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4
“그럼 그 꽃의 꽃말은?”
“…글쎄요?”
“블랙로즈의 꽃말은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이야. 행복하게 해줄게. 나랑 결혼해 줘.”
“…쳇, 이렇게 쉽게 풀어주면 난 뭐가 돼요? 동생들한테 그렇게 화를 내고 왔는데.”
투덜거리고 있지만 어찌 그 뜻을 모르겠는가!
동생들이라는 말에 이미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것을 머리 좋은 현수는 금방 알아들었다.
그렇기에 조금 여유를 갖고 대꾸했다.
“뭐가 되긴, 도도한 언니? 겁나는 언니? 뭐, 이런 거 아니겠어? 큰언니로서 카리스마는 세운 셈이야.”
“정말 날 행복하게 해줄 자신 있어요?”
“애를 열쯤 낳게 해달라면 얼마든지.”
“치이! 정말 못됐어요. 여자 마음을 살살 달래주는 게 아니고 ‘하려면 하고 말래면 말아!’, 이러는 남자가 어디 있어요?”
“내가 그랬어?”
“아까 그랬잖아요. 오늘 거절하면 다시는 못 볼 거라고.”
지현이 투정 부리듯 볼살을 부풀린다. 어찌 귀엽지 않겠는가!
“이리 와. 아니, 내가 갈게.”
현수는 건너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곤 지현을 보듬어 안았다.
“사랑해. 잘해줄게.”
“치이,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요? 흐흑! 흐흐흑!”
생각해 보니 새삼 격정이 솟구치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낀다. 현수는 가만히 보듬고 있으며 등을 토닥였다.
그렇게 5분쯤 지나자 들썩이던 어깨가 잦아든다.
“정말 잘해줄 거예요?”
“그래.”
“치이,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날 못 믿어?”
“네, 못 믿어요. 나 빼고 연희도 있고 이리냐도 있는데. 내가 제일 못났잖아요. 연희와 이리냐는 너무나 예쁘고 어리고 날씬하잖아요.”
“흐음, 그게 핸디캡이었어?”
“네, 솔직히 난 걔들하고 비교가 안 되잖아요.”
“아냐. 지현이도 예뻐.”
현수의 말에 지현이 몸을 떼며 입술을 삐죽인다.
“치이, 또 입에 발린 거짓말.”
“나 거짓말한 적 없는데?”
“……!”
생각해 보니 그러기에 지현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집에 들어가지 마.”
“네?”
“연희나 이리냐보다 먼저 아기를 낳으라고.”
“어머!”
지현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고개를 좌우로 흔들지는 않았다.
“내가 지현이를 책임지겠다는 뜻이기도 해. 아버님께 전화 드려 허락을 구할까?”
“어머! 치잇, 또 장난인 거죠? 잠시 진짠 줄 알고 고민했잖아요.”
지현의 말에 현수는 말없이 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렀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착신음이 들린다. 권철현 고검장님의 착신음은 러시아 체첸 지방 민요인 백학이다. 한때 모래시계라는 드라마의 OST로 사용되었던 곡이다.
아주 굵직한 저음이 인상적인 이 곡은 체첸 유목민 전사들의 안타까운 영광된 죽음을 찬미하는 것이다.
라술 감자토비치 감자토프(Rasull Gamzatovich Gamzatov)의 음유시를 가사로 한 러시아 가요이기도 하다.
굵직한 저음의 주인공은 1989년 러시아 국회의원 당선자 이오시프 코프존(Losif Kobzon)이다.
현수는 오랜만에 기분 좋은 음악을 감상했다. 곡이 끝나갈 즈음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권철현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아버님? 저 김현숩니다.”
“누구? 아, 김현수? 오, 그래, 귀국했나?”
심하게 반기는 음색이다. 현수는 지현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네, 오늘 귀국했습니다. 건강하시죠?”
“그럼. 자네 하는 일은 잘되고?”
“네, 다 잘되고 있습니다. 근데 너무 바빠서 며칠 있다 또 출국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젊어서 바쁜 건 좋은 거네. 늦었지만 전무이사 된 거 축하하네. 참, 지현이랑 통화는 했나?”
“그럼요. 지금 같이 있습니다.”
“하하, 그래? 요즘 뭔 일이 있는지 좀 침울했는데 자네가 왔으니 이제 한시름 놓겠구먼.”
“그랬어요? 근데 아버님.”
“그래, 말하게.”
“저 아직 집에 못 들어갔는데 저희 날짜 잡은 거 진짭니까?”
“그래, 사돈어른께서 크리스마스이브가 기억하기 좋은 날이라며 그날로 하자고 말씀하셔서 그렇게 정했네.”
“그렇군요.”
“준비는 우리가 할 테니 자넨 몸만 오면 되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뭐, 장인어른? 핫핫!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하하, 여보! 김 서방이 지금 내게 장인어른이라 했어.”
통화하다 말고 장모님과 대화도 하시는 모양이다.
“장인어른, 오늘 지현이 집에 늦게 보내도 됩니까?”
“아암, 그렇고말고! 지현인 이제 자네 사람이네. 이제 지지고 볶든 둘이 알아서 잘 하게. 하하! 하하하!”
“네에,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오! 그래, 그래! 하하! 하하하!”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권 고검장의 음성이 들린다.
“여보, 술상 봐. 사위 보는 기분이란 게 이런 거였어. 하하! 하하하!”
통화하는 내내 숨소리마저 죽이고 대화 내용을 듣고 있던 지현의 두 볼이 붉게 달아 있다.
조금 전 마신 와인 때문만은 아니다.
“들었지? 오늘 집에 못 들어가.”
“…정말 안 보낼 거예요?”
“그래. 흐음, 오늘 날짜는 2013년 10월 16일이군. 기억해 둬. 내가 처음으로 지현이를 가진 날짜니까.”
“치잇! 바람둥이같이. 다른 여자에게도 늘 이런 식이었죠?”
“이런 식이라니? 오늘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여자라는 생물과 자보는 날이야. 근데 바람둥이라고?”
“네에?”
“설마 지현인 나 말고 다른 남자랑 자본 거야? 아! 그래서 이러는구나? 미안해. 난 진짜 여자랑 처음으로 같이 밤을 보내는 거거든.”
“정말이에요? 연희도 있고 이리냐도 있잖아요.”
지현의 음성은 어느새 조그맣게 줄어 있었다. 혹여 누가 들을까 싶다는 듯 밖의 동정까지 살핀다.
“그래. 그런데도 지현이가 내 첫 여자야.”
“……!”
“그래서 몹시 서툴 거야. 경험 많은 지현이가 이해하도록.”
“치잇! 나도 처음이에요. 근데 서툰지 어떤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어머! 하여간 말하는 거 보면 진짜 바람둥이 같아.”
“그래?”
“생각해 보니 바람둥이 맞네. 나 말고 연희도 있고 이리냐도 있으니. 그때 본 그 아가씨들은 진짜 아닌 거죠?”
“누구? 알리사?”
“그래요? 아주 늘씬하고 잘빠진 하녀 알리사요.”
“당연하지. 내가 무슨 짐승인 줄 알아?”
“치잇, 여자가 셋이면 짐승이죠.”
“그래? 그럼 오늘 짐승과 함께 밤을 보내겠네? 기대해.”
잠시 후 둘은 레스토랑을 나섰다. 그리곤 워커힐로 향했다. 가는 동안 룸을 예약했다.
한강의 멋진 전망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이라는 안내를 받고는 메튜 룸이란 곳을 예약했다.
예약했던 객실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화기애애했다. 그런데 문이 닫힌 직후부터 정적이 흐른다.
분위기를 깨기 위해 말을 꺼냈는데 상투적이 되어버린다.
“내가 먼저 씻을게.”
“치잇, 바람둥이!”
그러거나 말거나 들어가 샤워를 했다. 그리곤 보란 듯이 샤워 타월로 하체만 가리고 나왔다.
“어머, 현수 씨!”
지현의 눈이 현수의 상반신을 누빈다. 조각 같은 근육으로 다져진 상체에 어찌 시선이 가지 않겠는가!
“난 시원한 맥주 한잔하고 있을게. 지현이도 샤워해.”
“아, 알았어요.”
지현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욕실로 들어간다. 이런 뒷모습을 보며 현수는 싱긋 미소 지었다.
현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들이켰다. 실내등을 끄니 창밖 풍경이 제법 괜찮다.
“흐음, 결혼을 하게 되긴 하나 보네. 그러려면 집이 하나 있어야지? 이참에 하나 마련해야겠어.”
현수는 잠시 미래에 살 집을 생각해 보았다. 물론 기준은 킨샤사와 모스크바의 저택이다.
잠시 후, 현수는 벗었던 의복을 모두 입었다. 이곳에 오기는 했지만 지현과 첫날밤을 보내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현과의 관계 개선과 미래에 대한 확약이 목표인 것이다.
아무튼 또 하나의 맥주 캔을 비웠다.
삐이꺽―!
문이 열리고 지현이 나온다. 보아하니 샤워한 것 같지 않다. 입었던 옷 그대로이다.
“현수 씨, 미안해요.”
몹시 부끄럽고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다. 속내를 짐작하지만 어찌 이런 기회를 놓치겠는가!
현수는 부러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흐으음! 결국 나와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한 거야?”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아닌데 왜? 아버님께도 허락받은 일인데 지현이가 싫은 거잖아, 지금. 알았어. 없었던 일로 하자.”
현수는 짐짓 화난 척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쪽으로 향했다. 그런 현수를 지현이 와락 껴안는다.
“현수 씨, 가지 마요. 나, 겁나서 그래요. 처음 그러면 너무 아프다고……. 나 겁나요. 그렇지만 참을게요.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진짜 샤워하고 나올게요.”
“……!”
현수는 냉혈한처럼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현은 얼른 욕실로 들어간다.
현수는 안다. 잠시 후 지현이 또 그냥 나오리라는 것을.
웃겼지만 꾹 참고 맥주 한 캔을 또 비웠다. 예상한 대로 지현은 또 그냥 나온다.
“혀, 현수 씨…….”
현수는 지현의 말을 끊고 성큼성큼 걸었다.
“나 갈래.”
“아아, 안 돼요. 가지 마요. 흐흑! 가지 마요. 가지 말란 말이에요. 흐흐흑! 무서워서 그러는 건데. 행복하게 해준다면서… 무섭게 왜 이래요? 흐흑! 지현인 이제 현수 씨 없으면 못 사는데……. 흐흑! 흐흐흑!”
나이 찬 여자답지 않게 여려도 너무나 여린 모습을 보인다. 이런 여자에게 너 말고 두 여자가 더 있다는 말을 듣게 했다.
인간으로서 미안한 기분이 들었기에 현수는 가만히 보듬어 안으며 토닥였다.
“알았어. 오늘은 그냥 잘게.”
“흐흑! 미안해요. 흐흑! 흐흐흑! 다음엔, 다음엔 꼭…….”
“그래, 알았어. 이제 진정해. 좋아, 오늘은 손만 잡고 잘게. 오빠 믿지?”
“…치이, 이 바람둥이.”
현수의 농담에 지현은 금방 진정했다. 둘은 불 꺼진 방에서 맥주 몇 캔을 비웠다. 그러는 사이에 지현은 샤워를 했다.
밤이 깊어지자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는 하나뿐이다. 누군가 소파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동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오빠 믿지?’라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뻥이 사실이었는지는 둘만이 알 일이다.
10장 오빠 믿지?
짹, 짹, 짹!
새들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뜬 현수는 기분 좋은 기지개를 켰다.
곁에는 아직 꿈나라를 헤매는 지현이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