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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428화 (428/1,307)

# 428

아무튼 현수와 라세안은 병사들에 의해 병영으로 끌려갔다. 그곳엔 이십여 기사가 삼엄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다.

중앙엔 의자 비슷한 것이 놓여 있고, 주변엔 몽둥이, 꼬챙이, 인두 등 고문 도구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놈들을 앉혀라!”

현수와 라세안이 당도하자 중앙에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사내가 명령을 내린다. 병사들이 강제로 의자에 앉히려 하자 라세안이 뻗대며 묻는다.

“앉아!”

“아! 이거 왜들 이럽니까? 우리가 뭔 죄를 졌다고 이러는 거냐구요?”

“몰라서 물어? 너희는 미판테 왕궁에서 파견한 간세다. 아냐? 물론 아니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못 믿는다. 그래서 지금부터 차근차근 알아보려고 해. 뭐해, 어서 묶지 않고?”

사내의 명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라세안과 현수를 앉히려 했다.

현수는 힘으로 뻗대면서 어찌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에구, 이놈들을 때릴 수도 없으니……. 어휴! 근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잡아다 고문만 하면 된다는 건가?]

[이보게, 친구! 어떻게 해? 이놈들 확……!]

라세안의 전음은 중간에 끊겼다.

“아냐. 그러지 마. 지금부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가만히 있어.”

“끄으응!”

라세안이 할 수 없다는 듯 침음을 낼 때 중앙의 사내가 소리친다.

“이놈들! 지금 무슨 작당을 하는 게냐? 감히 뉘 앞에서! 놈들의 입에 재갈을 채워라!”

“네으이.”

병사 둘이 현수와 라세안의 입을 막을 넝마를 챙겨 든다. 누군가 입다 해져서 버린 걸레나 다름없는 더러운 것이다.

드래곤답지 않게 깔끔 떠는 라세안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네 이놈들, 지금 무얼 내게……!”

힘에 의해 반쯤 의자에 앉혀졌던 라세안이 벌떡 일어나자 찍어 누르던 병사들이 일제히 나가떨어진다.

와당탕탕―!

“크윽! 으윽! 윽! 컥! 큭!”

“……!”

아주 잠깐 침묵이 흐른다. 혼자서 다섯이나 되는 병사의 힘을 능가한 때문이다.

“에구……!”

기사와 병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는 모습을 본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냈다. 그리곤 자신을 잡고 있는 병사들을 밀쳤다.

“흐억! 으윽! 아앗! 흐미! 헉!”

병사 다섯은 감당할 수 없는 힘에 뒤로 밀려나며 일제히 신음을 토한다.

“누,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누군가의 말에 현수의 시선이 움직였다. 서른을 갓 넘긴 단단한 체구의 사내이다. 현수는 아공간에서 검을 꺼냈다.

스으윽―!

검집에서 검날이 드러나자 새파란 예기가 느껴진다. 기사와 병사들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노려본다.

현수는 반쯤 뽑았던 검을 다시 집어넣고는 대표인 듯한 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힘이 없어서 여기까지 따라온 게 아니다. 떳떳하기에 왔다. 그런데 우릴 간세 취급을 하다니……. 아드리안 공국의 병사들은 모두 이러한가?”

8서클 대법사이자 소드 마드터의 카리스마가 뿜어지자 모두 두어 발짝 물러난다.

범접할 수 없는 살기가 느껴진 때문이다.

“대, 대체… 누, 누구십니까?”

확연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물은 이는 기사들 가운데 하나이다.

현수는 오연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나? 하인스 멀린 드 셰울. 코리아 제국의 백작이다.”

“허억!”

모두 놀란 표정으로 물러난다.

현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비록 타국의 귀족이기는 하지만 고위 귀족을 함부로 체포한 죄를 면키 어렵기 때문이다.

“그, 그럼 곁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억지로 용기 내어 물은 이는 조금 전의 그 기사이다. 대답은 라세안이 했다.

“나는 하인스 백작님의 수석호위 라세안 옥타누스다.”

현수가 슬쩍 시선을 주니 눈을 끔벅거린다. 박자를 맞춰달라는 뜻이다.

“라세안은 우리 영지의 기사단장이기도 하다.”

“네에? 기, 기사단장님이요?”

포위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에 기사단장급은 없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야 모두 뒤로 물러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배, 백작님이신데 왜… 왜 평범한 용병 같은 복장을 하고 계신 겁니까?”

“여행 중엔 이게 편해서이다. 아드리안 공국엔 그러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입국 심사대를 정당한 방법으로 통과했다. 지금이라도 아드리안 공국 중서부 국경 수비대장인 알버트 폰 드세린 자작에게 확인해 보라.”

“헉! 실례했습니다, 백작님! 저희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십시오.”

국경수비대장의 이름을 정확히 대자 진위를 파악한 듯하다.

선두의 기사가 한쪽 무릎을 땅에 대며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현수와 라세안에게서 풍기는 기도에 압도된 결과이다.

“백작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타국의 귀족이라도 평민들은 예를 갖춰야 하기에 모두 무릎을 꿇는다.

하물며 상대가 제국의 백작과 기사단장이라는데 어찌 무례를 범하겠는가!

잘못했다간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일제히 무릎 꿇고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먼저, 나는 미판테 왕국에서 파견한 간세가 아니다. 이는 귀족의 명예를 걸고 하는 말이니 믿어도 될 것이다. 알겠나?”

“네!”

현수가 돌아서자 라세안이 수행하는 모양새를 갖춘다.

“가지!”

“네, 영주님!”

보무도 당당하게 장내를 빠져나와 여관으로 향하는 둘의 얼굴엔 개구진 웃음이 배어 있다.

“자네가 내 수석호위라고?”

“크흐흐! 그럼 뭐라고 그래? 암튼 출세했네, 내 호위를 다 받으니.”

“그래, 수석호위. 앞으로도 임무 잘 수행해.”

“끄응! 그렇다는 거지.”

“뭐야? 사내가 한번 내뱉은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한다는 거 몰라?”

“그런 말이 어디에 있어? 한 번도 못 들어보았네.”

“내 고향엔 그런 말이 있어.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는 놈을 찌질이라고 부르지. 루저라고도 해.”

“찌질이? 루저? 무슨 뜻이지?”

“아이들 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쪼다라는 거네. 아! 물론 상당히 안 좋은 뜻이지. 하긴, 제가 한 말도 지키지 않는 놈을 누가 좋게 보겠어? 안 그래?”

라세안은 생각만으로도 그렇다는 듯 떫은 감 씹은 표정을 짓는다.

현수는 속내를 짐작하고는 피식 웃는다.

“그나저나 목욕 다 했으니 슬슬 멀린 쪽으로 가야겠지?”

“그래야지. 언제 출발할 생각인가?”

“밥이나 먹고 천천히 가지, 뭐.”

“맘대로 하게.”

대화를 하며 여관에 당도하자 주인이 벙 찐 표정으로 바라본다.

기사와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갔던 사람들이 너무도 멀쩡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적이 파견한 간세라고 했는데.”

“어떻게 되긴, 아무 혐의도 없으니 나왔지.”

말을 마친 둘이 계단을 딛고 오르자 주인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저어, 손님, 죄송합니다만 방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왜? 내일까진 우리가 써도 되는 방이잖아.”

“그게… 단체 손님이 오셔서……. 죄송합니다. 숙박비는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끄으응!”

뭐라 할 수도 없다.

간세로 잡혀갔으니 풀려나는 건 고사하고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니 비어버린 방을 다른 손님에게 준 것이다.

“알겠네.”

둘은 주인으로부터 숙박비를 환불받았다. 그런데 다른 여관을 다 돌아보았지만 빈방이 없다.

“이런, 할 수 없지. 그냥 가세.”

마지막 여관을 나서며 현수가 한 말이다.

“그래야지.”

시각은 어슴푸레한 저녁나절이다. 하지만 둘에게 시각 따윈 중요치 않다.

터덜터덜 걸어서 성문 쪽으로 가려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뭐지?”

“노예 경매가 시작되려나 봐.”

“이 시각에?”

한국으로 치면 오후 5시 반 경이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엔 다소 늦은 감이 있다. 괜스레 호기심이 돋는다.

“한번 가볼까?”

“그러지, 뭐.”

둘이 다가가는 동안 경매가 시작되었다.

“자, 자, 이 계집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이웃나라인 테리안 왕국 자작의 딸로서 지금껏 힘든 일 한 번 안 하고 산 계집입니다. 이런 계집 괴롭히는 걸 낙으로 삼는 분에겐 딱입니다. 자, 그럼 1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노예상인이 경매대에 올려놓은 여인은 열일곱쯤 된 다소 통통한 소녀이다.

미구에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두리번거리고 있다.

이때 누군가 호가를 시작한다.

“십 골드에 내가 사겠소.”

“난 십일 골드!”

“십이 골드까지는 내겠소. 근데 그 계집, 처녀요?”

누군가의 말에 모든 시선이 노예상인에게 집중된다.

“당연하죠. 이 계집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유서 깊은 자작가의 딸로서 백작의 장자에게 시집가 장차 백작부인이 될 뻔했습니다. 하지만 아비가 반역에 연루되어 참수당하는 바람에 이렇게 팔려 나온 겁니다. 자자, 십이 골드까지 나왔는데 누구 십삼 골드 없습니까?”

“좋아, 내가 십삼 골드 내지. 크흐흐! 백작부인이 될 뻔한 계집을 품는 맛은 어떨지 궁금하네. 크흐흐흐!”

“그게 그렇게 되나? 좋아, 난 십사 골드 내겠네.”

통통한 소녀는 십팔 골드에 낙찰되었다.

현수는 색욕에 눈먼 사내들이 사려고 했다면 돈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경매에 끼어들려고 했다.

테세린 하인스 상단에서 열심히 마법 수련 중인 릴리와 로즈가 생각나서이다.

이번에 보았을 땐 저번과 많이 달랐다.

현수의 특별 부탁을 로사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말라깽이는 면하고 있었다. 게다가 깨끗한 의복을 걸치고 있어 보기에도 좋았다.

로즈는 2서클 마법을 거의 모두 습득하고 있었고, 릴리는 갓 2서클이 되어 있었다.

웬만한 마나 친화력으로는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성취였다.

누군가의 성노로 팔려갔다면 아마 지금쯤 지옥과 같은 나날을 보냈어야 할 자매이다.

현수 덕에 사람다운 삶을 산다면서 많이 고마워했다.

그래서 팔려 나온 소녀들을 구제해 볼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인상 후덕해 보이는 중년 부인이 샀기에 구경만 했다.

적어도 성노가 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 때문이다.

“휴우∼! 어딜 가든 희망이 없군. 위정자들은 백성의 아픔을 알까? 어찌 인간이 인간을 사고파는 거지?”

길을 나선 현수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라세안이 대꾸한다.

“자네가 사는 곳엔 노예가 없나?”

“적어도 겉으론 그러하네. 노예제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지.”

“그래? 그거 흥미롭군. 노예제도가 없는 인간 세상이라……. 여긴 좀……. 차라리 약육강식이 낫다니까. 인간은 이래서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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