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6
“하, 하인스 백작님이… 백작님이 바로 마탑주님이세요. 소드 마스터이시고 10서클 마법사라고 해요.”
“헉! 네에?”
바이런을 비롯한 기사 전부 눈을 크게 뜬다. 이때 라세안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마법을 영창한다.
“마나여, 모든 것을 불태우라! 헬 파이어!”
쉐에에에엑! 화르르르르르!
캐액! 끄윽! 크아아악! 캐액!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오크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른다. 같은 순간 카트의 눈은 흰자가 검은자보다 월등히 많아진다.
“세, 세상에! 헤, 헬 파이어? 저건 8서클 마법인데.”
시뻘건 화염이 죽어 자빠진 300여 오크의 사체를 불사르는 모습을 본 카트는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렸다.
대륙의 어떤 마법사도 감히 시전할 생각조차 못하는 8서클 마법 헬 파이어를 목도한 때문이다.
미판테 왕국와 아드리안 공국은 현재 전쟁 중이다. 그렇기에 케발로 영지에서 벌어졌던 일이 전해지지 않은 상황이다.
다시 말해 대륙에 헬 파이어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대마법사가 출현한 것이 소문나 있지 않다.
이러니 어찌 넋이 나간 표정을 짓지 않겠는가!
이것은 다른 기사나 병사들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눈을 부릅뜬 채 당당한 라세안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털썩―!
누군가 다리의 힘이 빠졌는지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는다.
이런 현상은 곳곳에서 벌어진다.
털썩, 털썩, 털썩!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병사와 기사들의 수효가 무려 50이 넘는다.
나머진 간신히 버티는 중이다.
“마탑주님, 하명하신 대로 오크들을 처리했습니다.”
“수고했네.”
라세안이 절도 있게 고개 숙이며 보고하자 마차 안의 현수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대꾸한다. 그리곤 시선을 돌려 카트린느를 바라본다.
“카트린느 양.”
“네, 마탑주님!”
“내가 나타났다는 걸 왕성에 보고하라는데 왜 아무도 출발하지 않지?”
“가, 갑니다. 다, 당장 보낼 겁니다, 마탑주님!”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카트의 시선을 받은 기사들은 일제히 마차를 향해 군례를 올린다.
“충! 저희가 보고하겠습니다, 마탑주님!”
“좋아, 수고들 해주게.”
“네, 전력을 다해 질주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기사들이 일제히 말에 올라탄다.
“이럇! 이럇!”
두두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전방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카트가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흔든다.
“마, 마탑주님, 이제부턴 제, 제가 모시겠습니다.”
말을 마친 카트가 마부석으로 오르려 한다.
“아냐. 그럴 필요 없으니 그냥 이리 와.”
“제, 제가 어찌 감히 위대하신 마탑주님과 동석을 하겠습니까? 그냥 마부석에 오르겠습니다.”
“백작의 영애를 마부석에 앉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냥 이쪽으로 오르게. 이건 명령이네.”
“헉! 네에, 알겠습니다.”
현수가 카트린느를 마차 안으로 불러들이려는 것은 아드리안 공국 내부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함이다.
“자, 이제 출발하지. 이제부턴 라세안 자네가 병사들을 지휘하게.”
“네, 마탑주님. 병사들은 모두 들어라! 이제부터 너희는 마차의 뒤만 따라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모든 병사가 절도있는 모습으로 군례를 올린다.
이제부터 자신들의 임무는 따르면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것이다. 8서클 마법사이자 소드 마스터인 라세안만 있으면 어떤 몬스터가 덤빈다 하더라도 모두 격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부는 나이젤 산맥을 관통하는 길로 가도록 하라.”
“네, 알겠습니다.”
지금껏 부르르 떨고만 있던 마부가 얼른 고개를 숙인다.
“카트린느 양.”
“네, 마탑주님.”
카트는 남장을 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것도 모른다는 듯 얼른 고개를 조아린다.
“아드리안 공국에 대해 말해주게.”
“네?”
“현재의 실권자가 누구이며 귀족들이 어떤지에 대해 말하라는 뜻이네.”
“아, 네에. 저희 아드리안 공국은 아민 멘데스 폰 아드리안 공왕 전하께서 이끌고 계십니다.”
“흠, 그리고? 공작이 둘 있는 걸로 아는데?”
“네, 필립스 공작님과 로레알 공작님이 계십니다. 필립스 공작님은 무(武)로, 로레알 공작님은 문(文)으로 유명하시죠.”
“국왕파와 귀족파로 나뉘어 있지는 않고?”
“로레알 공작님은 국왕파이고 필립스 공작님은 귀족파를 이끌고 계십니다.”
“레더포드 아물린 반 피리안 백작은 어디에 속하지?”
“하, 할아버지는 중립이십니다. 중앙과 관련 없이 오로지 국경 수비에만 몰두하기에도 바쁘다면서 누구의 손도 잡지 않으셨습니다.”
카트린느는 몹시 조심스런 어투로 대답한다. 현수의 심중을 모르니 혹여 눈 밖에 날까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흐음, 그래? 그럼 귀족파와 국왕파에 대해 더 설명해 보게.”
“네, 로레알 공작님이 이끄시는 국왕파엔…….”
카트린느의 설명이 이어진다. 본인은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확연한 여자의 음성이다.
아드리안 공국은 현재 전쟁 중이기에 모든 정쟁이 멈춰 있는 상태이다. 그전에는 국왕파와 귀족파, 그리고 중도를 표방하는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다 미스릴 광산이 발견되었다. 문제는 광산의 위치이다.
6장 아드리안 공국의 현재
얼마 전 아드리안 공국에선 반역 사건이 있었다.
백작 하나와 자작 셋, 그리고 남작 넷이 엮인 모반 사건이다.
관련된 귀족들은 모두 참수형에 처해졌다. 작위는 폐위되었고,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다.
가족들은 전부 노예가 되어 타국으로 팔려 나갔다.
모반과 관련된 영지엔 중앙에서 행정관을 파견했다.
재산 상태를 파악하고 혐의있는 자들을 잡아들이기 위함이다.
그러던 중 반역을 도모했던 자작 중 하나의 영지에서 미스릴 광산이 개발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미스릴은 전략 물자이다. 그렇기에 지체없이 보고되었다.
문제는 그 영지의 위치이다. 로레알 공작과 필립스 공작 영지 중간에 위치한 곳이다.
폐위된 자작의 영지는 두 공작 중 하나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일찌감치 결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것은 계륵(鷄肋)과 같기 때문이다.
자작의 영지는 넓은 편이다.
그런데 공국의 세제는 영지민의 숫자와 영지의 면적이 합산되어 계산하도록 되어 있다.
영지민의 숫자도 제법 되기에 상당히 많은 금액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하는 영지이다.
문제는 이 영지의 농토가 타 영지에 비해 확연히 적다는 것이다.
그리고 늘 몬스터의 내습에 대비를 해야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로레알 공작과 필립스 공작은 서로 상대의 영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져봐야 득 될 것 없다 판단한 것이다.
그러던 중 미스릴 광산이 개발되고 있음이 보고되자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이번엔 서로 갖겠다고 난리를 피운 것이다.
국왕파와 귀족파로 갈려 있던 상황인지라 여타 귀족들까지 가세하여 한참 시끄러웠다. 미스릴 광산을 갖는 쪽의 힘이 더 우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삼국연합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방어에 나섰다.
하지만 워낙 병력 수가 적었기에 아드리안 공국군은 형편없이 밀렸다.
그 상태로 한 달만 더 두었다면 아드리안 공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3만의 병사로 30만이 넘는 삼국연합군을 상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 나라가 아드리안 공국의 영토를 나눠 갖고 미스릴 광산은 공동 소유가 될 상황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실리프 마탑이 출현하였다.
소문의 근원은 알베제 마을이다.
테리안 왕국에서 번지기 시작한 소문은 일파만파가 되어 대륙 전체로 번졌다.
전설처럼 전해졌기에 이실리프 마탑은 존재 자체가 의문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아드리안 공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몇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확인하려는 마법사 및 귀족들의 발길로 알베제 마을은 엄청 북적였다.
그곳엔 길들여진 샤벨타이거가 있었다.
워낙 흉포한 맹수인지라 6서클, 또는 7서클 마법사들은 감히 길들여 볼 생각조차 못하는 녀석이다.
그런데 얌전한 강아지처럼 군다.
삼국연합의 수뇌부는 조심스럽게 철군을 명령했다. 하지만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다.
혹시 몰라 아드리안 공국의 경계 밖에 머물고 있다.
이실리프 마탑에 관한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 곧장 진격하기 위함이다.
아드리안 공국으로선 답답할 노릇이다. 외국과의 교역은 거의 모두 끊겼다. 자급자족을 하기엔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다.
북쪽의 카이엔 제국은 라이셔 제국과의 전쟁으로 아드리안 공국의 어려움을 헤아릴 여력이 없는 상황이다.
라이셔 제국 남쪽에 위치한 크로완 제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때문이다.
바다 건너 동쪽에 제라스 왕국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바다를 건너려면 해적을 물리쳐야 한다.
바다에서의 전투에 특화된 이들을 상대하기엔 아드리안 공국의 무력은 너무도 약하다.
그렇기에 고립무원인 상태나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진행 중이다.
국왕파와 귀족파의 암투는 수백 년을 이어온 내전의 도화선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드리안 공국의 왕궁은 지금 몹시 소란스럽다.
케발로 영지에서 있었던 헬 파이어 마법에 관한 소문이 이제야 전해진 때문이다.
“공왕 전하, 그건 분명 이실리프 마탑에서 오신 분일 겁니다. 이제 우리 공국의 위기는 해결된 셈입니다.”
“그러하옵니다. 이실리프 마탑의 마법사는 9서클 마스터인 것으로 알려지옵니다. 따라서 삼국연합은 ‘에구, 뜨거라!’ 하며 물러날 것이옵니다. 감축드립니다.”
로레알 공작과 필립스 공작을 위시한 귀족들의 얼굴엔 미소가 어려 있다.
지금껏 전전긍긍하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삼국연합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면 작위는 자동적으로 사라진다.
뿐만 아니라 모든 재산은 몰수당할 것이며 재수 없으면 목숨을 잃거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하여 상당히 많은 귀족이 은밀히 재산을 처분하였다.
영지를 가져갈 수 없으니 금은보화만 들고 상국이라 할 수 있는 카이엔 제국으로 도주하려는 것이다.
발 빠르게 도주한 귀족의 수효만 벌써 이십여 명이다. 백작 둘, 자작 열여섯, 그리고 남작이 넷이다.
모두 북부에 머물던 영주들이다.
아드리안 공국을 침몰하는 배로 여긴 자들이다.
아무튼 미판테 왕국 케발로 영지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아드리안 공국의 궁전은 시끄럽다. 누가 먼저 이실리프 마탑과의 친분을 쌓느냐에 따라 향후 정국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