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4
“자네가 다니는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몇 서클인가?”
“네? 아, 네에. 마법학회장님은 5서클 유저이시고, 휘하 지도교수님들은 대부분 4서클이십니다.”
“그래? 아드리안 공국의 마탑주는 몇 서클이지?”
“영광의 마탑주이신 로만 커크랜드님은 6서클이십니다.”
“흐음, 마탑주가 6서클이라고?”
“네, 본시 7서클 대마법사님이 마탑주님이셨는데 어쌔신의 공격을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7서클 마법서를 모두 분실하여……. 아무튼 로만 커크랜드님은 6서클 유저십니다.”
카트의 뒷말은 점점 작아졌다. 왠지 초라해지는 느낌이 든 때문이다.
하나 잠시 후 조금 당당해진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우리 공국엔 영광의 마탑만 있는 게 아닙니다. 건국 시조이신 아드리안 멀린 반 나이젤님이 이끌던 이실리프 마탑도 있습니다.”
“이실리프 마탑?”
“네, 지금은 어느 분이 마탑주님이신지 모르지만 건국 시조님은 9서클 마스터셨습니다.”
카트는 스승인 멀린이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다는 표정이다.
“이실리프 마탑은 어디에 있지?”
“그, 그건… 아마도 바세른 산맥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카트의 음성에선 금방 자신감이 사라졌다.
아르센 대륙 최고의 신비라 칭해지는 이실리프 마탑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바세른 산맥은 아드리안 공국 영토가 아닌데?”
“그, 그래도 이실리프 마탑은 우리 공국의 마탑이에요.”
“누가 그래? 공국 땅에 있는 것도 아닌데.”
현수가 꼬치꼬치 캐묻자 카트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 그렇기는 해도… 아무튼 이실리프 마탑은 우리 공국의 마탑이에요. 이건 아르센 대륙 사람 모두가 인정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 그럼 이실리프 마탑 사람에게 물어봤어?”
“아,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실리프 마탑의 마법사님이 누구든 우리 공국을 공격하면 그에 상응하는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는 말씀을 하셨대요. 그러니까…….”
현수는 이쯤해서 카트 놀리기는 멈춰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이때 저만치 앞서가던 기사가 소리친다.
“트롤이다! 트롤이 다가온다! 모두 전투태세를 갖춰라!”
기사의 고함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뿐만 아니라 트롤들의 시선 또한 움직였다. 다른 곳으로 가려는 거였는데 기사의 고함 소리가 자극한 것이다.
트롤은 멀지 않은 곳에 싱싱한 먹잇감이 즐비한 것이 마음에 든다는 듯 쾌속하게 다가온다.
한편, 기사와 병사들은 마차 앞에 반원 모양으로 늘어선 채 다가오는 트롤을 형형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런 그들의 눈에는 공포의 빛이 어려 있다.
기사가 여덟이나 있으니 트롤 한 마리당 넷씩 달라붙으면 된다. 피해는 입겠지만 퇴치는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잔뜩 긴장한 채 검을 뽑아 들고 있는 것이다.
크르르르릉!
트롤들은 특유의 괴성을 내지르며 쏜살같은 속도로 쇄도했다.
카트는 눈앞의 기사들이 버텨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인지 낯빛이 몹시 창백하다.
같은 순간 현수와 라세안은 아주 느긋한 표정이다.
트롤쯤은 자다 일어나서라도 작살낼 실력자이기 때문이다.
“모두 주의해!”
기사들을 통솔하던 선임자의 명에 따라 모든 기사와 병사가 무기를 다잡았다. 그 순간 트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크와아아아!
퍼억―! 파팍―!
“크윽! 으윽! 캐액!”
두 번의 공격에 기사 셋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아무래도 몬스터들과의 대결 경험이 부족한 듯싶다.
크와와와와―!
자신의 공격에 앞을 가로막던 장애물 셋이 쓰러지자 트롤은 신났다는 듯 소리를 내곤 나머지에게 다가선다.
이 순간 현수의 입이 열린다.
“홀드, 홀드!”
“……!”
크와아아아! 크와아!
두 마리 트롤은 갑작스럽게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 친다.
억압된 자유를 되찾으려는 몸짓이다.
웬만한 마법사의 마법이었다면 잠시 발을 묶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8서클 마스터의 마법을 어찌 이겨내겠는가!
흉악한 안광과 괴성을 지르기만 할 뿐 발을 떼지 못한다.
“카트!”
“네, 백작님.”
“트롤의 피는 포션의 원료라는 거 알지?”
“물론입니다.”
“산 채로 받아야 많이 받을 수 있겠지?”
“무, 물론입니다.”
카트는 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짐작했다는 듯 부르르 떨며 여전히 흉성을 내지르는 트롤들을 바라본다.
“좋아, 지금부터 그 원료를 받아내라.”
“네?”
트롤들은 발만 떼지 못할 뿐 상체는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피를 뽑으라는 말같이 들린 때문이다.
5장 마탑주는 10서클
카트가 멈칫거리는 것을 본 현수가 빙그레 웃음 짓는다.
“매직 캔슬! 스테츄! 사일런스!”
홀드가 풀리자 곧바로 흉성을 내지르려던 트롤들은 석고상이라도 되었다는 듯 눈알만 굴린다.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 받을 수 있겠지?”
“네? 아, 네에.”
카트는 흉포하기로 이름난 트롤이 꼼짝도 못하는 모습에 얼이라도 빠진 듯한 표정이다.
“뭐해? 피 안 받아?”
“아, 네에. 바, 받아야죠. 알겠습니다.”
얼른 고개를 숙인 카트는 기사들에게 다가가 트롤의 선혈을 받으라는 지시를 내린다.
기사들 역시 불안한 눈빛으로 트롤을 바라보던 중이다. 하지만 어찌 상전의 지시를 어기겠는가!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살그머니 다가가선 얼른 트롤의 몸에 단도를 박아 넣는다. 갑작스런 통증에 트롤이 움찔거리자 화들짝 놀라며 물러선다.
그사이에 트롤의 몸으로부터 초록빛 선혈이 뿜어진다.
“어허! 귀한 원료 쏟아지잖아!”
“네? 아, 네, 알겠습니다.”
현수의 말에 곁에 있던 기사가 얼른 가죽 주머니로 트롤의 피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살아 있는 트롤의 피를 받아내는 초유의 경험 때문이다.
당장에라도 덮쳐 사지를 찢어발길 수 있는 놈이다.
그런데 금방 상처가 아물어 버린다. 역시 회복 능력 하나는 끝내주는 몬스터답다.
“다시 찌르고 어서 받아. 시간 없으니까.”
“네, 네에.”
푸욱―! 꿈틀―!
“허억!”
“어허! 또 귀한 원료 쏟는다.”
“아, 알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기사가 여전히 두렵다는 표정으로 상처 부위에 가죽 부대를 댄다.
같은 순간 트롤들은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어 고통을 주는 인간을 찢어발기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런데 소리를 지를 수도, 움직일 수도 없다. 온몸에 힘을 주지만 너무도 단단한 속박이다. 하여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8서클 마법사의 마법은 강력하고 질기다.
산 채로 온몸의 피를 빼앗긴 트롤의 눈이 감긴다. 과도한 실혈에 의한 죽음이다. 곁에 있던 녀석 또한 금방 죽었다.
“어때? 산 채로 받으니 양이 늘었나?”
“네, 그, 그럼요. 평상시보다 거의 두 배를 받았습니다.”
기사의 대답에 현수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사이에 병사들이 달려들어 트롤의 가죽을 벗기고 있다.
고기는 먹지 않지만 이빨과 힘줄 등은 비싼 값에 팔리는 물건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힘을 합쳐 금방 해체해 버린다.
“자, 이제 가지!”
“네, 백작님!”
기사 중 어느 누구도 현수의 말에 토 달지 않고 즉각적으로 움직인다. 출발하기 전 현수가 코리아 제국의 백작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제국의 백작이니 당연히 받들어 모셔야 할 존재이다.
그런데 카트로부터 소드 마스터라는 말을 듣고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겨우 25세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가 그만한 화후에 올랐다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오늘 5서클 이상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추측 불가의 인물이라는 전언을 들었다.
물론 이번에도 카트로부터 흘러나온 이야기이다. 혹시라도 실수할까 싶어 넌지시 흘린 말이다.
어찌 감히 기어오를 생각이나 하겠는가!
존경을 넘어 경외하는 마음이 드니 무슨 말이든 떨어지기만 하면 재깍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다.
“저어, 백작님!”
마차가 출발하고도 한참 동안 카트는 입술을 깨물거나 제 손을 주물럭거리며 뭔가를 망설였다. 그러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연 것이다.
“왜?”
“호, 혹시 위대한 존재신가요?”
“나더러 드래곤이냐고 묻는 건가?”
“네? 아, 네에.”
카트는 몹시 두렵다는 표정이다.
“왜 그런 생각을 했지?”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백작님은 소드 마스터의 끝에 계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법도 너무 능숙하셔서……. 아르센 대륙사라는 책에 이르기를 마검사는 백 년에 하나 나타나기도 어려운 존재라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현수는 짐짓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에 카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늘어놓는다.
“지금껏 나타난 마검사 중 최고는 300년 전 아렌 후작이라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면서 4서클 마법사셨지요.”
“그랬나?”
진짜 처음 듣는 이야기이기에 어서 말을 이어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런데 백작님은 소드 마스터시면서 5서클 마법사이시니… 혹시…….”
카트는 현수의 표정을 살핀다.
“내가 5서클 마법사라고? 누가 그래?”
“아까 시전하신 마법 타임 딜레이와 타임 패스트 마법은 모두 5서클 마법이잖아요. 그러니…….”
“잠깐!”
말을 끊은 현수가 마차의 창문을 내린다.
밖에는 근엄한 표정으로 마차를 수행하는 라세안이 있다. 마치 근접 경호라는 듯한 모습이다.
“어이, 라세안!”
“네, 영주님! 부르셨습니까?”
타인의 시선이 있고, 이번 유희가 재미있을 것이란 판단을 하였기에 라세안은 즉각 대답을 한다.
“그래, 여기 있는 이 친구가 나더러 5서클 마법사라고 하는데 자네도 동의하나?”
“……!”
라세안은 대답 대신 카트를 바라본다. 어이없다는 눈빛이다.
이에 카트는 배고픈 새끼 새가 어미 새를 바라보듯 진실을 말해달라는 애원의 눈빛을 보낸다.
“동의하냐고 물었네.”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이신 영주님께서 어찌 하찮은 5서클 마법사이시겠습니까?”
라세안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카트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떠진다.
물론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라는 말 때문이다.
“네? 네에? 뭐라고요? 바, 방금 뭐라 하셨어요?”
대답 대신 라세안이 이은 말은 카트의 뇌리를 강타한다.
“그건 10서클 마법사인 영주님을 모독하는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