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5
가만히 일어나 세수를 하고 모닝커피를 만들었다.
샤워 가운을 걸친 채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데 지현이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진다.
“아함! 어머! 여긴……?”
하품을 하던 지현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늘 잠들던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다.
“잘 잤어?”
“현수 씨?”
“설마 어젯밤 마신 맥주 두 캔에 취해서 나랑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혀, 현수 씨! 우리…….”
“그래, 이제 우린 한 몸이야. 지현인 이제 내 여자라고. 환불 안 되니까 그런 줄 알아.”
“…네에.”
지현이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이자 맥이 빠진다.
“조금 있다가 볼일 보러 나가야 해. 지현인 우미내 집에 들러서 해명해 줘.”
“치이, 이러려고 여기에 방을 잡았구나? 못됐어, 정말!”
지현이 뾰로통해져 입술을 내민다.
쪽―!
“뽀뽀해 달라는 뜻이었지? 아무튼 잘 부탁해.”
“치이, 알았어요. 근데 이런 말 하는 여자 대한민국에 나 하나뿐일 거야.”
“그래서 지현일 사랑하는 거야. 자아, 아침 먹으러 가자.”
뷔페식 아침 식사를 즐긴 둘은 객실로 되돌아와 이런저런 이야길 했다.
그러던 중 반지 이야기가 나왔다.
근사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동반된 멋진 프러포즈도 못 받아보고 순결을 잃었다며 투덜거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러 여인에게 반지를 주었다.
가장 먼저 카이로시아에게 주었고, 로잘린에게도 주었다. 얀센의 어린 아들 다비드도 현수가 준 반지를 끼고 있다.
지구에서는 이리냐에게 주었고, 연희에게도 주었다.
부모님에게도 각기 하나씩 만들어 드렸고, 심지어 강전호의 연인 베아트리체도 마법 반지를 받았다.
이은정 실장과 이지혜, 그리고 김수진 사원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지현만 빼놓은 셈이다.
미안한 마음이 든 현수는 연희에게 주었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반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마법사인 것을 감출 이유가 없는 상황이다.
하여 인라지나 리듀스 같은 각종 마법이 난무했지만 지현은 말없이 지켜만 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완성되었다.
패랭이꽃 모양을 한 작은 반지이다.
겉보기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다.
다섯 개의 잎사귀엔 각각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첫째는 면역력 증진 마법인 임플로빙 이뮤너티 마법진이다.
이 반지를 끼고 있는 한 감기 같은 사소한 질병에 시달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둘째는 바디 리프레시 마법진이다.
오장육부가 전부 늘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셋째는 극도의 공포 내지는 불안함을 느낄 때 사방으로 체인 라이트닝이 폭사되는 것이다.
현수의 여인이 되는 순간부터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강철환 같은 놈들이 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굳이 이게 아니더라고 지현은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다.
재수없게도 성폭행범을 만날 수도 있다. 이때 위기로부터 탈출하도록 인챈트한 것이다.
넷째엔 이 마법이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정신 감응 마법진을 새겨 넣었다.
자칫 불상사를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텔레포트 마법진이다.
위기를 겪었는데 또 다른 위기를 겪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예를 들어 체인 라이트닝 마법이 구현된 뒤에도 지현의 능력으론 어쩔 수 없는 새로운 어려움에 봉착될 수 있다.
또다시 극도의 공포 내지는 불안함을 느끼게 되면 우미내 집 정원으로 텔레포트되도록 했다.
나중에 도착 좌표만 수정하면 다른 곳으로 순간이동하게 될 것이다.
한가운데 박혀 있는 최상급 마나석은 정말 위급한 순간 지현을 보호하기 위한 앱솔루트 배리어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비행기 추락이나 교통사고 같은 불의의 사고가 일어났을 때 지현의 몸을 중심으로 60㎝ 이내엔 어떠한 것도 다가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곁에서 수류탄이 터진다 하더라도 안전하다.
하지만 워낙 강력한 마법이기에 세 번까지만 마법이 구현된다. 이후엔 평범한 돌이 되는 것이다.
“알았어, 이게 어떤 건지?”
“정말 이게 그런 거예요?”
지현은 현수가 내민 반지를 보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마법 반지 만드는 과정 다 봐놓고도 그래?”
“알아요. 그런데도 안 믿어져서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반지는 빼지 마. 알았지?”
“네에, 그럴게요.”
“그게 내 청혼 예물이야. 마음에 들어?”
“그, 그럼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실제로 현수의 솜씨는 나쁘지 않다.
그렇기에 지현의 눈에도 아주 괜찮은 디자인으로 보이고 있다. 하여 진심으로 기쁘다는 표정이다.
“자아, 그럼 청혼을 했으니 키스 한 번!”
“치잇! 바람둥이!”
말을 이렇게 하면서도 지현은 입술을 내민다.
쭈우우욱―!
진한 키스가 이어지는 동안 지현은 까치발을 든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보던 장면이다.
“결혼 예물은 더 좋은 걸로 만들어줄게.”
“네에, 고마워요.”
호텔을 나서자 현수는 울림네트워크 쪽으로 갔고 지현은 우미내 마을로 갔다.
택시를 타고 가는 중에 집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현수냐?”
“네, 어머니!”
“귀국했으면 집부터 들러야지. 아버지 기다리셨는데.”
“죄송해요. 바쁜 일이 워낙 많아서요.”
“어떻게 새아기를 구워삶았는지 모르지만 잘했다. 결혼 준비는 알아서 할 테니 날짜 맞춰 오너라.
“네, 어머니!”
통화는 짧았다. 지현이 아버지를 위한 해장국을 끓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전무님, 어서 오십시오. 그러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결과 나왔나요?”
“네, 나왔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연비가 무려… 연비가 무려… 리터당 112.3㎞나 나왔습니다. 고속도로 주행에서는 166㎞가 나왔구요. 이게 말이 됩니까?”
박동현 대표의 얼굴은 시뻘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어제 오후 현수가 던져 놓고 간 엔진을 장착한 스피드는 각종 테스트를 받았다.
스피드는 2,656㏄, 6기통 가솔린 엔진이다. 이에 대한 배기가스 배출 허용 기준은 다음과 같다.
일산화탄소 0.46% 이하, 탄화수소 80ppm 이하, 질소산화물 670pp 이하이다.
그런데 현수가 손본 엔진은 일산화탄소 0.12%, 탄화수소 16ppm, 질소산화물 97ppm이다.
거의 완전 연소 되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다음은 연비이다. 시내 주행 결과 스피드의 공식 연비는 9.4㎞/h이다. 그런데 그것이 12배나 뻥튀기되었다.
스피드의 연료 탱크는 75리터이다.
이걸 가득 채우면 8,400㎞나 달릴 수 있다. 서울, 부산을 무려 열 번이나 왕복할 거리이다.
일 년에 15,000㎞ 남짓 운행하는 차라면 딱 두 번만 주유하면 된다. 연평균 20,000㎞짜리 승용차라면 매년 450만 원 이상을 절약하게 된다.
자동차 회사 사장인 박동현 대표의 머릿속엔 이미 그림이 그려져 있다.
지구상의 모든 자동차 회사 위에 우뚝 서 있는 울림모터스라는 회사가.
그렇기에 한잠도 자지 못하고 현수를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스피드는 계속된 연비 측정을 받고 있다.
“거봐요. 내가 그랬잖아요. 하면 된다고.”
“헐!”
박동현 대표 입장에서 보면 현수는 너무나 뻔뻔한 얼굴이다.
이런 엔진을 개발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
지구 환경을 엄청나게 개선시키는 것이므로 전 세계에서 러브콜이 쇄도할 것이다.
그런데 너무도 태연자약하여 얄밉다는 느낌마저 든다.
“당분간 이 엔진의 개발은 비밀입니다.”
“네? 왜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다.
“쇄도하는 주문을 소화해 낼 능력 됩니까?”
“……?”
“당분간은 수출용에 전력을 기울여 일단 만들어내세요. 내가 추가로 투자할 테니 생산 라인 늘리시구요. 김 선배님은 엔진 제조 회사 설립에 박차를 가하세요. 기존 업체를 인수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알았네.”
김형윤 상무 또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어떨지 충분히 상상된다. 그렇기에 붉게 상기된 얼굴이다.
“새 엔진이 장착된 차는 제가 며칠 써야 합니다.”
“네? 그건 왜요?”
혹시 다른 회사로 엔진을 빼돌릴까 싶은지 박 대표의 표정엔 우려하는 마음이 배어 있었다.
“선박 엔진에도 적용 가능하거든요. 친구가 태백조선소에 있어요. 그 녀석 수주를 도와줘야 합니다.”
“아! 그런 거라면…….”
“박 대표님, 저도 울림네트워크의 주주지요?”
“그, 그럼요.”
박 대표는 삽시간에 솟은 진땀을 닦아낸다.
“회사에 해 되는 일 안 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아이고, 죄송합니다.”
박 대표는 사내답게 두말 않고 허리 숙여 사과를 한다. 그러는 사이에 샛노란 스피드가 스르르 들어온다.
엔진음도 상당히 많이 감소된 상태이다.
생각 같아선 논 노이즈 마법으로 완전한 정숙도 가능하다.
그러면 자동차 운전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 것 같아 이전보다 훨씬 조용하게 만들어놨다.
하여 어떤 차보다도 조용한 차가 되었다.
쉐보레서 만든 말리부라는 차의 광고 영상을 보면 바다 속 깊이 100m에서의 소리는 35.5㏈이다.
그리고 말리부가 해안가 도로를 달리다 멈췄을 때의 소음도 35.5㏈이었다.
참고로 40㏈은 도서관이나 낮에 주택가에서 들리는 소음이고, 50㏈은 조용한 사무실의 소음 수준이다.
현수의 엔진이 장착된 스피드는 정지 상태에서 엔진을 켜놓았을 때 21㏈을 기록했다.
참고로 30㏈은 20㏈보다 소음이 열 배가 더 큰 것이다.
다시 말해 조용한 것으로 이름난 말리부보다 훨씬 더 정숙한 차가 탄생한 것이다.
“이 차는 용무를 마치는 대로 반납할 겁니다. 그러니 수출용으로 제작되는 차들은 종전대로 조립하세요.”
“알겠습니다. 조심해 다녀오십시오.”
박동현 대표는 행여 노란색 스피드가 사라질까 두렵다는 듯 연신 보닛을 쓰다듬는다.
울림네트워크 광주 공장을 출발한 차는 곧장 잠실 롯데호텔로 향했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전무님!”
발레파킹을 해주겠다고 다가온 주차요원 뒤에서 허리를 숙이는 이는 태백조선소 권철 전무이다.
“하하! 네에, 그동안 안녕하셨죠?”
“에구, 속이 다 탔습니다. 이번엔 당해낼 재간이 없어서죠. 우리 강 과장이 괜한 발걸음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합니다.”
“무슨 말씀을……. 이렇게 전무님을 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커피는 사주실 거죠?”
“그럼요. 들어가십시다.”
권 전무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서류를 뒤적이고 있는 강전호 과장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