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7
언덕 하나를 넘어가니 이십여 대의 마차가 줄지어 서 있다.
“수고하셨어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죠?”
“고마워요, 백작님.”
카이로시아와 로잘린이다. 곁의 마차엔 세실리아 자작부인과 테세린 영지에 사는 귀족가의 여인들이 타고 있다.
일이 잘못될 경우 이레나 상단의 마차를 타고 곧장 드리안 영지로 갈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웬 영지전이 이렇게 일찍 끝나요?”
“전사자와 부상자는 많나요? 아버지는 어떠세요?”
“에구, 한 사람씩 물어보기. 일단 로시아가 먼저 물었으니 대답해 줄게. 영지전이 일찍 끝난 게 뭐가 잘못된 거야? 그리고 전사자는 딱 두 명이야. 데니스 백작과 수석기사 제레미, 그리고 부상자는 양쪽 모두 하나도 없어.”
“네? 그런 영지전이 어디에 있어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다. 실제로 영지전이 벌어지면 수많은 기사와 병사, 그리고 영지민이 목숨을 잃는다.
심한 경우는 영지민 전체의 8할까지 목숨을 잃는다.
유카리안 영지의 인구는 20만 명 정도 된다. 심할 경우 이중 16만 명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아이들과 일부 여인만 빼곤 다 죽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딱 두 명의 전사자만 있을 뿐이라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유카리안 영지의 기사가 영주인 데니스 백작을 시해한 것도 이러한 염려 때문이었다.
상대편에 전장의 학살자가 있는 이상 유카리안 영지의 승리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특급 용병 토마스는 상대를 벰에 있어 추호의 인정도 베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부상자를 남기지 않는 것으로도 이름나 있다.
다시 말해 누구든 대적 행위를 하면 적진을 완전히 헤집어 몰살시키는 것이 토마스이다.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영지전이다. 그런데 데니스 백작은 어서 공격하라면서 고래고래 소리만 지른다.
나가서 죽으라는 소리나 진배없다.
이를 제 목숨은 소중하고 수하들의 목숨 따윈 아무래도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기에 욱하는 마음으로 시해했다.
안 그러면 본인은 물론이고 모든 기사와 병사가 도륙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도 당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런 이유 때문에 싱거운 영지전이 되었다.
현수는 로잘린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피식 웃음 지었다.
하여 웃음을 베어 문 채 대꾸해 주었다.
“어디에 있긴, 여기에 있지. 진짜 전사자 두 명, 부상자 전무야. 그리고 자작님은 현재 저쪽 영지를 접수하는 중이야.”
“세상에,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로잘린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
그렇다 하여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귀족다운 삶을 사는 교육을 받아왔다.
그렇기에 영지전이 이렇게 끝날 수 있다는 걸 상상조차 못한 것이다.
“사람이 덜 죽으면 좋은 거 아냐?”
“그렇긴 해요. 그래도 너무나 이상해서…….”
“후후, 그건 내가 너무 세서 그래.”
“치이, 자기 자랑 하신다.”
로잘린이 눈을 하얗게 흘긴다. 그런데 그 모습이 비웃는 게 아니라 너무도 앙증맞다.
“이리 와봐.”
현수가 잡아당기자 로잘린이 헝겊 인형처럼 딸려온다. 그리곤 품에 푹 안긴다.
“자작님은 이제 두 개의 영지를 경영하게 되었어. 그래서 백작으로 승작하게 될 거야.”
“어머, 정말요?
로잘린의 물음에 웃고 있던 카이로시아가 대답한다.
“맞아. 귀족 중심파의 거두를 제거한 공을 높이 사서 승작될 확률이 매우 높아. 그래야 국왕 지지파의 입김이 세지니까.”
“고마워요. 모든 게 백작님 덕이에요.”
“고맙긴, 처가가 든든해지니 나도 좋은 일인데.”
“네? 처가요?”
로잘린은 부끄럽다는 듯 사르르 눈을 내리깐다.
근데 말끝을 올려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처가라는 말이 가당치 않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장난꾸러기 현수가 어찌 이 순간을 그냥 보내겠는가!
“뭐, 싫다면 할 수 없지. 로시아, 로잘린이 내 마누라 되기 싫은 모양인데 어쩌지? 그냥 우리끼리 살까?”
로잘린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어, 어머! 아니에요! 왜 저를 빼요? 전 백작님이랑 꼭 살 거예요. 그러니 그딴 말 하지 마세요.”
로잘린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품을 파고들자 현수는 슬쩍 보듬어 안았다.
“흐음, 내 마누라가 되고 싶다고?”
“네, 백작님의 여자로서 평생을 살고 싶어요. 근데 마누라라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이에요?”
“사랑하는 아내라는 뜻이야. 왜? 그렇게 말하니까 싫어?”
“어머, 아니에요. 저 백작님 마누라 할래요.”
“후후, 그래, 그럼!”
로시아는 흐뭇하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장래의 남편이 너무도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이 흡족하게 만든 것이다.
“치이, 또 장난치신 거죠?”
“이제 알았어? 하여간 로잘린은 놀려먹기 너무 좋아.”
“쳇! 자기 마누라 골려먹고 좋아하는 남편이라니, 무슨 백작님이 그래요?”
“……?”
“자고로 백작님쯤 되시면 듬직하고, 멋있고, 자상하고, 뭐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근데 백작님은 맨날 장난만 치시고, 날 놀려먹기나 하고… 쳇!”
로잘린이 투덜거리자 현수가 그녀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그럼 지난번에 로잘린 목욕하는 거 내가 봤다고 말할까?”
“헉! 아, 아니에요.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한 번만 봐주세요.”
로잘린이 갑자기 싹싹 빌기 시작하자 카이로시아가 의아하다는 듯 눈빛을 빛냈다. 무슨 영문이냐는 뜻이다.
이때 뇌리로 울리는 전음이 있다.
물론 현수의 음성이다.
[로잘린의 알몸을 보았거든.]
“네에?”
나머지를 더 설명하라는 뜻이다.
[오크의 습격에서 로잘린을 구할 때 목욕 중이었어.]
“허억!”
카이로시아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곤 로잘린을 살폈다.
한편, 로잘린은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를 짐작하곤 얼굴을 붉힌다.
너무도 부끄러웠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쳇! 뭐, 상관없어요. 저는 백작님의 마누라니까요.”
“치잇! 나보다도 먼저……. 쳇, 나도 목욕할래요. 와서 봐요.”
“끄으응!”
현수는 두 여인의 치기 다툼에 침음을 냈다.
테세린 영지의 승리는 미판테 왕국 전체로 번져 나갔다.
데니스 백작은 목숨을 잃었고, 그의 식솔들은 혼란을 틈타 도주했다.
영지전 판정관인 나무센 자작은 테세린의 승리를 선언했고, 유카리안의 절반은 테세린에 귀속되었다.
영지전이 벌어지는 동안 전사자는 딱 두 명이다.
수석기사 제레미와 영주 데니스!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었던 제레미는 전장의 학살자 특급 용병 토마스의 단칼에 죽었다.
데니스 백작은 휘하 기사의 손에 시해되어 목숨을 잃었다.
세인들의 이목을 끈 것은 전장의 학살자라는 명호이다.
특급 용병 토마스가 테세린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하여 여러 귀족이 텔레포트 마법으로 테세린으로 모여드는 중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전장의 학살자를 보지 못한다. 현수가 떠난 때문이다.
떠나기 전에 현수가 마나석 광산을 들렀었다는 것은 로니안 자작과 몇몇 인사만 알 일이다.
* * *
“어휴! 피곤해.”
“이봐, 뭘 하다 온 거야? 새로 살림 차리느라 그렇게 힘들었어? 점찍었던 케이트를 쓱싹하고 온 거지? 그런 거지?”
“으이그, 하여간! 미안, 좀 늦었어.”
입었던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던 현수가 한 말이다.
“어땠어? 좋았어? 삼삼했지? 그치?”
“삼삼하긴, 그저 그랬네.”
라세안은 현수의 대답이 지극히 마음에 든다는 듯 빙그레 웃는다.
“그래도 괜찮았지? 그랬나?”
“그래. 그랬으니까 이제 더 묻지 마.”
“크흐흐! 내 그럴 줄 알았지. 아무튼 좋았겠네. 참, 그동안 여길 좀 알아봤네. 영지 이름은 피리안, 영주는 변경백인 레더포드 아물린 반 피리안 백작이네.”
“그래? 그밖의 것은?”
“이 영지에 온갖 횡포를 부리던 광룡을 죽인 자네 스승인 아드리안 멀린 반 나이젤을 기리기 위해 피어 아드리안(F r Adrian)을 줄여 피리안(F rian)이라 이름 붙인 것이네.”
“……?”
“지금은 그의 후손이 통치하고 있지.”
“그래?”
현수는 특별할 것도 없기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침상에 벌렁 누웠다.
오기 직전까지 며칠만 더 머물다 가라는 카이로시아와 로잘린의 애원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인들을 떼어놓고 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또한 마음이 편하지도 않다.
그렇기에 심란함을 잠재우려 짐짓 눈을 감았다. 습관처럼 드래고니안들과의 비무를 떠올리려는 것이다.
그렇게 대략 10여 분쯤 지났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쿵, 쿵―!
“누구십니까?”
“피리안 영지 순찰이다! 문 열어라!”
“영지 순찰? 이건 또 뭐지?”
“뭐긴, 영지의 치안을 담당하는 병력이겠지. 끄응! 그나저나 귀찮게 툭하면 문을 열라 하고. 확 뒤집어엎어 버릴까?”
“에구, 관두게. 괜히 귀찮은 일만 일어나니.”
현수가 어슬렁거리며 나가 문을 열려는 순간 또 두드린다.
쿵, 쿵―!
“이런 빌어먹을 잡것들이! 어서 문 열지 못해!”
“아! 엽니다, 열어.”
삐이꺽―! 쿵―!
현수가 걸쇠를 위로 제치는 순간 거칠게 문이 열린다.
“아니, 이게 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하마터면 다칠 뻔하지 않았습니까?”
현수의 말처럼 문 뒤쪽에 있었으면 열리는 문과 부딪쳤을 것이다. 마침 반대쪽에 있었기에 무탈한 것이다.
“흥! 다치거나 말거나. 너희, 미판테에서 파견한 간세지? 뭐하느냐? 놈들을 체포하라!”
“네에.”
기사 복장을 한 녀석의 명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현수의 양쪽 팔을 잡는다. 나머지는 이게 무슨 일이람 하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던 라세안에게 쇄도해 갔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간세라니요?”
“흥! 잡아떼어도 소용없다. 너희는 미판테 왕궁에서 파견한 간세가 분명하다.”
“증거 있소?”
“증거? 너희 둘은 정식으로 국경을 넘어오지 않았다. 그게 증거다.”
말을 마친 기사가 병사들에게 소리친다.
“뭣들 하느냐? 가자!”
“네에!”
둘은 졸지에 병사들에게 끌려갔다.
2장 수석호위 라세안
라세안은 병사와 기사 전부 때려눕히거나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은 것은 현수의 전음이 있었던 때문이다.
이곳은 스승인 멀린이 시조가 되어 건국된 나라이다. 현재의 통치자는 스승의 후손이며, 현수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기에 잡아끄는 대로 끌려가는 것이다.
머물렀던 여관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상당히 많은 병사가 동원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