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6
“강 과장!”
“네, 전무님! 어, 김 전무님, 어떻게 벌써……? 으잉, 시간이 벌써 이렇게……. 미안합니다. 이거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라서……. 어서 오십시오.”
강전호는 본인이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표정이다. 테이블 위에는 각종 서류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어서 치우게.”
“네, 전무님!”
강전호와 권 전무가 주섬주섬 서류들을 챙기고야 테이블 면이 보인다.
“회사에선 가망성이 없다고 봅니다. 하여 객실에 못 있고 여기에 죽치는 중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근데 강 과장님은 뭘 좀 먹어야 할 얼굴입니다. 사우나도 해야 하고 잠도 자야 될 것 같습니다.”
“이 친구가 말을 안 듣습니다. 어떻게든 이번 계약을 성사시키겠다고 어찌나 매달리는지……. 사실 전 이번 계약 물 건너갔다고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쯧쯧!”
권 전무는 강 과장이 하도 매달려서 나온 모양이다.
“아무튼 좀 먹고, 씻고, 쉬죠. 저도 사우나 가고 싶은데 거기서 얘기해도 되는 거니까요.”
“그럼 그럴까요? 이봐, 강 과장, 이거 다 챙겨.”
“네에, 전무님!”
강 과장은 서류들을 가방에 넣었다.
셋은 식사를 한 후 호텔 사우나로 들어갔다. 쉬기도 해야겠기에 객실도 잡았다.
“그러니까 획기적으로 연료가 절감되는 엔진을 개발할 수 있다는 거죠?”
“개발이 아니라 기존 엔진을 손보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자동차를 예로 들자면 리터당 9.4㎞를 달리던 차를 손보면 112㎞로 연비가 좋아집니다.”
“네에? 연료가 거의 12분의 1로 떨어진다는 건데,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강전호는 조선소에 근무하면서도 자동차 마니아이다.
당연히 갖고 싶은 차가 많다. 그중엔 스피드도 끼어 있다. 그렇기에 금방 알아들었다.
그런데 스포츠카에서 어찌 그런 연비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아무튼 선박의 연료비를 그렇게 줄일 수 있는 엔진이 있다면 오시마조선소의 제안을 이겨낼 수 있습니까?”
“당연하죠. 컨테이너선의 평균 수명은 30년가량 됩니다. 그동안 절감될 연료비를 생각하면 당연히 선택하죠.”
“게다가 엔진 효율이 좋아져 선박의 속도가 늘어난다면요?”
“네? 마력수도 높아지는 건가요?”
“소음과 진동도 많이 줄어들 겁니다.”
“헐! 소음까지 잡아요?”
“선박 진동 원인 중 하나가 추진기 변동 압력이죠? 이거 국제 관련규정(ISO 6954)에서 명시하는 허용치가 9㎜/sec로 알고 있습니다. 맞죠?”
“네, 맞아요.”
“이게 0.42㎜/sec 정도로 줄어들게 될 겁니다.”
“헐! 말도 안 되는…….”
강전호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현수 때문이다.
“아무튼 그럼에도 배의 속도는 빨라질 겁니다. 그럼 이익인 거죠?”
“당근이죠. 근데 그게 가능해요?”
강전호의 말에 권철 전무까지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저도 궁금합니다. 김현수 전무님은 농담하실 분이 아니기에 더 그렇습니다. 정말 그런 기술이 있는 겁니까?”
“있습니다. 이실리프 기술이라는 회사가 곧 만들어질 텐데 그곳은 가능하죠.”
“세상에, 맙소사!”
권철 전무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을 때 현수의 말이 이어졌다.
“강 과장님은 스피드 한 대를 수배해 오세요. 렌터카 업체를 찾아보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가져온 차와 비교하는 실험을 보여주세요. 리앙리쥐 아폰테 사장님에게요.”
“알겠습니다. 나가자마자 그러죠.”
강전호 과장은 상당히 고무된 표정이다. 하지만 권철 전무는 반대로 심각하다.
“근데 아폰테 사장님이 그 실험을 직접 보려고 하실까요?”
자동차 연비 측정은 세심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조선소 직원들은 당연히 그럴 일을 하지 못한다.
게다가 현수의 차는 리터당 112㎞를 달린다.
시내 주행에서 이만한 거리를 이동하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다.
바쁜 아폰테 사장이 무슨 마음에 이를 참고 견뎌주겠는가!
그렇기에 획기적이기는 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권 전무의 발언에 강전호의 표정이 금방 굳어진다. 그의 우려가 타당하기 때문이다.
“제가 아폰테 사장님과 면식이 있습니다. 그러니 시험을 참관하도록 해드릴 수 있을 겁니다.”
“네에? 정말요? 아! 고맙습니다.”
강전호가 먼저 뛸 듯이 기뻐한다.
그런데 권 전무의 이맛살은 이번에도 잠깐 펴졌다가 다시 구겨진다.
“전무님, 왜 그러세요? 김 전무님이 연락해 주신다잖아요.”
“에구, 이 사람아, 우리도 염치라는 게 있어야지.”
“네?”
“엔진 개조해 주고, 소음 줄여주고, 선박 속도를 빠르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미안할 판에 아폰테 사장님까지 움직여 준다시잖나. 우린 아무것도 주는 게 없는데……. 얼굴을 못 들겠네.”
첫인상처럼 권 전무는 권모술수와는 관계없이 순전한 능력만으로 진급한 사람인 것 같아 현수는 기분이 좋았다.
“태백조선소에서 왜 주는 게 없습니까?”
“미안합니다. 천지건설 소속이시니 진급을 시켜 드릴 수도 없고 보너스도 드릴 수 없습니다.”
감사의 뜻으로 돈을 주면 두 그룹 간에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다.
사람 빼가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태백조선소에서는 강 과장을 제 친구로 주었습니다. 그러면 된 거지요.”
“친구요?”
“네, 둘이 친구하기로 했습니다. 안 그래, 강 과장?”
“으응! 네. 아니, 그래. 그랬지.”
강전호는 몹시 어색한 표정이다.
회사는 다르지만 과장이 전무에게 어찌 쉽게 말을 놓겠는가!
게다가 천지건설은 태백조선소보다 더 큰 회사이다. 그렇기에 떨떠름한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전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권 전무를 바라본다.
“아무튼 이 일은 제가 친구를 위해 하는 일입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에구, 그래도 미안해서…….”
권 전무가 어찌 이런 속내를 모르겠는가! 하여 몹시 미안한 표정이다.
“괜찮습니다. 강 과장, 여기서 나가면 곧바로 차를 수배해. 나는 울림네트워크에 연결해서 연비 테스트를 준비해 달라고 할 테니.”
“끄응! 울림네트워크까지……. 김 전무님, 대체 왜 이러십니까? 아무리 강 과장하고 친구하기로 했다지만 너무 신세를 져서……. 아무튼 고맙습니다. 이 은혜 꼭 갚겠습니다.”
“네에, 그러세요. 성사되고 나면 코가 삐뚤어지도록 한잔 사십시오. 아셨죠?”
“아이고, 물론입니다. 열 번, 아니, 백 번 삐뚤어질 때까지 사겠습니다.”
“네, 그리고 저 막걸리와 빈대떡 무지하게 좋아합니다. 꼭 기억해 주십시오.”
“에구, 네에.”
돈 많이 들어가는 비싼 접대는 받지 않겠다는 뜻을 어찌 모르겠는가!
권철 전무는 내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사우나를 마친 셋은 나오자마자 이곳저곳에 연락을 한다.
울림네트워크 박 대표는 기꺼이 연비 측정을 하겠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차만 있으면 더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다음엔 아폰테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리링, 띠리리리링! 띠리리링!
“오! 김현수 전무. 반갑네, 반가워.”
“네, 사장님. 별일 없으시죠?”
“그럼, 그럼! 요즘 아주 신나서 돌아다니네. 근데 어딘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거는 건가?”
“아뇨. 아래층에 있습니다. 지금 롯데호텔이거든요.”
“으잉? 그래? 그럼 올라오게.”
“알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죠.”
아폰테 회장은 로얄스위트룸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띵똥―!
벨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객실 문이 활짝 열린다. 그리곤 환히 웃는 아폰테 사장의 얼굴이 보였다.
“오오, 어서 오게. 반갑네, 반가워.”
“하하, 네에. 근데 엘리자베스 사모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으응, 그 할망구 요즘 펄펄 날아. 손주들 줄 거 산다고 백화점으로 갔네.”
“아! 그렇군요. 사모님 몸은 괜찮으신 거죠?”
“그럼! 우리 고명한 김 전무의 치료 덕분이네. 으하하하!”
아폰테 사장은 혈기왕성한 모습이다. 희석한 회복 포션 덕분일 것이다.
“그나저나 바쁜 자네가 웬일인가?”
“두 가지 부탁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두 가지? 뭔가. 말해보게.”
무엇이든 들어줄 준비가 되었다는 표정이다.
“네! 첫째는 사장님의 전용기를 빌려달라는 겁니다.”
“전용기? 호오, 전에 얘기했던 신혼여행? 자네 결혼하나?”
“네, 이번 크리스마스이브에 합니다.”
“와우! 축하하네, 축하해! 하하, 이거 크게 축하할 일이군. 좋아, 좋아! 비행기 빌려주지. 내 별장들도 다 빌려줄 거네. 단 조건이 있어.”
“네? 무슨 조건이요?”
“나하고 우리 할망구를 자네 결혼식에 꼭 초청하라는 거네. 안 그러면 안 빌려줄 거네.”
“에구, 그야 당연한 말씀이지요. 제가 사장님과 사모님을 안 모시면 누굴 모시겠습니까? 근데 이거 아십니까?”
“뭘 말인가?”
금방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노회한 기업가라기보단 천진난만한 어린이 같은 모습이다.
“한국에선 결혼하는 부부에게 하객들이 선물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오, 그래? 그거 잘되었네.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게 선물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잘되었네.”
다소 익살스런 표정이었기에 아폰테 사장의 이 말을 농담 비슷하게 받아들인 현수는 훗날 크게 놀라게 된다.
“아! 그래요? 하하, 기대가 되는군요.”
“자아, 두 번째 부탁은 뭔가?”
“태백조선소에서 MSC 사의 계약을 따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 아시죠?”
“아네. 하지만 오시마조선소에서 내놓은 조건에 훨씬 못 미쳐서 안 만나고 있네. 괜한 고생 시키지 않으려고.”
친분은 친분이고 사업은 사업이라는 듯 금방 냉정한 표정이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은 이어졌다.
“오늘 오후에 태백조선소에서 뭔가를 보여 드리려 할 겁니다. 제 두 번째 부탁은 그냥 그걸 봐달라는 겁니다.”
“보여줘? 뭘?”
“후후! 그건 비밀입니다. 하여간 봐주십시오.”
“뭐, 보는 거야 어렵지 않지. 그렇지 않아도 할망구 쇼핑이 끝나길 기다려야 하는 신세였으니 차라리 잘되었네. 아무튼 자네 부탁이니 보겠네.”
“고맙습니다.”
“고맙긴. 그나저나 어떻게 지냈나? 그동안 재미있는 일 없었어?”
“왜 없었겠습니까? 그나저나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왜? 무슨 일 벌어졌어?”
“아까 제가 그랬잖아요. 한국에선 결혼하는 부부에게 선물하는 관습이 있다고요.”
“그래, 그랬지.”
“크리스마스이브에 결혼식을 하고 사장님 전용기를 타고 콩고민주공화국으로 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