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5
“헉! 네에? 시, 십 서클이요?”
카트는 숨도 쉬지 못하는 모양이다.
“카트린느 양, 당장 용서를 구하는 게 좋을 겁니다.”
“허억!”
카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멍한 시선으로 현수를 바라볼 뿐이다.
어찌 보면 용서를 청할 마음이 없는 듯한 모습이다.
“영주님, 방금 전 카트린느 양은 감히 이실리프 마탑의 탑주이신 영주님을 모독했습니다. 마탑 규정에 의하면 이에 대한 처벌은 삼족 몰살 및 전 재산 압수입니다. 시행토록 할까요?”
라세안의 과장된 말에 카트는 혼백이 일시에 흩어지는 아득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저도 모르게 앉았던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털썩 꿇는다.
“아아, 위대하신 마탑주님! 저, 저의 잘못을 부디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에구, 정체를 밝히는 것은 괜찮지만 10서클이라니? 너무 뻥이 센 거 아닌가?]
[무슨 말을……. 10서클 맞으면서…….]
라세안은 현수가 자신에게까지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 한다 생각하고는 살짝 삐친 듯 시선을 돌린다.
이때 현수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라세안이 분위기를 과도하게 맞춰주려 한다는 느낌을 받은 때문이다.
그리고 앞에 부복하듯 엎드린 카트의 하의가 점점 젖고 있음을 본 때문이다. 과도한 두려움이 빚어낸 생리현상이다.
하지만 마차 바닥을 들여다볼 수 없는 라세안은 현수의 이 표정을 들켰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자아! 이제 이실리프 마탑의 탑주가 아드리안 공국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소문이 번지겠군. 안 그래?]
[그러라고 짠 거잖아. 근데 뻥이 세서 얘들이 믿을까 몰라.]
[뻥은 무슨…….]
라세안은 말끝을 흐렸다. 같은 편 하기로 해놓고 슬쩍 발을 빼려는 느낌을 받은 모양이다.
점심을 먹고 마차에 오르기 전 현수와 라세안은 가벼운 산책을 했다. 이때 이실리프 마탑주가 아드리안 공국에 발을 들여놓았음이 세상에 알려지게 해야 한다는 말을 했었다.
문제는 현수 본인의 입으로 ‘내가 이실리프 마탑주요’라는 말을 꺼내기가 남세스럽다는 것이다.
하여 자연스레 이런 상황이 만들어지도록 이야기되었다.
하지만 10서클이라는 말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냥 마탑주라는 사실만 말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라세안이 판을 키워놓았고, 카트는 겁에 질려 소변까지 지린 것이다.
“마, 마탑주님, 제, 제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흐흑!”
아드리안 공국에 있어 이실리프 마탑은 단순히 마법사들의 집합체라는 의미가 아니다. 공국을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 또는 수호신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초대 마탑주가 건국의 시조라는 건 코흘리개 어린애도 아는 사실이다. 당연히 모든 귀족은 물론이고 공왕까지 허리 숙여 영접해야 할 최고통수권자이다.
후임 마탑주는 공왕과 동급이다.
마탑주가 나타나면 공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영접해야 하며 마탑주와 같은 각도로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이는 아드리안 공국 국법서에 기록되어 있다. 건국 시조의 직계 제자에 대한 예의와 관련된 조항에 쓰여 있다.
공왕의 권한 가운데에는 귀족의 임명권과 해지권이 있다.
나라를 위한 공이 있는 자에게 공 후 백 자 남작 및 준남작까지 훈작할 수 있고, 죄지은 자는 언제든 작위를 해제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또한 공국에 속한 모든 백성의 생살여탈권도 있다. 합리적인 명분만 있으면 누구든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실리프 마탑주는 공왕과 같은 권한을 가졌기에 귀족가의 삼족 몰살을 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말을 들었으니 겁이 나도 단단히 난 것이다.
자신의 실수로 레더포드 백작은 물론이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마저 목숨을 잃게 생겼다.
하여 자기도 모르게 소변을 지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덜덜 떨고 있는 카트는 본인이 어떤 실례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극도의 공포가 빚어낸 결과이다.
남장을 한 카트의 하의가 모두 젖었다. 그것으로 부족하였는지 노란 물줄기가 현수 쪽으로 흘러나온다.
‘짜식, 너무 겁을 줘서 얘가 이러잖아. 에구! 이를 어째.’
현수는 살짝 라세안을 째려보고는 창문을 닫았다.
“워싱! 클린!”
“……?”
갑작스레 온몸을 휘감는 물기에 화들짝 놀란 카트는 고개를 들려다 자신이 저질러 놓은 일을 보게 되었다.
“어머!”
“이베포레이션!”
증발 마법이 구현되자 천천히 흘러가던 노란 물줄기가 스르르 사라진다. 대신 진한 지린내가 난다.
“끄응! 에어 퓨리파잉!”
“……!”
카트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다 큰 처녀가 외간남자 앞에서 오줌을 싼 현장을 들켰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카트린느 양!”
“네? 아, 네에.”
현수의 부름에 무심코 대답했던 카트가 얼른 고개를 숙인다. 너무도 부끄럽고 창피한 때문이다.
“기사에게 명해 왕궁에 본인이 왔음을 알리도록 해.”
“네? 아, 네에. 아, 알겠습니다.”
와당탕―!
카트가 허겁지겁 밖으로 향하자 현수는 피식 웃음 지었다.
“흐흠, 이거 무슨 냄새지?”
라세안이 코를 벌름거린다.
“글쎄? 무슨 냄새라도 나나?”
“그래. 흐음! 지린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기사단장 노릇 잘해. 알았지?”
“그래, 걱정 말게. 근데 저 앞의 저건……? 냄새나는 오크들이군. 이럇! 저건 내가 처리하지.”
라세안이 행렬의 선두로 나아갈 때 기사들은 카트의 부름을 받고 모여들던 상황이다. 따라서 앞에서 다가오는 오크 무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기사들이 비운 자리를 채우기 위해 앞으로 나가던 병사들은 대략 300여 마리에 달하는 오크 무리를 보고 소리를 지르려 했다.
이때 앞으로 치고 나간 라세안이 손을 들어 이목을 모은다.
“괜찮다. 저 정도면 나 혼자서 처리할 수 있으니 소리치지 마라.”
“네? 호, 혼자서요? 오크가 삼백여 마리나 되는뎁쇼?”
“그래. 그러니 여기서 보고만 있어라.”
“……!”
병사들은 라세안이 미쳤다고 여겼다.
백작 영지의 기사단장이라고는 하지만 혼자서 오크 삼백여 마리를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여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라세안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세안은 뚜벅뚜벅 오크 무리를 향해 걸어갔다.
오크들은 다가서는 먹잇감을 노려보며 일제히 침을 흘린다. 라세안이 모든 기운을 감추었기에 드래곤인지 모르는 것이다.
“취익! 인간이다. 취익! 내가 먹는다.”
“취익! 나도 배가 고파. 내가 먼저 먹는다. 취익!”
“취익! 아니다. 내가 먹는다. 취익!”
오크들은 일제히 흉성을 내며 라세안을 향해 모여들었다.
“취익! 내가 제일 먼저닷! 취익!”
오크 중 하나가 달려들자 나머지도 일제히 몰려든다. 어렵게 찾은 먹이를 다른 놈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본능 때문이다.
지이이이잉―!
라세안이 뽑아 든 바스타드 소드에서 뿜어지는 새파란 검강을 본 병사들의 눈이 일제히 커진다.
“헉! 저, 저건…….”
“호, 혹시 검강? 그, 그렇다면 저 사람이, 아니, 저분이 소드 마스터?”
“헉! 마, 말도 안 돼. 아직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데 그 나이에 소드 마스터라니.”
병사들이 술렁이는 순간 라세안이 기합을 내지른다.
“야아압!”
쒜에에에에에엑!
퍽! 팍! 뻐걱! 파삭! 퍼억! 서걱! 빠빡! 퍼억!
“캑! 끄악! 크억! 아악! 캑! 커컥! 크윽! 크억!”
라세안을 향해 몰려들었던 오크들의 선두가 일제히 쓰러진다. 하나같이 신체가 절단되었기에 초록색 피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하지만 라세안의 의복은 멀쩡하다.
실드 마법이 구현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뒤에서 쫓아오던 오크들은 앞의 상황을 보지 못했다. 너무나 빨랐고 느닷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먹이를 향해 밀물처럼 접근한다.
“야아압!”
쒜에에에에에엑!
퍽! 팍! 뻐걸! 파삭! 퍼억! 서걱! 빠빡! 퍼억!
“캑! 끄악! 크억! 아악! 캑! 커컥! 크윽! 크억!”
두 번이나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제야 감당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오크들이 일제히 물러선다.
하지만 라세안은 놈들이 도망가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
“야아압!”
쒜에에에에에엑!
퍽! 팍! 뻐걸! 파삭! 퍼억! 서걱! 빠빡! 퍼억!
“캑! 끄악! 크억! 아악! 캑! 커컥! 크윽! 크억!”
기합을 내지르며 섬전처럼 쏘아져 가며 검을 휘두르자 오크들이 썩은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진다. 그와 동시에 초록빛 선혈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한편, 병사들은 멍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학살 현장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때문이다.
그런 그들의 뇌리로는 아무런 상념도 스치지 않는다.
자신들로서는 단 한 마리도 감당할 수 없을 오크들이 우수수 쓰러지는 모습을 어찌 맨정신에 감당해 내겠는가!
“헉! 소, 소드 마스터다!”
카트의 긴급 소집에 몰려들었던 기사 가운데 하나가 뒤늦게 전방을 바라보고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른다.
그와 동시에 모든 기사의 시선이 움직였다.
“헉! 지, 진짜, 진짜 소드 마스터다.”
“세상에, 맙소사!”
“소드 마스터였다니…….”
기사들마다 한마디씩 한다. 그중 하나의 안색이 창백하다.
라세안이 늘 마차 곁에만 있는 게 눈에 걸려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단단히 벼르던 기사이다.
자신들은 늘 사방팔방을 살피는데 혼자서 느긋하게 따르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라세안이 300여 오크를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5분이다. 그러는 동안 카트 역시 멍한 표정으로 보고만 있었다.
하인스 백작이 소드 마스터인 것은 알았지만 기사단장인 라세안 역시 소드 마스터일 것이라곤 생각지 못한 때문이다.
“세상에, 맙소사! 소드 마스터 마검사가 둘이라니.”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트의 중얼거림을 들은 기사의 반문이다.
“참, 바이런 경!”
“네, 아가씨. 아니, 공자님!”
“지금 즉시 다른 기사들과 함께 왕성으로 출발하세요.”
“네? 그럼 아가씨, 아니, 공자님의 호위는 누가? 병사들만으론 부족합니다.”
“방금 전에 보지 못했어요? 저분은 소드 마스터입니다.”
“아……!”
기사 바이런은 깜박 잊었다는 듯 제 손으로 이마를 친다.
“그런데 왜 저희만 먼저 수도로 가야 합니까?”
“가서 국왕 전하께 전하세요.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님이 수도로 가시는 중이라고.”
“네에? 이, 이실리프 마탑의 탑주님이요? 갑자기 그건 왜? 그리고 마탑주님은 어디에 계시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