렝스, 그리고 항온 유지는 모든 무구에 인챈트된 마법이다. 아머를 입고 있어도 얇은 옷 한 벌 걸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웬만한 병장기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늘 같은 온도를 유지하여 여름과 겨울에도 활동의 제약을 적게 받는다. 이는 현수가 꼼수를 부려 마법진을 대량으로 복사해 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로니안 자작의 아머에는 추가로 플라이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약 10분간 비행할 수 있다.
이밖에 블링크 마법과 워프 마법진도 그려져 있다.
1일 3회 사용 가능한 블링크는 약 50m를 이동한다.
워프는 목숨이 경각지경에 처했을 경우 테세린 영주성의 비밀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상급 마나석 하나가 소모되었다. 장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배려이다.
어쨌거나 기사 크린스는 너무도 큰 결혼 예물에 감동을 받은 듯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자, 그럼 나중에 또 보세.”
“넷! 들어가 보십시오.”
기사 크린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영주인 로니안 자작에게도 하지 않던 극상의 예이다.
현수가 성내로 들어서자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예를 갖춘다.
적어도 성내에선 곧 영지전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작님! 전령이 왔다고요?”
“그렇네. 영지전 승인이 떨어졌고 판정관도 정해졌네.”
“생각보다 쉽게 승인이 떨어지는군요.”
“우린 국왕파고 데니스 백작은 귀족파라 그렇지.”
다른 왕국들도 그렇지만 미판테 왕국도 국왕지지파와 귀족중심파 간의 파벌 싸움이 치열한 모양이다.
“판정관은 누구랍니까?”
“나무센 자작일세.”
“나무센 자작이라면 왕실 출납부 소속 행정관 아닙니까?”
“그렇지. 현재 유카리안 영지 마나석 광산의 채굴량을 체크하는 임무를 맡고 있네.”
“나무센 자작이 있으니 언제든 병사들을 동원해도 되겠군요.”
“그렇지. 하여 내일 아침 일찍 출병할 생각이네.”
“잠깐만요. 한 이틀쯤 뒤로 미뤄보십시오.”
“이틀을 미뤄? 왜? 지금 저쪽에선 용병 계약을 하느라 난리가 났을 텐데.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낫지 않겠나?”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도 용병들을 고용해야지요.”
“그렇지 않아도 확인해 보았더니 이쪽엔 용병이 거의 없네. 놀트란 영지에서 대대적인 몬스터 토벌을 한다 하여 다 갔다고 하더군.”
“그게 아마 사실이 아닐 겁니다.”
“사실이 아니라고?”
“네, 모르긴 몰라도 유카리안 영지에서도 영지전을 계획하고 있었던 듯싶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로니안 자작이 의자를 당겨 앉는다. 어서 말하라는 뜻이다.
현수는 용병지부에서 오갔던 내용을 다시 한 번 이야기했다. 이에 로니안 자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쪽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면 그에 합당한 준비가 되어 있거나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영지전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내 환한 표정으로 바뀐다. 드워프제 무구로 무장된 기사와 병사들은 이전에 비해 최고 한 단계 이상 업그레이드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전장의 학살자 토마스의 등장은 저쪽의 사기를 현저하게 깎아내는 수가 되기 때문이다.
『전능의 팔찌』 제18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