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8
“자네가 준 맥주 말이네. 그 덕에 녀석들이 제 발로 기어들어 왔지. 그래서 자네가 부탁한 것들도 거의 다 되어가네.”
“아!”
“오늘 안에 끝날 거야. 창고에 쌓아놓았으니 가서 보게.”
“창고요? 아, 네에. 알겠습니다.”
현수가 일어나자 나이즐은 다시 망치를 잡는다.
땅, 땅, 따땅, 따땅!
규칙적인 망치질 소리를 들으며 일족의 창고로 가보니 무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칼, 방패, 갑옷, 투구, 각반, 완호갑 등등이다.
갑옷을 들어보니 무게감이 느껴진다.
“흐음! 너무 무거우면 전투력이 제한되는데…….”
잠시 고심하던 현수는 갑옷 안쪽에 경량화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아울러 스트렝스와 항온 마법진도 그려 넣었다.
“에구, 이걸 언제 다 해? 참, 그렇게 하면 되겠군.”
산더미처럼 쌓인 무구들을 바라보던 현수는 아공간에서 스테인리스 철판 하나를 꺼냈다.
항온 티셔츠에 쓸 0.3㎜짜리 SUS 304 철판이다.
인라지 마법으로 확대시킨 후 여러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최종적으로 구멍을 뚫고 세심하게 살폈다.
마나석을 박아 마법진을 가동시키면 무구들은 무게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벼워질 것이다.
또한 늘 일정한 온도를 갖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혹시 있을지 모를 마법 공격에 대한 저항성이 커진다. 하여 4서클 이하 마법 공격은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게 된다.
드워프가 만든 것이라 단단하고 착용성이 좋기에 따로 그에 해당하는 마법진은 그려 넣지 않았다.
모든 것을 마친 뒤 스테인리스 철판들을 꺼내 퍼펙트 카피 마법으로 마법진들을 복사했다.
3만 개에 달하는 갑옷에 일일이 마법진을 끼워 넣는 작업은 매우 힘든 일이다. 하지만 현수가 그 일을 하지는 않았다.
나이즐 빌모아에게 되돌아가 일족의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마나석만 끼우면 된다고?”
“네, 끼워만 놓으시면 구동은 제가 시키면 되니까요.”
“그래, 그러지.”
나이즐 빌모아는 3만 개에 달하는 작은 마나석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유카리안 영지를 복속시키면서 얻은 중급 마나석 조각들이다. 마법으로 모두 같은 크기로 잘라냈다.
“참, 자네가 일전에 알려준 그 방법, 참으로 유용했네.”
“네? 제가 뭘…….”
“각기 일부분의 작업만 맡아서 하는 작업 말이네.”
“아! 분업5)이요?”
“그래. 그걸 하면서 작업을 바꿔봤더니 일족의 솜씨가 일취월장함을 느꼈네. 또한 작업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고.”
자신이 아드리안 공국에 당도함과 거의 동시에 무구들을 갖춰야 한다 생각했기에 한 제안이다.
나이즐 빌모아는 분업의 장점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생산성은 나아지고 출하되는 상품의 질이 좋아지며, 작업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머지는 금방 채워질 것이네. 식구들이 늘어서 그러지. 대신 알지?”
나이즐 빌모아가 눈웃음을 친다.
어찌 속내를 모르겠는가!
“네에, 다음에 올 때 조금 더 가져오겠습니다.”
“하하, 고맙네, 고마워.”
“참, 금괴 제련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것도 당연히 다 되었지. 또 필요하면 말만 하게. 일족이 늘었으니 얼마든지 가능하네.”
“정말이십니까?”
“그럼, 그럼! 자네가 얼마나 많은 금을 가졌는지 몰라도 다 해줄 테니 걱정 말고 꺼내 놓게.”
큰소리 탕탕 치는 족장을 바라보는 현수의 눈가엔 개구진 웃음이 배어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마음 놓고 꺼내 놓지요. 모두 금괴로 만들어주십시오.”
“하하, 그러게. 근데 양이 많은가? 많으면 창고에 꺼내 놓게. 보다시피 여긴 작업하는 공간이라…….”
“네에, 그러지요.”
현수는 성큼성큼 걸어 무구들이 쌓여 있는 창고로 갔다. 그곳에서 마법진을 끼워 넣을 필요가 없는 칼과 각반, 완호갑 등을 아공간에 넣었다. 그리곤 히데요시의 황금을 꺼내 놓았다.
“자, 자네 정말 인간 맞나?”
“그럼요. 저 절대 드래곤이 아닙니다. 드워프에게 맥주를 주는 드래곤 봤습니까?”
“아, 아니. 없지. 아암, 없고말고.”
대답을 하면서도 나이즐 빌모아는 황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꺼내 놓은 것만 아무리 적게 잡아도 500톤은 넘을 것 같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나오기에 질려 버린 것이다.
“더 있지만 그건 나중에 부탁드릴게요. 무구 제작이 끝나면 이걸 모두 금괴로 만들어주십시오. 대신 맥주 많이 드릴게요.”
“으응! 그, 그러게.”
눈앞에 쌓인 2,000톤에 가까운 황금을 본 나이즐은 기절할 지경이다.
세상에 이처럼 많은 황금이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고, 그걸 일개 개인이 소장하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 그런데 말이네.”
“네에, 말씀하십시오.”
“내가 이런 말 하기 참 그렇지만 이곳의 지배자가 이걸 보면 모조리 빼앗아갈 수도 있는데 어쩌지?”
“라이세뮤리안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 어떻게 자네가 어떻게 위대한 존재를……. 설마 아는 사이인가?”
“하하, 그럼요. 지금 저하고 같이 유희하는 중이라 이곳엔 안 옵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작업하십시오.”
“끄으응!”
나이즐은 드래곤과 동행한다는 말에 넋을 잃은 듯 나직한 침음만 낸다. 그리곤 다짐하듯 묻는다.
“자, 자네 정말 인간 맞지? 그치? 드래곤이거나 드래고니안 아니지? 그치?”
“물론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드워프에게 맥주 주는 드래곤이나 드래고니안 보셨습니까?”
“아, 아니. 없지.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없었지.”
“근데 뭘 걱정하십니까? 걱정 말고 작업만 잘 해주십시오. 섭섭하지 않게 맥주 드릴 테니.”
“그, 그래. 알았네.”
빌모아 일족의 거처를 나선 현수는 곧장 트랜스퍼 디멘션 마법을 시전했다.
샤르르르르릉―!
* * *
“흐음! 날씨가 많이 추워졌군.”
2013년 10월 12일인 오늘 서울은 가을이다.
그런데 모스크바엔 눈이 내리고 있다. 영하로 기온이 떨어졌다는 뜻이고, 혹한이 시작됨을 알리는 전조이다.
침실로 가니 이리냐가 눈을 크게 뜬다.
“자기야, 어디 갔다 왔어요? 복장은 그게 뭐구요.”
“아, 이거?”
아무 생각 없이 들어서던 현수는 아차 하는 마음이 되었다. C급 용병 차림이라는 것을 깜박 잊은 것이다.
“옷이 그게 뭐예요?”
“아, 알았어. 금방 갈아입고 내려올게. 그리고 어머니께 연락드려. 오늘 출국할 거니까.”
“그렇게 빨리요?”
“그래. 여긴 점점 추워지잖아. 아무튼 출국 준비해.”
“네에.”
이리냐는 어머니와 킨샤사로 갈 생각에 부풀었는지 별다른 반응 없이 후다닥 뛰어 나간다.
황급히 의복을 갈아입은 현수는 물건들을 챙겼다. 강전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메모해 놓은 것들이다.
“장인어른, 오늘 출국합니다.”
“하하! 그래, 그래! 자넨 바쁜 일이 많으니 일보러 가야지. 금방 되돌아올 거지?”
“그럼요. 볼일만 보면 또 와야지요.”
“그래, 잘 다녀오게. 여기 걱정 말고.”
“네, 감사합니다.”
알렉세이 보스에게 출국 인사를 마친 현수는 서재로 갔다. 그리곤 푸틴을 위한 반지를 제작했다.
거의 마치고 일어서려 할 때 벨소리가 들린다.
7장 두바이에서 걸려온 전화
딩동―!
저음의 벨소리는 육중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누군가 서성이고 있다.
“누구십니까?”
“아! 안녕하십니까? 앞으로 이 저택을 관리할 집사 트로츠키 안토니오비치 브레즈네프입니다. 안톤이라 불러주십시오.”
정중히 고개 숙이는 사내는 45살쯤 된 장년인이다.
“좋아요, 안톤. 알렉세이 보스가 보내셨습니까?”
“네, 대보스께서 보스를 잘 보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흐음, 마침 잘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저택을 어쩌나 싶었는데. 좋아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구, 무슨 말씀을…….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잠깐 여기 이 소파에 앉아 계세요.”
“네, 보스.”
안톤은 찍소리 않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핀다. 커다란 이 저택은 거의 비어 있다. 어제저녁엔 임시로 알렉세이가 보낸 하녀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주방과 세탁실, 그리고 청소와 관리를 맡아줄 하녀가 필요하고, 제반 업무를 총괄할 하녀장 또한 필요하다.
하여 머릿속으로 필요 인원을 계산하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네요, 안톤!”
“아, 아닙니다, 보스!”
“자, 이건 저택 유지에 필요할 돈입니다. 그리고 이건 돈으로 환전해서 쓰세요.”
“……!”
안톤의 눈이 커진다. 현수가 내민 100달러짜리 지폐 뭉치 때문이 아니다. 싯누런 빛을 발하는 12.5㎏짜리 금괴 두 개의 가치는 한화로 약 14억 5천만 원에 해당된다.
러시아에선 보기 힘든 거금이다.
“보, 보스!”
오늘 처음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거금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는다.
“일해주실 분들이 더 필요할 겁니다. 필요한 만큼 뽑으세요.”
“네? 제가 뽑습니까?”
“물론입니다. 안톤이 이 저택을 총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가급적이면 생활이 곤란한 분들 위주로 뽑으세요.”
“보스……!”
주위에 도움을 주라는 뜻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안톤은 현수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받은 듯한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유창한 러시아어가 이어진다.
“이곳 가정부들의 평균 임금은 어느 정도 합니까?”
“약 13,000루블(약 50만 원) 정도 됩니다.”
“저택에서 요리할 분은 얼마나 줘야 하지요?”
“마찬가지로 13,000루블이면 됩니다.”
“내가 알기론 러시아 의사들의 수입이 월 28,000루블(약 107만 원) 정도 되는데 맞습니까?”
“네, 그 정도 법니다.”
“좋아요. 그럼 가정부는 월 26,000루블을 주세요. 요리사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은 30,000루블로 합시다.”
“네에? 그, 그건 너무 많은…….”
“내 집에서 일하실 분들이니 당연히 많이 드려야죠. 자, 다음은 안톤입니다. 제가 알기로 이곳 법조인들의 평균 급여가 월 11만 루블(약 420만 원)입니다. 맞습니까?”
“네, 네에? 설마……? 그, 그건 너무 많습니다.”
“압니다. 앞으로 잘해달라는 뜻으로 이러는 겁니다. 안톤은 매달 11만 루블을 가져가십시오.”
“보, 보스!”
생각지도 못했던 거금에 안톤은 눈물까지 글썽인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알렉세이 보스의 저택에서 근무했다.
물론 집사장이 아니라 일개 집사로 20년 넘게 근무했다.
안톤이 지금껏 받은 급여는 월 25,000루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