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443화 (443/1,307)

# 443

“50억이나?”

“요즘 트레일러 값이 한 대에 1억 2천을 넘는다. MSC와 CMA 오머런의 물량을 소화하려면 열 대가 있어도 어림없구. 그리고 네가 상렬이었어도 난 그렇게 한다.”

“고맙다, 친구!”

“오냐. 나 배고프니까 국수나 빨리 먹여주라.”

“어? 배고파? 뭐 시켜줄까? 이 동네 음식 잘하는 집 많다.”

“에라, 이놈아! 이 실장님 앞날이 뻔하다. 결혼을 말려?”

“뭐? 그럼 그 국수라는 게……?”

“그래, 인마! 빨리 결혼해라. 그게 날 도와주는 거다.”

“짜식이! 우리 부부를 평생 부려먹으려고.”

주영은 짐짓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어찌 그 속을 모르겠는가! 속으론 몹시 고마워하고 있다.

“후후, 짜샤! 이런 걸 일석이조라고 한다. 아무튼 난 간다. 열심히 일해서 이실리프 상사를 반듯하게 만들어. 알았지?”

“오냐. 그렇게 해주마.”

주영이 환히 웃는다.

“그리고 괜히 쫀쫀하게 굴지 마라. 우리 회사 돈 없는 회사 아니다. 돈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아까도 말했지만 조만간 돈에 구애받지 않는 상황이 될 거다.”

“오냐. 펑펑 써서 아예 거덜 내주마.”

“그래, 친구야! 근데 거덜은 내지 마라.”

“짜식! 그래도 겁은 먹네. 오냐. 알아서 살살 써줄게.”

“하하! 그래, 아무튼 조만간 국수 먹자.”

“너나 사라, 인마!”

환히 웃는 민주영을 뒤로하고 나온 현수는 곧장 광주에 있는 울림네트워크 공장으로 향했다.

가면서 박동현 대표와 통화를 했다.

* * *

“어서 오십시오.”

“어서 와라. 오랜만이다.”

“네, 대표님. 그리고 선배님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래, 네 덕에 우리 회사 살아났다. 고맙다.”

“고맙기는요.”

현수는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반가운 해후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트렁크에 실린 엔진을 꺼냈다.

한국에 도착한 직후 현수는 천지건설 본사 옥상으로 향했다. 물론 텔레포트 마법을 썼다.

꽤 널찍한 옥상은 인적이 끊긴 곳이다. 지난해 신병을 비관한 직원 하나가 투신자살을 한 때문이다.

그날 이후 신형섭 사장은 전 직원 옥상 출입 금지를 명했다. 그렇기에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곳이다.

어제 현수는 이곳에서 타임 딜레이 마법을 구현시킨 후 여러 가지 실험을 한 바 있다.

생각난 김에 엔진 개조 작업의 끝을 본 것이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한밤중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조립팀원들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어찌 진심이겠는가!

“사장님, 저 대신 조립팀 회식시켜 주실 거죠?”

“아이고, 그럼요. 오늘 당장, 아니, 오늘은 안 되겠네요. 내일 저녁에 삼겹살 회식합니다.”

박동현 대표가 짐짓 너스레를 떤다.

“에이, 그거 갖고 되나요? 한우 등심으로 회식하세요. 비용은 제가 댈 겁니다.”

“하하! 그래주시면 저도 오랜만에 포식하겠습니다.”

“네에, 그러세요. 그리고 이 엔진을 장착시킨 후 연비 테스트를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조립팀은 현수를 태우고 온 화물차 적재함에서 엔진을 하차시켰다.

“결과는 내일 오전이면 나오겠죠?”

“그럼요. 오늘 밤 안에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현수는 최종적으로 손본 엔진이 장착되는 과정을 눈여겨 살폈다. 그러면서 김형윤 상무와 여러 의견을 주고받았다.

새로 만들 엔진 생산 공장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디리리리링! 띠리리리링! 띠리리링!

전화벨이 한참을 울리고야 전화를 받는다. 그리곤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권지현이다.

“네에, 중앙지검 사무국 권지현입니다. 누구시죠?”

“아! 다행히 바로 받네요. 김현숩니다. 통화 가능해요?”

“…네, 말씀하세요.”

권지현은 일부러 그러는지 다분히 의례적인 음성이다.

“대화를 했으면 하는데 시간 내주실 수 있습니까?”

“…네. 어디로 몇 시에 가면 되죠?”

바로 답하지 않고 잠시 뜸 들이는 게 유행인 듯 묻는 말에 곧바로 답하지 않는다.

“대치역 4번 출구 근처에 일리야라는 레스토랑이 있어요. 거기서 만나죠. 7시쯤 시간 돼요?”

“알았어요. 그때 뵙죠.”

다분히 사무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현수는 오늘 권지현과 끝장을 볼 생각이다.

사내로서 여자에게 주도권을 주고 빌빌거릴 생각은 없다. 되면 되고 안 되면 만다는 생각이다.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알지만 ‘내 인생은 내 것’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내키는 대로 할 생각인 것이다. 그렇기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아닌 당당한 음성으로 통화한 것이다.

전화를 마친 현수는 경기도 광주에서 출발하여 일리야까지 택시를 타고 왔다. 도착 시각은 오후 6시 55분이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군.”

이곳까지 오는 내내 현수는 다짐을 했다.

지현에게 일찌감치 상황을 알리지 못한 것은 사과할 일이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감정은 있지만 그건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입구에 당도하니 웨이터가 환히 웃으며 맞는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예약하셨습니까?”

“네, 김현수로 예약했습니다.”

웨이터는 이름을 듣자마자 예약 리스트를 재빠르게 훑는다.

“네에, 확인되었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웨이터의 정중한 안내를 받아 2층에 올랐다. 현수가 안내받은 방엔 블랙로즈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이곳에 와본 적은 없지만 일부러 이 방을 예약했다. 복선이 깔린 행동이다.

복도를 걸으며 보니 룸이라 되어 있는 것들은 실제로 격리된 공간이 아니라 커튼을 내리면 외부와 차단되는 형식이다.

아마 법적인 문제 때문일 것이다.

자리에 앉자 정중히 묻는다.

“손님이 더 오십니까?”

“네, 금방 올 겁니다. 오면 그때 주문하죠.”

“알겠습니다.”

웨이터는 물만 한 잔 남겨놓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얼마 후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7시다.

고개를 내밀어보니 권지현의 모습이 보인다. 화를 내는 건지 긴장을 한 건지 알 수 없는 굳은 표정이다.

“주문해 주시겠습니까?”

지현이 자리에 앉자 웨이터가 메뉴판을 내민다. 살펴보니 몇 가지 요리밖에 없다.

“나는 A코스 안심 스테이크로 하겠습니다. 지현 씨는요?”

“저는 B코스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와인은 필요 없으십니까?”

“적당한 것으로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주문 받은 웨이터가 사라지고 난 뒤로도 룸은 침묵에 싸여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언제 귀국하셨어요?”

“조금 전에요. 공항에서 이리로 곧장 왔습니다.”

현수는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여긴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지현이 레스토랑의 분위기 및 인테리어를 살피며 물은 말이다. 평범한 월급쟁이가 드나들 만한 곳은 아니다.

조금 전 주문한 안심 스테이크 A코스는 세전 가격만 21만 원이다. B코스는 18만 원이다. 둘이 한 끼 먹는다면 부가세 포함 42만 9천 원이다. 서민들이 드나들 레스토랑은 아닌 셈이다.

“오면서 인터넷 검색을 했습니다. 지현 씨와 조용히 대화할 만한 곳을 뒤져 보니 이곳을 추천한 사람들이 많더군요. 안심 스테이크가 일품이라고 해서 정했습니다. 괜찮죠?”

“네, 좋아 보이네요.”

또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금방 깨졌다. 웨이터가 음식을 내오기 시작한 때문이다.

메인 디쉬가 나오자 웨이터가 허리를 숙인다.

“다 드신 후 벨을 울리면 후식을 내오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가지시길 빕니다.”

“고마워요.”

지현은 역시 예의 바른 여인이다.

스테이크를 다 먹도록 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벨을 울리니 웨이터가 왔고, 둘은 각기 원하는 후식을 주문했다.

그것마저도 다 먹도록 별 이야기 없었다. 음식 맛에 대한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았을 뿐이다.

또 벨을 울리고 커피를 주문했다.

잠시 후,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쥐고 있는 지현의 모습이 왠지 처연하고 쓸쓸해 보인다.

“저녁 괜찮았어요?”

“네, 좋았어요. 현수 씨는요?”

“나도 괜찮았어요. 근데 나한테 묻고 싶은 거 없어요?”

“네, 없어요. 그날 연희 씨와 이리냐 씨로부터 다 들었어요.”

지현은 이 말을 끝으로 시선을 내린다.

현수는 잠시 이런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큰 숨을 내쉬며 허리를 폈다.

“지현 씨.”

“네?”

지현이 시선을 마주친다.

“나는 지현 씨를 갖고 싶어. 내 아내가 되어줘.”

“……!”

왜 갑작스레 반말이며 두 여자, 아니, 시중드는 하녀까지 다섯 여자나 있으면서 왜 이러느냐는 표정이다.

“연희와 이리냐는 지현이를 큰언니로 인정했어.”

“……!”

여전히 대꾸하지 않는다.

“거절한다면 우린 다시 보지 못할 거야.”

“현수 씨, 대한민국은 일부일처제예요.”

“콩고민주공화국은 일부다처제이지. 그리고 일부일처제가 진리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서로 화목하면 그만 아닌가?”

“……!”

“물론 사회적 관습을 깨는 말이라는 건 나도 알아. 염치없다는 것도 알고. 근데 난 당신이 좋아. 연희도 좋고 이리냐도 좋아. 다 포기할 수 없어. 내 아내가 되어줘.”

“현수 씨……!”

지현은 대체 왜 이렇듯 막무가내냐는 표정이다.

“……!”

현수 또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지현을 응시했다.

그렇게 묵직한 시간이 흘렀다. 이 시간은 한 여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간이었다. 마침 스피커에서 그룹 Chicago의 ‘If you leave me now’가 흘러나온다.

If you leave me now

You’ll take away the biggest part of me.

Ooh, no Baby, please don’t go.

만약 당신이 지금 날 떠난다면

당신은 나의 가장 커다란 부분을 앗아가는 거랍니다.

오, 그대여, 제발 가지 말아요.

And if you leave me now

You’ll take away the very heart of me.

Ooh, no Baby, please don’t go.

Ooh, girl I just want you to stay.

만약 당신이 지금 날 떠난다면

당신은 나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앗아가는 거지요.

오, 그대여, 제발 가지 말아요.

오, 그대여, 제발 머물러 줘요.

“이 방의 명칭이 뭔지 알아?”

“오면서 보니 블랙로즈라고 되어 있더군요.”

역시 기억력 좋다. 그러니 행시를 패스했을 것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