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1
“하하, 칭찬 고맙소이다.”
잠시 후, 둘은 검을 뽑아 든 채 마주 서 있다.
“본 백작이 하수이니 먼저 들어가겠소이다.”
“그러십시오.”
지이잉―!
레더포드 백작의 검에서 푸르스름한 검강이 뻗어 나온다.
그런데 본인 말대로 소드 마스터가 된 후 진보가 없어서인지 굵기가 일정하지 못하다.
지이이이이잉―!
현수가 의지를 발현시키자 보다 굵고, 보다 선명하며, 보다 길고, 보다 고른 검강이 신속하게 뻗어 나온다.
“역시! 최상급이신 겁니까?”
“…그러합니다.”
현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음 놓고 들어가겠습니다. 야아압!”
쉐에에엑! 채챙! 쉬이익! 채채채챙―!
순식간에 이십여 합을 주고받았다.
레더포드 백작은 전력을 다했지만 현수는 본 실력의 삼 할 정도로 방어만 했다.
검을 맞대고 잠시 멈추게 되자 현수가 입을 연다.
“조금 더 빠르게, 그리고 전력을 다해보십시오.”
“감사하오. 그럼, 이잇!”
쒜에엑! 챙! 쉬익! 채챙! 쐐에엑! 채채채챙―!
시퍼런 검강이 격돌하면서 높고 경쾌한 소리를 낸다.
마치 광선검을 가지고 아이들이 가볍게 장난치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실상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검강이 전력을 다해 휘둘러지는 중이다.
둘의 격돌은 한 시간가량 계속되었다.
“휴우∼! 이제 좀 쉽시다. 생각해 보니 백작을 위한 만찬을 준비시켜 놓고 여기서 이러고 있었소이다.”
“하하, 그러지요.”
현수가 검을 거두자 백작이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가르침 덕분에 안개가 조금 걷힌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라니요. 검의 길을 걷는 동도끼리 너무 각별하게 예를 갖추는 것도 예가 아니라 들었습니다. 그냥 좋은 대결이었던 것으로 하십시오.”
“하하! 네에, 그러지요.”
레더포드 백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흡하나마 준비한 것이니 맛이 없더라도 즐겨주십시오.”
“네, 그럼.”
중세 유럽처럼 식탁 양끝에 앉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는 잘 차려진 만찬을 즐겼다.
그런데 고기에서는 누린내가 나고, 음식의 간은 엉망이다.
스테이크를 한 입 베어 문 현수는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후춧가루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역한 냄새 때문에 비위가 상한 것이다.
“그건 뭡니까? 으읏, 에취―!”
후춧가루가 후각을 자극한 모양이다. 현수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려 고기에서 누린내가 좀 심하게 나네요. 그 냄새를 줄이려 뿌린 겁니다. 백작님 것에도 뿌려 드릴까요?”
“그걸 뿌리면 냄새가 줄어든다고요?”
“미판테 왕국에선 없어서 못 파는 물건입니다. 한번 경험해 보십시오.”
현수가 후춧가루를 건네자 식사 시중을 드는 시종이 그것을 백작의 스테이크에 뿌렸다.
레더포드 백작은 잠깐 코를 씰룩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검은색에 가까운 가루 조금 뿌렸다 하여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
현수는 예상했던 반응에 또 한 번 웃었다.
“스테이크에 적합한 소스도 있는데 맛보시겠습니까?”
이번엔 대답이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스테이크 소스를 빈 접시에 담아 건넸다.
이건 현수가 직접 만든 것이다.
먼저 달군 팬에 버터를 녹인 뒤 얇게 썬 마늘을 넣고 볶았다. 여기에 양송이도 썰어 넣고 생크림을 부었다.
다음엔 소금으로 간을 맞췄고, 치즈 가루와 파슬리 가루를 뿌렸다.
그리곤 고소함을 더하기 위해 땅콩 가루까지 넣은 김현수표 특제 크림소스이다.
조심스레 소스를 묻힌 스테이크를 입에 넣은 레더포드 백작의 표정이 오묘하게 바뀌어간다.
달달하면서도 고소한 풍미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흐으음! 이건…….”
“맛이 괜찮으시지요?”
“쩝쩝, 이건 정말… 쩝쩝, 정말 맛이… 쩝쩝, 최곱니다.”
귀족은 음식을 입에 넣고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순간 레더포드 백작은 평소의 근엄함을 잊은 듯 열심히 씹으면서 이야기한다.
다 씹은 스테이크를 꿀꺽 삼키고는 얼른 또 다른 조각을 입에 넣는다.
이번엔 조금 전보다 소스를 더 많이 묻힌다.
현수는 이제 좀 먹을 만하다 느끼곤 느긋한 식사를 즐겼다.
“오늘 만찬은 내 평생 처음 먹어보는 진미였소이다. 감사하오, 백작.”
“무슨 말씀을…….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해 주시니 그 정도는 해야지요.”
“그럼, 내일 떠나실 예정입니까?”
“그럴 생각입니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작은 아쉽다는 표정이다.
“예서 며칠 더 머물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가! 대련을 또 하자는 뜻이다.
“하루 정도라면 더 머물 수 있습니다.”
피리안 영지를 둘러보고 싶은 생각 때문에 한 대답이다.
아크웰의 말대로라면 이 영지는 평민은 물론이고 농노들도 살 만한 곳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레더포드 백작은 제법 선정을 베푸는 것 같다.
오는 동안 보았던 사람들의 얼굴이 그 이유이다. 유행성이하선염(볼거리)이나 콰시오커3) 증상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이는 후진국형 질병이다. 다시 말해 피리안 영지는 굶는 사람이 드물다는 뜻이다.
평민은 그러하다 하더라도 농노나 그 자식까지 배불리 먹는 영지는 매우 드물다고 들었다.
이는 귀족들의 수탈이 비교적 덜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참, 이곳과 미판테 왕국의 세율 차이는 어떻습니까?”
“흐음, 정확하지는 않지만 미판테 왕국은 소출의 50%를 세금으로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드리안 공국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펴 30%만 받고 있지요.”
“아! 그래서…….”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삐쩍 말라 피골이 상접한 이가 드물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이는 시조이신 아드리안 멀린 반 나이젤님……. 어라! 그러고 보니 백작님의 성함에도 멀린이 들어가는군요. 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멀린은 우리 공국의 수도 명칭입니다.”
“그래요?”
현수는 대답을 회피했다.
아직은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음이다.
이는 아드리안 공국의 현황을 조금 더 알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영지는 토질이 좋아 작물이 잘 재배됩니다. 하여 세금으로 30%를 바치고도 그럭저럭 살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그렇군요.”
“문제는 점점 더 척박해져 간다는 겁니다. 매년 소출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레더포드 백작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내년부터는 굶는 영지민이 발생될 것이란 보고를 들은 바 있다.
영주로서 보살펴야 할 영지민들이 굶게 되었다 생각하니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진 것이다.
“지력 회복이 관건이라는 뜻이군요.”
“네? 지력 회복이라니요?”
레더포드 백작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표정이다.
“농사를 짓고 나면 소출이 생기지요? 그 소출이 가진 영양분 중 일부는 땅에서 흡수한 겁니다. 그러니 작물이 흡수한 작물 양분을 토양에 돌려주어야 계속해서 같은 양이 수확됩니다.”
아직은 뭔지 모르지만 상당히 전문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라 판단했는지 백작은 귀를 기울인다.
“작물을 심을 때 또는 작물이 자라고 있는 동안 작물이 흡수할 양분을 토양에 주는 것도 한 방법이지요.”
“그걸 어떻게……?”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불가사리라는 해양 생물을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불가사리가 어떻게 생긴 건지는 아시죠?”
“그럼요.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해만 끼치는 거지요.”
“네, 그렇게들 알고 있죠. 왕겨와 불가사리를 50대 50, 또는 70대 30으로 혼합하여 6개월 이상 발효시키면 염분이 어느 정도 제거됩니다. 그걸 밭에 뿌린 뒤 농사를 지으면 상당히 많은 소출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 그래요?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시종을 불러 메모토록 해야겠습니다. 양해하여 주십시오.”
“뭐, 그러십시오.”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작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스태프로 바닥을 두들긴 뒤 방문객을 알리던 늙은 시종을 데리고 왔다.
“우리 영지 최연장 시종인 알프레드입니다. 인사드리게.”
“하인스 백작님은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흐음, 그래요. 반갑습니다.”
나이가 최소 70은 되어 보였기에 아주 말을 놓지는 않았다.
“조금 전의 그 말씀, 다시 한 번 해주십시오.”
“그러지요. 농토가 척박해지는 이유는…….”
현수는 본인이 알고 있는 지식의 일부를 풀어놓았다. 물론 이곳 아르센 대륙에 맞춰 전문적인 용어는 바꿨다.
같은 곳에 같은 작물을 계속해 심으면 작물 양분이 모두 사라져 소출이 줄어든다는 것을 먼저 설명하였다.
다음엔 윤작4)에 의한 침식 방지와 지력 회복을 설명했다.
아울러 질소 고정이 가능한 콩과 식물의 재배가 토지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야기했다.
콩과 식물의 뿌리혹박테리아와의 공생관계에 의해 대기 중의 질소를 식물이 사용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준다는 내용은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웠으나 어찌어찌해서 넘어갔다.
이밖에 각종 거름과 퇴비 만드는 방법, 사용법도 이야기해 주었다.
말하는 내내 알프레드는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어느 것 하나 사리에 어긋남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농업용 목초액에 관한 설명이다.
숯을 만드는 방법과 희석 방법, 그리고 그 효용을 들은 알프레드와 레더포드 백작은 깜짝 놀란다.
목초액 원액을 다섯 배로 희석하면 제초제 역할을 한다.
100∼200배 희석 액은 살균, 살충의 농약이 된다.
500∼1,000배로 희석하면 거름의 액비로 사용된다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흥이 난 현수는 목초액으로 치료 가능한 질병에 관한 설명도 하였다.
“휴우! 정말 대단하십니다. 농사를 직접 짓는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이렇듯 소상히 아는 건지요?”
알프레드가 진심으로 감탄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우리 영지도 한때 지력 회복이 관건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영지민들이 연구하여 도출한 결론입니다. 이곳 피리안 영지에서도 유용했으면 좋겠군요.”
“그럼요. 당연히 그럴 겁니다. 그런데 말씀하셨던 것 중 콩과 식물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 몰라…….”
“내게 조금 있으니 가기 전에 나눠 드리겠습니다. 아울러 재배법도 알려 드리지요. 당분간은 먹지 말고 개체수 늘리기에 힘쓰십시오. 몇 년 지나지 않아 모든 영지민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현수는 아공간에 담겨 있는 강낭콩과 완두콩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