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2
“그러기엔 제가 너무 크지 않았습니까? 국민전무, 국민배우라는 소리를 듣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천지그룹이 뒤에 있지 않습니까. 안 그런가요?”
“무, 물론 그렇지만……. 아무튼 조심하십시오.”
“하하, 네에.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현수는 이실리프 어패럴을 떠나 역삼동 이실리프 상사로 이동했다.
“아이고, 사장님! 어서 오십시오.”
현수가 택시에서 내리자 관리실장 곽인겸이 직각으로 허리를 꺾는다. 전과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미리 연락해 둔 결과이다.
“하하! 네에, 안녕하시죠? 그리고 별일 없으시죠?”
“그럼요. 사장님 덕분에 요즘 두 발 쭉 뻗고 삽니다.”
“민 실장은 안에 있죠?”
“네, 제가 모시겠습니다.”
곽인겸이 엘리베이터 홀까지 안내하는 동안 나와 있던 경비실 직원들이 허리를 꺾는다.
훌륭한 일터를 준 사업주에 대한 마음이 담긴 예절이다.
땡―!
스르르르릉―!
“어서 와!”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민주영이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곁에 있던 윤성희 비서가 깊숙이 허리를 숙인다.
“그래, 잘 있었지? 윤 비서님도 안녕하죠?”
“어머! 그럼요.”
“자, 안으로 들어가자.”
“그랴!”
사장실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당히 많은 사람을 만났다. 모두 이실리프 상사의 직원들이다.
분야별 책임자들을 소개받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이미 일반적인 회사의 범주를 넘어선 때문이다.
콩고민주공화국에 만들어질 이실리프 농산은 3,000㎢이다.
별도의 이실리프 축산과 농장은 합계 1,500㎢이다.
두 곳 모두 콩고민주공화국의 국내법이 적용되지 않은 치외법권 지역이다.
서울특별시의 면적은 605.33㎢이다. 비날리아 지역에 만들어질 이실리프 농산은 이것의 다섯 배 넓이이다.
유럽의 룩셈부르크9)와 거의 같은 면적이다.
반둔두 지역에 만들어질 이실리프 축산과 농장은 모나코10)보다 약간 작다.
따라서 두 군데에 각기 하나의 국가를 새롭게 건설하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이다. 당연히 수많은 관리부서가 필요하다.
민주영은 현재에도 직원들을 뽑고 있다면서 도와달라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런 일에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잡아뗐다.
“본격적으로 벌목하고 부지 정리해야 하니까 각종 장비 수급 및 원자재 조달에 조금 더 신경 써.”
“알았어. 근데 그 많은 돈이 대체 어디서 오는 거냐?”
민주영은 작심했다는 듯 현수를 바라본다. 그동안 몹시 궁금했던 점이다. 이실리프 상사는 후원하는 회사가 없다. 완전히 김현수 100% 자본인 개인 회사이다.
같이 대학을 다녔던 동기로서 김현수가 어려웠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런데 갑작스레 상상을 초월한 사업을 벌이기에 묻는 말이다.
“내가 러시아와 교역하는 건 알지?”
“그래, 드모비치 상사라는 곳으로 매월 5천만 달러어치씩 수출하는 건 안다. 근데 그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하잖아.”
“이달부터는 1억 달러로 늘었다. 그리고 콩고민주공화국의 천지약품에서도 꽤 많이 벌어.”
“그걸로도 부족해.”
“휴우! 좋다. 대신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듣고 누구에게도 말을 하면 안 된다. 알았지?”
“맹세할게. 말해봐. 그 많은 돈 대체 어디서 나는 거냐?”
“레드 마피아와 푸틴!”
“뭐어?”
민주영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상상조차 못한 일인 때문이다.
“드모비치 상사는 레드 마피아 소유다. 그리고 러시아에 갔다가 우연히 메드베데프를 구해준 적이 있어. 그게 인연이 돼서 푸틴까지 만났다. 여기까지만 하자.”
“정말이냐?”
“그래. 조만간 엄청나게 큰 공사 하나를 더 터뜨릴 거야. 그러니 그때까진 입 다물고 있어라. 알았지?”
“그, 그래!”
푸틴이라는 절대 권력자의 이름을 들어서인지 주영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이쯤해서 쐐기를 박아야 한다.
“이은정 실장님에게도 말하지 마라. 네 입이 얼마나 싼지 이번에 시험 한번 해보자.”
“알았다, 알았어. 그나저나 상렬이에게 전화 한번 해줘라.”
“왜?”
“얘기 들었다. 근데 네가 너무 큰 건을 물어줘서 소화를 못 시키고 있다. 늑대밖에 안 되는데 맘모스를 물어다 주면 어쩌란 말이냐?”
“늑대? 맘모스?”
“그래! 복합운송주선업 서열 100위에도 못 끼는 놈에게 너무 큰 걸 물어다 줬잖아. 컨테이너선사 세계 2위와 3위를 한꺼번에 소개해 주면 어쩌냐? 지금 과식으로 소화 불량이란다. 통화 한번 해줘라.”
민주영은 지금 친구로서 현수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오냐. 알았다. 통화하지.”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리, 띠리리링―!
촌스럽게 녀석의 컬러링은 누군가 더듬더듬 연주한 ‘엘리제를 위하여’ 피아노 연주곡이다.
“어! 현수냐?”
“오냐, 엉아다! 요즘 소화 불량이라며?”
“소화 불량? 뜬금없이 웬 소화 불량?”
“주영이가 그런다. 혼자 먹기 너무 큰 게 한꺼번에 둘이나 와서 힘들다며?”
“아, 그거? 아무튼 고맙다. 며칠 전에 주영이랑 한잔하면서 내가 괜한 소릴 했나 보다.”
“힘들면 얘기해. 도와줄 테니.”
“도와줘?”
“그래! MSC사랑 CMA 오머런이 널 힘들게 하냐?”
“아니! 그쪽은 전혀 부담이 안 돼. 내가 준비가 덜 되어 있어 그러지.”
“그러니까 네 캐퍼서티(Capacity)에 문제가 있다는 거지?”
“솔직히 그렇다. 인력도 그렇고 두루두루 내가 좀 부족하다.”
“근데 그거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거냐?”
“그래. 근데 은행에서 대출받기 너무 힘들다.”
김상렬은 푸념하듯 어려움을 토로했다.
아무런 담보도 제공 못하는 복합운송주선업체는 은행에서 볼 때 대출을 꺼려 할 수밖에 없는 거래처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복합운송업체 서열 100위에도 끼지 못하는 신세계마리타임이 전 세계 컨테이너선사 서열 2위와 3위의 대리점이 되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신세계마리타임으로부터 신용대출 신청을 받았지만 승인되지 않았다.
은행 내부적으로는 서류 조작 내지는 사기인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간의 거래 실적이 시원치 않았던 것도 한몫했다.
세계적인 컨테이너선사인 MSC사, 그리고 CMA 오머런과 본격적인 거래를 하려면 그만한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인력은 물론이고 합당한 경제적 능력 및 기타 등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돈이다. 문제는 그 돈이 없다는 것이다.
김상렬이 살고 있는 집은 이미 최대한 담보가 잡혀 있어 더 이상의 가치가 없다.
그렇다 하여 회사에 다른 부동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직원은 더 뽑아야 하지만, 그를 수용할 사무실은 넓힐 수 없는 상황이다. 운송을 위한 차도 필요하고, 컨테이너도 훨씬 많이 필요하다. 모든 건 돈으로 직결된다.
근데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없다.
그렇기에 주영과 만나 신세한탄을 했던 것이다.
물론 현수에게서 어떤 도움을 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다. 그만한 양심은 있기 때문이다.
“근데 필요한 돈이 얼마냐?”
“왜, 빌려주려고? 하긴 연봉이 60억이니 10억쯤은 금방 빌려줄 수 있겠구나. 그래, 나 10억쯤 필요하다. 빌려줄래?”
상렬은 아직 밤이 되려면 멀었음에도 이미 혀 말린 소리를 하고 있다. 돈을 구하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러지 못한 것이 속상해 점심 먹으며 한잔한 때문이다.
현수의 전화를 받기 전 상렬은 신세계마리타임을 다른 복합운송주선업체 사장에게 팔 생각을 품었다. 자신보다는 자금 동원력이 낫다고 생각하던 사람이다.
친구가 애써서 체결해 준 계약을 돈 몇 푼 받고 팔아넘겨야 하는 현실이 너무도 싫었다. 그것을 잊기 위핸 주영을 불러 한잔했는데 하다 보니 조금 과해진 것이다.
“진짜 10억이면 되냐?”
“그럼, 충분하고말고. 나 10억만 있으면 산다. 현수한텐 미안하지만 그 돈 없으면 회사 팔아야 하거든. 주영아, 나 있잖아, 현수한테 정말 미안하다. 그놈이 뭐처럼 힘써줘서 정말 괜찮은 회사들을 물어줬는데…….”
“……!”
“크흐흐, 내가 모자라서 어쩔 수 없다, 주영아. 나중에라도 이 얘기 현수에게 하지 마라. 알았지?”
상렬은 술에 취해 주영과 통화하는 것으로 잠시 착각한 듯싶다. 그러면서 감정이 격해지는지 흐느끼는 소리를 낸다. 아무튼 상렬의 말은 이어진다.
“나 진짜 현수한테 너무 미안하다. 친구 도와주려고 애썼는데 그걸 내가 못 받아먹는다. 능력이 없어서. 나 병신이지?”
“……!”
“나 회사 팔면 잠수 탈 거다. 혹시 현수가 물어보면 나 없어졌다고 해라. 나 미안해서 그 새끼 전화 못 받는다. 알았지? 야, 나 전화 끊는다. 오줌 마려서 화장실 가야겠다.”
상렬은 진짜 전화를 끊었다.
“……!”
잠시 아무런 말도 없던 현수가 주영을 바라본다.
“10억이라는데 그냥 도와주지 그랬냐? 나중에 나한테 얘기하면 되잖아.”
“야! 10억이 뉘 집 애 이름이냐? 연봉 5천만 원짜리 월급쟁이에겐 20년 치 월급이다. 근데 어떻게 내 맘대로 하냐?”
“그래도 그렇지. 신세계마리타임은 우리 회사 업무와도 관련이 있잖아. 드모비치 상사로 보내는 것도 그렇고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물건 보내는 것도 걔가 중간에서 다 해주잖아.”
“신세계마리타임이 이실리프 상사의 계열사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엄연히 남이다. 내 돈도 아닌데 난 그런 횡령을 할 수 없어.”
“……!”
주영의 표정을 본 현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래, 이래서 내가 널 믿는다. 알았다. 그리고 고맙다. 그래, 네 판단이 옳았어.”
“……!”
9장 국수 언제 먹여줄래?
“근데 상렬이 계좌번호는 아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내가 해줄 수도 없는데.”
“오냐, 물은 내가 바보다. 알았어. 이 건은 내가 해결할게.”
“도와줄 거지? 고맙다, 친구야!”
“널 도와줄 것도 아닌데 네가 왜?”
“우린 친구니까!”
주영은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그런데 여운이 아주 길다.
“…그래, 우린 친구지. 그래서 도와준다. 아주 화끈하게. 대신 네가 할 일이 있다.”
“뭔데?”
“상렬이 술 깨면 은행 계좌번호 물어봐라. 내가 이은정 실장에게 얘기해 놓을 테니 알려줘.”
“10억 다 빌려주게?”
“너 상렬이 성품 몰라? 그놈이 말한 10억은 쥐어짜고 쥐어짜서 만든 금액이야. 모르긴 몰라도 50억은 있어야 운신하기 편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