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7
국왕파인 로레알 공작은 적대 세력의 수장인 필립스 공작을 슬쩍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공왕 전하,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를 점검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아! 맞다. 로레알 공작, 좋은 지적을 해주었소. 현재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의 상황은 어떠하오?”
“소신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올해가 새로운 인물로 교체되는 해이옵니다. 현재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에 머무는 여인들의 나이가 과년한지라…….”
로레알 공작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필립스 공작이 가로채고 들어온 때문이다.
“소신 또한 그에 대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여섯 여인 중 넷이 교체 대상이옵니다.”
“호오, 그래요? 그렇다면 마탑주께서 오기 전에 얼른 교체를 해야겠구려.”
“그렇사옵니다. 그러니 전통대로 왕후 마마로 하여금 선발하시도록 하여야 함이 마땅하옵니다.”
참고로 아민 멘데스 폰 아드리안 공왕의 제1왕후는 로레알 공작의 장녀이다. 그리고 제2왕후는 필립스 공작의 차녀이다.
로레알 공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필립스 공작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연다.
“공왕 전하, 로레알 공작이 언급한 것이 전통이기는 합니다. 하오나 이전의 선발권은 이실리프 마탑주께서 언제 오실지 모를 때의 일이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마탑주가 출현하셨으니 공정을 기하기 위해 제2왕후 마마 또한 선발에 참여토록 함이 마땅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흐음, 그래요?”
공왕은 심히 염려스럽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1왕후와 제2왕후가 견원지간이라는 건 온 국민이 아는 일이다. 바로 곁에 있는 공왕이 어찌 모르겠는가!
왕후들의 소생인 제1왕자와 제2왕자의 사이 또한 다르지 않다.
석 달 차이로 출생한 왕자들은 서로를 사갈시한다.
아무튼 지극히 사이가 좋지 않은 왕후들로 하여금 선발권을 주었을 경우 문제가 발생될 것이다. 서로 자신이 추천하는 인물이 낙점되어야 한다며 이전투구(泥田鬪狗)할 것이 뻔하다.
이쯤해서 탕평책을 내놓지 않으면 이실리프 마탑주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다.
공왕이 이런 생각을 할 때 로레알 공작과 필립스 공작을 위시한 국왕파와 귀족파들은 서로를 째려보며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위기를 넘긴다 싶으니 다시 대결 구도로 되돌아간 것이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 눈을 뜬 공왕은 나직이 혀를 찼다.
‘이런 사람들을 귀족이라고 데리고 있어야 하다니. 쯧쯧쯧! 갈아치울 수만 있다면 모조리 내다버리고 새로운 인물로 채우고 싶건만…….’
아민 멘데스 폰 아드리안 공왕은 부친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고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일들이 있다.
하나는 왕립 아카데미이다.
이전엔 그곳이 어찌 운영되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공왕에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데미를 찾았다.
이전엔 왕위 다툼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취임하고 보니 귀족들이 하는 짓거리가 구역질나올 정도였기 때문이다.
아민 공왕은 아카데미에서 여러 인재를 발굴해 냈다. 그들은 현재 말단이기는 하지만 행정관으로 재직 중이다.
장차 요직으로 옮겨가면서 상층부의 썩은 무리를 밀어낼 소중한 자원이다.
다음은 왕립 기사양성소를 방문했다. 공국의 무력을 책임질 인재들이 길러지는 곳이다.
귀족가는 나름대로 후손들에 대한 훈육을 하기에 기사양성소엔 주로 평민 출신이 많았다.
공왕은 빠른 성취를 보이면서도 인간성이 올곧은 몇몇을 눈여겨보았다.
그들을 졸업과 동시에 변경으로 보내졌다.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국왕파도 아니고 귀족파도 아닌 중립파이다.
그래야 별말이 없기 때문이다.
임지를 배정받고 떠나기 전날 새로 서임된 기사들은 은밀한 쪽지 하나씩을 받았다.
그 내용이 뭔지는 공왕과 기사들만 알 일이다. 그리고 그 쪽지는 읽자마자 불태워졌다.
아무튼 아민 공왕은 신물 나는 귀족들의 세력 다툼을 불식시키려 애쓰는 중이다.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는 마탑주를 위한 배려입니다. 하여 두 공작의 의견대로 왕후들로 하여금 인원 교체를 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제 그분의 행적에 대한 보고를 해주십시오.”
“네? 그걸 어찌…….”
로레알 공작이 머뭇거리자 공왕은 시선을 돌린다.
“필립스 공작께서도 그분의 행적을 모른다는 말씀이시오?”
“그분께서 케발로 영지를 떠난 것만 알 뿐 그 이상의 행적은 아직 보고된 바가 없습니다. 지금 최선을 다해 수소문 중이니 조만간 그분에 대한 보고를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대답은 그럴듯했지만 실상은 아는 게 없다는 뜻이다.
“흐으음!”
공왕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대전은 숨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공왕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므로 여기서 잘못 보이면 불호령이 내려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공국의 모든 행정력과 인원을 동원해서라도 마탑주의 행적을 알아보도록 하시오.”
“네, 전하!”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각자의 속내는 조금씩 다르다.
* * *
“흐음, 이곳이 그 마을인가?”
“네, 마탑주님. 여기가 마레로 마을입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아직 대낮인데?”
현수의 물음에 카트린느는 얼른 고개를 조아린다.
“나이젤 산맥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마을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충분히 쉬었다 가심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흐음, 그래? 그럼 그러지.”
아드리안 공국 왕실에 이실리프 마탑주의 출현이 보고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잠시 쉬는 것도 괜찮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카트린느는 극고의 공경심을 담아 고개를 조아린다.
“네, 저는 길잡이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저기 저 병사들은 전부 되돌려 보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이젤 산맥엔 몬스터들이 많다며? 가는 동안 괜한 희생이 발생될 수 있으니 모두 피리안 영지로 되돌려 보내.”
“아! 알겠습니다.
하인스 백작과 라세안 모두 소드 마스터이면서 8서클 이상인 마도사이다.
따라서 병사들이 거치적거릴 것이다.
“용병들은 따로 고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알지?”
“무, 물론입니다. 길잡이 하나만 고용토록 하겠습니다.”
“마부도 보내. 길잡이가 마부 노릇을 겸하면 되니까.”
“네, 그리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카트린느가 고개를 조아린 채 뒷걸음으로 물러가는 모습을 본 라세안이 은근한 시선을 보낸다.
“왜? 가는 동안 쟤하고 섬씽이라도 만들어보려고?”
남장을 벗고 여장을 한 카트린느는 매우 아름다운 숙녀였다.
하여 라세안은 몇 번이나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 자식을 낳아줄 모체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확실하게 나와 있다. 마법뿐만 아니라 틈틈이 체력 단련까지 한 결과이다.
얼굴 또한 아름다웠기에 라세안은 자주 시선을 보내곤 했다.
현수는 그때마다 꿈도 꾸지 말라고 대꾸했다.
인간이 드래곤의 새끼나 낳아주는 노리개가 되는 걸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트린느가 나간 후 둘은 마레로 마을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다.
다른 곳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곳곳에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간판 비슷한 것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기에 다 둘러보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여 분이다.
하나밖에 없는 주점으로 돌아온 둘은 가볍게 술 한잔을 걸쳤다.
카트린느는 가장 유능한 길잡이를 고른다면서 동분서주하는 모습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밤이 이슥해지자 현수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흐음, 무구들이 얼마나 만들어졌을까? 한번 가봐야겠군. 마나여, 나를 이동시켜 줘.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당도한 곳은 빌모아 일족이 사는 라수스 협곡이다.
이제야 아드리안 공국에 발을 들여놓았다.
스승의 부탁이니 당연히 보호해 줘야 한다. 그리고 이실리프 마탑의 명성을 드높여야 한다.
드워프가 제작한 무구라면 충분히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곳을 방문한 것이다.
쿵, 쿵, 쿵―!
“누구슈?”
“하인스입니다.”
“아이코, 우리 귀빈, 어서 오슈!”
전에 준 재봉틀 기름 덕분인지 문이 열림에도 일체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간 안녕하셨지요?”
“그럼, 그럼! 덕분에 우리 일족의 성세가 엄청 커졌네.”
“네? 성세가 커지다뇨?”
“자세한 내용은 족장님께 듣게. 그나저나 통행세는 잊지 않았지?”
은근한 눈길을 보내기에 현수는 얼른 맥주 여섯 캔을 건넸다.
“이것 말씀이신가요?”
“크크! 역시 귀빈은 달라. 자아, 안으로 쭈욱 들어가시게.”
“하하, 네에.”
입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던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인원이 늘어난 듯한 느낌이 든 때문이다.
땅, 땅, 따땅, 따땅땅! 땅, 땅, 따땅! 따다다다당!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요란한 망치질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온다.
땀 흘리며 일에 몰두해 있는지라 현수의 출현을 아직 모르는 듯하다.
알았다면 맥주 달라고 아우성을 쳤을 것이라 생각한 현수는 얼른 족장의 거처로 향했다. 그곳에도 일에 열중하고 있는 드워프가 있다.
족장이자 최고 어른인 나이즐 빌모아이다.
땅, 땅, 따땅, 따땅!
규칙적인 망치질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작업 삼매경에 빠진 장인을 방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똑, 똑, 똑!
“누구? 아, 하인스 군. 어서 오시게.”
“저 때문에 작업 방해된 건가요?”
“방해? 흐음, 방해라면 방해지. 아무튼 어서 오게.”
나이즐 빌모아가 가리킨 곳엔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자네 전용 의자일세. 우리 건 좀 낮아서 불편해 보여 하나 만들었네.”
“아!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새삼스레 살펴보니 상당히 공들여 만든 느낌이 든다. 하여 정중히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런데 일족이 상당히 많아진 느낌입니다.”
“허허, 느꼈나?”
나이즐은 만족스럽다는 듯 환한 웃음을 짓는다.
“나가 살던 동생 녀석들을 불러들였네.”
“네?”
“내겐 동생이 다섯 있지. 각기 일가를 이뤄 독립해 나갔는데 자네 덕에 모두 불러들일 수 있었네.”
“제 덕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