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426화 (426/1,307)

# 426

1장 어때, 재미 좋았어?

“용기있는 자는 앞으로 나와라! 단칼에 목을 베어주마!”

현수의 외침에 늘어서 있던 적진에서 서로 튀어나오려는 조짐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현수는 현재 용병 차림이다.

한낱 용병 따위가 기사들의 명예를 우습게 하는 발언을 했으니 분노한 것이다.

이때 손을 들어 기사들을 제지한 데니스 백작이 외친다.

“크하하하, 로니안 자작! 한낱 용병을 앞세우다니, 테세린엔 그토록 인재가 없는가?”

이 발언에 대꾸한 이는 로니안 자작이 아니라 현수였다.

“한낱 용병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라! 누구냐? 나와 대적할 자! 용기있는 자만 나서라! 겁쟁이는 사절이다!”

데니스 백작이 주위를 둘러본다.

“용병 따위가 감히! 나의 기사들 중 누가 나가 저자의 목을 베어 오겠느냐?”

전장에서의 사기는 장수들의 기량이 크게 작용된다.

그렇기에 데니스 백작의 시선은 수석기사인 제레미에게 향해 있다.

어찌 총애를 입을 기회를 놓치겠는가!

제레미는 주먹을 가슴에 대며 외쳤다.

“소신, 백작님의 명예를 걸고 저자의 목을 베고 싶습니다. 제가 나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좋다, 제레미 경! 나의 명예를 그대에게 맡기노니 적의 목을 베는 통쾌한 승리를 쟁취하라!”

“예스, 마이 로드!”

허락이 떨어지자 기사 제레미는 투구를 아래로 내리곤 칼을 뽑아 든다.

그리곤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선다.

풀 플레이트 갑옷을 걸친 모습은 몹시 위맹해 보인다.

같은 순간, 양쪽 진영의 병사들이 숨죽이고 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유카리안 영지 쪽도 테세린 쪽도 크게 걱정하는 눈길은 아니다.

유카리안의 대표 제레미는 소드 익스퍼트 상급으로 소문나 있다.

오랫동안 인근에선 상대가 없다고 소문난 상태이다.

그런데 최근 깨달음을 얻어 최상급에 이르기까지 했다. 이러니 걱정하지 않는 것이다.

한편, 테세린의 대표 현수는 전장의 학살자로 이름난 특급 용병 토마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마스는 소드 마스터!

걱정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존재이다.

영지의 모든 기사와 병사들이 총출동했지만 현수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이는 몇밖에 없다.

로니안 자작이 비밀 유지를 명령한 때문이다.

현수는 다가오는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뒤를 바라보았다.

테세린의 기사 크린스가 손으로 X 자 표시를 한다.

현수는 이곳에 오기 전 저쪽 사람들의 평판을 물어본 바 있다. 선한 이의 목숨을 빼앗긴 싫어서이다.

문제는 얼굴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여 크린스와 하나의 약속을 했다.

악한 자는 X, 선한 자는 O, 그저 그런 자는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아무튼 다가오는 제레미는 죽여도 될 자라는 뜻이다.

실제로 유카리안 영지의 제2인자인 제레미는 무력과 권력을 이용하여 나쁜 짓을 많이 했다.

여염집 여자들을 제 마음대로 유린했으며, 평민과 농노들의 재산을 강탈했다.

뿐만 아니라 흘러든 유랑민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부하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를 꼬투리 삼아 아내나 딸을 빼앗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상당히 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이들의 시신은 모종의 장소에 암매장되어 있다.

아무튼 죽여야 할 자라는 신호에 고개를 끄덕인 현수는 투구 사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상대의 나이는 40대 초반이다.

온갖 못된 짓을 하면서도 검을 놓지는 않았는지 오른손엔 두툼한 굳은살이 박혀 있다.

현수의 앞에 당도한 제레미가 오만한 웃음을 짓는다.

“어디서 뭐하며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인지 모르겠지만 오늘이 네 인생의 끝이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짐짓 아량을 베푼다는 듯 거만한 모습이다.

“누가 누굴 죽여? 그리고 한낱 용병이라고? 크흐흐! 나를 모욕했으니 오늘 유카리안 영지는 지옥이 뭔지 체험하게 될 것이다. 자아, 시작하지.”

지이이잉―!

현수가 검을 뽑아 들며 마나를 주입하자 시퍼런 검강이 쭉 뻗어 나온다.

“허억! 소, 소드 마스터! 용병인데 설마……?”

제레미가 화들짝 놀라자 말도 놀란 듯 뒷걸음질 친다.

“누, 누구십니까? 혹시……?”

제레미는 말을 맺지 못하였다. 현수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나? 네가 말한 한낱 용병! 받아랏!”

쒜에에에엑―!

챙! 퍼석―!

“크으윽!”

털썩―!

현수의 검강이 뻗어 나가자 제레미는 검을 들어 막았다. 하나 평범한 검으로 어찌 감당해 내겠는가!

제레미의 애검을 벤 검강은 그대로 그의 동체까지 베어버렸다. 수초 후, 선혈이 뿜어진다.

가슴의 절반가량을 파고든 검에 의해 제레미의 악행으로 점철된 인생은 끝나 버렸다.

“……!”

양쪽 진영 모두 멍한 표정이다.

이처럼 빠르게 승부가 결정될 것이라곤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짧았다.

“와아아아! 테세린 만세! 만세! 만세!”

먼저 환호성을 지른 쪽은 테세린 영지군이다.

한편, 유카리안 영지 쪽은 가장 강력한 무력을 투사할 수석기사 제레미가 너무도 어이없게 목숨을 잃자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누군가 소리친다.

“저, 전장의 학살자! 저자는 특급 용병 토마스다!”

“허억!”

모두 주춤하며 몇 발짝씩 뒤로 물러난다. 전장의 학살자 토마스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이다.

이때 현수가 검을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

“모두 공격하라! 공격하라!”

고삐를 잡아채자 말이 달리기 시작한다.

시퍼런 검강이 뿜어진 검을 들고 달려들자 유카리안 영지군은 한순간에 오합지졸로 변해 버렸다.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테세린 영지군이 일제히 진격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군마들이 달리는 소리에 유카리안 영지군은 들고 있던 무기를 팽개치고 도주하는 놈, 엎드린 채 두 손을 머리 위에 깍지 낀 놈 등 여러 가지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전투 의지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기사들마저 검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있다.

전장의 학살자 토마스가 나타난 이상 대적 행위는 곧바로 죽음에 이른다는 소문을 들은 때문이다.

“이이잇! 으아아아! 무엇들 하느냐? 어서 공격하라! 공격하란 말이야, 이 빌어먹을 놈들아! 뭐해! 어서 검을 들어 공격하라! 공격해!”

데니스 백작이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

모두 제 목숨 구하기에도 바쁜 때문이다.

정말 웃기는 일이지만 테세린과 유카리안 영지 사이의 영지전은 딱 두 명만 목숨을 잃고 끝났다.

가장 먼저 죽은 수석기사 제레미와 유카리안의 지배자였던 데니스 알만 드 유카리안 백작이다.

데니스 백작은 테세린 영지군 기사나 병사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다.

온갖 악다구니를 내뱉으며 집요하게 공격 명령을 내리던 그를 수행 중이던 영지의 차석기사가 찔렀던 것이다.

그래서 테세린 영지군이 코앞에 당도했을 때 유카리안 영지군은 모두 무릎 꿇고 항복 표시를 했다.

“세상에, 맙소사!”

테세린 군을 이끌던 로니안 자작은 너무도 싱거운 영지전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전장의 학살자라는 소드 마스터 하나가 모든 것을 압도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 때문이다.

“나무센 자작, 판정을 내려주시오.”

“미판테 왕국 행정관 나무센 자작은 오늘의 영지전이 테세린의 승리로 끝났음을 확인합니다. 이로써 유카리안 영지의 모든 것이 테세린에 귀속됨을 선언합니다.”

“와와와와와와! 테세린 만세! 만세! 만세!”

“아울러 로니안 자작은 백작으로 승작하게 될 것임을 선포합니다. 다만 이번 영지전에서…….”

나무센 자작이 왕국법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 데니스 백작의 모든 자산과 영지는 국왕과 로니안 자작이 반분한다.

새로 획득되는 영지에는 드넓은 곡창지대와 마나석 광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내용을 늘어놓는 동안에도 테세린 영지군이 환호성을 지른다.

너무도 시끄러워 자신의 말을 로니안 자작이 못 알아듣는다고 판단한 나무센 자작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여전히 투구를 쓰고 있는 현수에게 시선을 주었다.

전장의 학살자라는 닉네임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용모를 몰랐는데 눈앞에 있으니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왕궁에 보고하여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장의 학살자를 미판테 왕국이 확보한다면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보다 유리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갸웃거린다.

테세린 영지군 어느 누구도 ‘전장의 학살자 만세!’, 또는 ‘특급 용병 토마스 만세!’와 같은 환호성을 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무도 말해주지 않으니 나무센 자작은 고요한 시선으로 현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같은 순간, 현수의 등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다.

놀트란 영지에 있다가 놀란 기러기처럼 복귀한 테세린의 용병들이다.

특히 랄프와 줄리앙의 시선은 몽롱하다.

A급 용병 랄프는 현수가 준 최상급 포션 덕에 둘째 아들을 고질로부터 구해낼 수 있었다.

하여 언젠가는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고 생각했다.

하인스가 위기에 처하면 대전사 역할이라도 할 생각을 품은 것이다.

그런데 소드 마스터이다. 감히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에 올라 있으니 멍한 것이다.

줄리앙은 현수가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하마터면 소변을 지릴 뻔했다.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바 있다. 와이번의 공격을 단신으로 막을 때이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줄리앙의 뇌리로 섬전처럼 스치는 영상들이 있다.

캐러나데 사막에서 스콜론에게 쏘였을 때 현수가 허리를 빨아주던 영상이다.

그때는 진짜 엉덩이 한복판을 빠는 것이라 생각하고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혹시 냄새는 나지 않을까 하여 초조해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만 툭탁거렸을 뿐 현수는 늘 친절하고 다정했다.

음식 솜씨는 웬만한 요리사 뺨치고, 재미있는 노래는 또 얼마나 많이 아는가!

의리도 있고 자상하다. 또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데다 생긴 것도 곱상하다. 그리고 소드 마스터이다.

줄리앙은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낯을 붉히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슬며시 용병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다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로니안 자작을 보니 가신들에게 둘러싸여 새로 얻은 유카리안 영지를 접수하는 중이다.

유카리안의 기사와 병사들은 어느 누구도 반항하지 않는다. 그랬다간 전장의 학살자를 대면하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덕분에 영지 접수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현수는 말을 몰아 병사들 뒤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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