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8
잠시 후, 신형섭과 김현수는 최인세 과장이 동석한 차를 타고 이동했다.
“성산 일출봉이 제주 풍경의 황제라면 섭지코지는 황태자 같은 곳입니다. 섭지코지는…….”
최 과장은 형섭과 현수가 제주도에 놀러 온 것으로 생각하는지 관광가이드같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때마다 둘은 건성건성 대꾸했다.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는 탓이다.
그러는 동안 차는 유니콘 아일랜드로 접어든다.
메인 타워에 당도하니 호텔처럼 높은 모자를 쓴 도어맨이 다가와 문을 열어준다.
“어서 오십시오. 유니콘 아일랜드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네에,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수가 대꾸하는 사이에 신 사장은 최 과장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곤 차에서 내렸다.
텅! 텅―! 부우우우웅―!
최 과장을 태운 차가 떠나간다.
“네, 회장님. 네, 알겠습니다. 네, 곧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신 사장은 안으로 들어가 데스크 직원들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그러는 동안 현수는 주위 풍광을 살폈다.
이곳은 바다 끝의 튀어나온 부분을 일종의 휴양지로 가꿔놓은 곳이다. 곁의 안내판을 보니 식물원도 있고, 공연장도 있으며, 곳곳에 별장들이 세워져 있다.
300여 채의 별장은 이곳저곳 풍광 좋은 곳에 지어져 있고, 그와 별도로 콘도미니엄으로 사용되는 건물도 여러 채 보인다. 안내 간판을 보니 관광객들도 입장료만 내면 들어와 구경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별장들은 독립성과 차별화가 콘셉트인 듯하다. 똑같은 디자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그에 대한 반증이다.
두리번거리는 동안 웬 차가 입구로 다가온다. 마이바흐이다.
“신형섭 사장님!”
“아! 여깁니다.”
현수와 신 사장을 태운 마이바흐는 유니콘 아일랜드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세심각(洗心閣)으로 향한다.
유니콘 아일랜드에서 가장 규모가 큰 별장이다. 전통 기법으로 재현된 멋진 이 한옥은 ㅁ자 형으로 지어졌다.
아까 읽었던 설명서에 의하면 한옥과 양옥의 장점만을 취해 지은 건물이라 생활하기에 아주 편할 것이다.
끼이이익―!
자동차가 멈추자 40대 중반쯤 되는 장년인이 웃음 지으며 나와 문을 열어준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세심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민 집사군요. 오랜만이네요.”
“네에.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드시지요.”
“그럽시다. 김 전무, 어서 가세.”
“네에.”
신형섭 사장의 곁에 있던 젊은 청년을 수행 비서쯤으로 여리고 있던 민 집사의 눈이 커진다. 그룹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무이사 본인일 것이라곤 상상치 못한 때문이다.
“허허! 어서 오시게.”
실내로 들어가니 넉넉한 한복을 걸친 이연서 회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두 팔을 벌린다. 환영한다는 뜻이다.
“회장님, 안녕하셨습니까?”
“그럼, 그럼! 김 전무 덕에 요즘 아주 좋네. 하하하! 민 집사, 밀양댁에게 말해 음료수 좀 내오게.”
“네, 회장님!”
민 집사가 물러나자 이 회장은 보료에 앉는다.
“자! 자네들도 앉지.”
“네, 회장님!”
이연서 회장의 좌우에 자리를 잡자 40대 초반의 선 고운 여인이 식혜와 수정과를 내왔다.
“우리 밀양댁 수정과 만드는 솜씨가 일품이네.”
“아! 그런가요? 그럼 맛 좀 보겠습니다.”
신형섭 사장이 수정과 맛을 음미하는 모습을 본 밀양댁은 배시시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물러났다.
“자네도 들어. 진짜 맛 괜찮으니까.”
“네에.”
현수 역시 수정과를 맛보았다. 입안 가득히 청량감이 느껴진다. 계피의 독특한 냄새를 오랜만에 접해 그러는지 왠지 더 달콤하다는 느낌이다.
“그래, 중요하다는 이야긴 뭔가?”
“네, 여기 있는 김 전무가 통일부 사람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해서요.”
“통일부?”
이 회장 역시 애초의 신 사장처럼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한낱 건설사 직원이 북한과 관련된 정부부처 관료와의 접촉을 요구하는 건 뭔가 이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씀드려도 됩니까?”
현수의 시선을 받은 신 사장이 이 회장을 바라본다.
“회장님, 극도의 보안이 요구되는 일이랍니다.”
“흐음, 그런가? 민 집사! 민 집사! 게 있나?”
“네, 회장님!”
언제든 명이 떨어지면 임무를 수행하려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민 집사가 장지문11)을 열고 고개를 디민다.
“보안이 필요한 일이 있네. 하니 주위 사람들을 물리게. 자네도 잠시 나가 있고.”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대답을 끝으로 닫혔던 장지문이 다시 열린 것은 대략 3분쯤 지난 후이다.
“회장님, 사람들 모두 물렸습니다. 얼마나 대기시킬까요?”
이 회장은 대답 대신 현수를 바라본다. 시간이 얼마쯤 걸릴 일이냐는 무언의 물음이다.
“두 시간쯤 산책을 보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런가?”
현수에게서 시선을 뗀 이 회장이 민 집사를 바라본다.
“들었지? 두 시간쯤 있다 오게. 유니콘 아일랜드를 한 바퀴 휘 돌아보는 것도 괜찮겠군. 이 시각 이후로 세심각엔 우리 셋만 있어야 하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장지문이 또 닫혔고, 잠시 후부터는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떠난 것이다.
“자아, 이제 말을 하게. 대체 무슨 일인가?”
“북한 사람들을 만나봐야 할 일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북한 사람을 왜 만나야 한다는 겐가?”
“이번에 저는 모스크바를 방문했습니다. 거기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메드베데프 총리를 만났습니다.”
현수의 말에 둘 다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신형섭 사장도 그러하지만 이연서 회장도 푸틴을 쉽게 만날 수 없다.
그런데 젊디젊은 현수가 마치 친구 만나고 온 듯 이야기하니 깜짝 놀란 것이다.
“뭐어? 그, 그래서?”
“동시베리아 야쿠티아 자치공화국에는 카얀다 가스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곳으로부터 극동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약 3,200㎞에 이르는 파이프라인 연결 공사 및 그곳으로부터 북한을 거쳐 남한에 이르는 제반 공사를 따낸 것 같습니다.”
“뭐, 뭐어?”
“헐!”
이 회장과 신 사장 모두 기함할 듯 놀라는 표정이다.
“자세한 공사비는 추후에 산정해 봐야 알겠지만 수년 전 산출한 금액이 가스전 개발에 4,300억 루블(15조 6천억 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 공사는 7,700억 루블(27조 9천억 원)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더군요.”
“……!”
“헐……!”
둘은 입을 딱 벌렸다. 40조를 훌쩍 뛰어넘는 공사이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수주한 2,432㎞짜리 고속도로는 437억 5천만 달러이다. 한화로 환전하면 약 47조 원이다.
이것 덕분에 천지건설은 확고한 국내 1위 건설사가 되었다. 브랜드 밸류가 크게 상승하는 탓에 모두 고전을 면치 못하는 아파트 분양 시장에서도 발군의 계약률을 이룩했다.
현수가 말한 공사비를 다시 산정하면 몇 년 전보다 훨씬 많아질 게 자명하다. 게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한을 거쳐 대한민국에 이르는 공사가 빠진 상태이다.
그것까지 포함시키면 이번 공사는 최소가 50조 원을 넘는 어마어마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그 공사에 대한 제반 공사를 따낸 것 같다는 말을 한다.
공사 수주를 위해 영업비로 쓴 건 단 한 푼도 없다.
천지건설에 기획영업단이 만들어졌고, 그곳에 소속된 인원은 딱 셋이다.
박진영 과장과 강연희 대리, 그리고 김현수 전무뿐이다. 사무실을 유지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조차 아직 청구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세 사람 월급 준 것밖에 없다.
그런데 모든 사원이 전심전력으로 매달려 몇 년간 노력을 해도 수주할까 말까 한 공사를 또 따냈다는데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김 전무! 자넨 대체……!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신형섭 사장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반면 이연서 회장은 현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눈빛을 빛내고 있다.
‘이놈, 진짜 물건이다. 무슨 수를 쓰던 꽉 잡아야 한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물건이 있지? 속된 말로 이놈은 대박 중의 대박이야. 수린이 정도면 될 줄 알았는데……. 끄으응!’
이연서 회장 역시 잠시 후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현수를 천지그룹에 잡아둘 아무런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좋네. 그룹에서 어떤 지원을 해주면 되겠는가?”
“네,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북한을 통과하는 공사에 대한 전권을 이양받았습니다. 그러려면 북한 인사와 접촉하여 그쪽 의견을 타진하는 등의 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일은 내가 대신 해줄까?”
이연서 회장은 북한 인사들에게 뇌물을 줘서라도 일을 해결할 생각을 품었다.
“아닙니다. 제가 가야 합니다. 푸틴이 인정한 건 저니까요.”
“흐으음! 위험할 수도 있는 그곳에 자넬 보내고 싶지 않네.”
“그래도 제가 가야 합니다. 가서 설득하겠습니다.”
“그게 될까? 지난번에도 그쪽 때문에 포기했다 들었는데.”
이연서 회장의 말은 사실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런 사망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불안한 정권 장악 때문에 진행되던 일 전부가 없었던 걸로 되어버렸다.
지금 현수는 다 꺼진 불씨를 활활 일으켜 다시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이 공사는 천지건설뿐만 아니라 계열사 거의 전부에게도 이득이 된다. 따라서 수주할 수만 있다면 기를 쓰고 수주해야 할 공사이다.
이것이 성사되면 러시아에서의 위상이 올라갈 것이고, 공사 경험은 다른 수주 경쟁에서 큰 힘이 될 것이다.
“이 일이 성사되려면 북한의 협조가 담보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통일부 사람들과 접촉하여 주십시오.”
이곳에 오기 전 현수는 북한 인사와의 접촉 이전에 선행될 일이 있음을 확인했다.
가장 먼저 접촉 승인 신청을 해야 한다.
남북 교류 협력에 관한 법률 제9조 제3항에 따르면 접촉 예정일 15일 전까지 제반 서류를 구비하여 통일부 장관에게 북한 주민 접촉 승인을 신청하도록 되어 있다.
다음은 안내 교육이다. 그렇게 하여 북한 인사를 만난 이후에는 접촉 결과 보고를 하여야 한다.
접촉 후 10일 이내에 육하원칙에 따라 정확하고 자세하게 서류를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아울러 향후 계획은 정부와 협의한 뒤에 추진해야 한다.
현수는 이보다 조금 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일반적인 북한 주민을 만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최고실권자인 김정은을 만나야 할지도 모른다. 당연히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 회장에게 도움을 청하려 내려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