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9
“알겠네. 내가 선을 대어 모든 절차를 밟아주지. 근데 가스전 개발 및 연결 공사에 대한 계약서도 없이 일을 추진할 수는 없네. 이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아! 그거라면 이걸로 어떻게 해결되지 않을까요?”
현수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푸틴과 메드베데프가 서명한 서류이다. 여기엔 방금 전 말한 가스전 개발과 연결 공사 제반에 관한 권리를 위임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헐!”
신 사장은 또 나직한 탄성을 낸다. 푸틴과 메드베데프의 선명한 사인을 본 직후이다.
“흐으으음!”
이 회장 역시 나직한 침음을 낸다. 서류 맨 아래에 쓰여 있는 내용 때문이다.
이 서류의 진위를 파악하고자 하면 주한 러시아 대사를 부르라고 되어 있다. 대사를 부를 수 있는 정부 요인은 대한민국 국무총리, 또는 대통령으로 한정되어 있다.
아울러 비공식적으로 딱 한 번만 확인해 준다고 쓰여 있다.
가스전 개발 공사와 파이프라인 연결 공사가 김현수 전무에게 장악되었음을 대외적으로 알리지 못할 상황이기 때문이라는 내용도 있다.
“이 서류, 내게 줄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참, 말씀 안 드린 것이 있습니다.”
“뭐지? 극도의 보안을 요구받았습니다.”
“극도의 보안을 요구받아? 그게 뭐지?”
“푸틴 대통령은 이 서류로 진위를 파악하고 난 뒤엔 반드시 파기해 달라고 했습니다. 정부에 넘겨줘선 안 됩니다.”
“알겠네.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아니, 확인되면 자네에게 직접 되돌려 주겠네.”
“네, 그래 주시면 좋지요.”
“그나저나 그 공사와 관련된 자료들 있나?”
“물론입니다.”
말을 마친 현수는 노트북을 꺼내 개발한 가스전의 위치부터 시작하여 파이프라인이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에 관한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12장 내 이놈들을 당장!
“밀양댁에게 저녁 준비시켰네. 먹고 가게. 아님 내일 나랑 같이 올라가세.”
“그러죠. 자네도 괜찮지?”
“그럼요.”
현수가 싱긋 미소 짓자 신형섭 사장도 환한 미소를 짓는다.
무슨 인복이 있어 이처럼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과 같이 있는지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이다.
조금 전 이 회장은 신 사장에게 최소 10년은 사장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현수를 꽉 잡고 있으라는 뜻이다.
현수 덕에 앞으로 10년 이상 더 천지건설 사장 자리에 있게 된 셈이다.
기분이 좋기에 이런 환한 웃음을 짓는 것이다.
“참, 자네가 지시한 것이 당도했다고 하네. 나가보게.”
“아! 그렇습니까? 그럼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신형섭 사장이 서둘러 밖으로 향한다. 아까 세심각에 당도했을 때 오션뷰파크 현장의 최 과장에게 다금바리를 수소문하라고 말했다.
그게 도착한 모양이다.
제주에서도 진짜 다금바리는 구하기 어렵다. 그래서 능성어를 다금바리라 속여 파는 집도 있다.
아무튼 신 사장은 진위를 파악하러 나간 것이다.
이 회장은 창밖 풍경에 시선을 주고 있는 현수에게 물었다.
“흠흠, 전에 만났던 수린이는 마음에 안 드는가?”
“네? 아, 죄송합니다. 전 이미 사귀는 여자가 있어서.”
“다른 손녀도 있는데…….”
셋째 아들의 둘째 딸은 현재 고3이다.
지금은 대학 입학을 위한 공부에 매진하고 있지만 내년이면 학교를 졸업하니 엮어볼 요량인 것이다.
“회장님…….”
“왜 그러나?”
현수가 말을 잠시 끊자 이연서 회장이 빙그레 웃는다. 속내를 감추지 않겠다는 뜻이다.
“으음, 드릴 말씀이 있는데 이 또한 비밀을 엄수해 주실 수 있는지요?”
“무엇이든……. 좋네, 입을 꽉 다물지. 말해보게.”
이 회장은 이번엔 또 얼마나 엄청난 소리를 듣게 될지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회장님 자제분 중에 화학을 맡으신 이강혁 회장님에 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수린이 애비 강혁이?”
“네, 이강혁 회장님에 관한 내용입니다.”
전혀 뜻밖이라는 듯 이연서 회장은 눈썹을 꿈틀거린다.
“좋네, 말해보게.”
“네, 이강혁 회장님은 젊은 시절…….”
현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가난했지만 청순 발랄했던 강진숙과 이강혁 회장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듣고 보니 강진숙을 본 적도 있다.
천지화학이 태동할 때 사장 비서실에 근무했던 예쁜 아가씨이다.
이연서 회장이 순간순간 과거를 되짚는 동안에도 현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이미 배가 부른 임신 7개월 때 이강혁에게 버림받은 강진숙이 아기를 낳았고, 고생고생하며 살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그 아이가 천지건설에 입사하였다. 부친이 누군지 모르기에 천지그룹에 입사지원서를 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이수린의 모친으로부터 회사를 그만둘 것을 종용받았다는 말도 했다.
아울러 서울에서 최소 200㎞ 이상 떨어진 곳으로 이사 가라는 말도 들었음을 이야기했다.
이연서 회장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이맛살을 꿈틀거리게 했고, 눈썹을 찌푸렸다.
현수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출생조차 모르는 손녀가 있으며 그녀의 나이가 스물일곱 살이나 된다.
운영하던 꽃가게에서 빈손으로 쫓겨나게 만든 이수린의 모친이 한 짓에 화가 났는지 부르르 떨기도 했다.
‘내 이 연놈을 당장!’
이연서 회장은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며 현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윽고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이 회장은 남의 가정사를 왜 이렇듯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이 시점에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느냐는 표정이다.
“그 아이는 대체 누구지? 나도 아는가?”
“네, 제가 비서로 데리고 있는 강연희 대리입니다.”
“으으음!”
어찌 알았나 싶었더니 비서라고 한다.
이 회장은 부끄러운 부분을 들킨 기분이 되어 나지막한 침음을 냈다.
“내가 어찌해 주면 좋겠는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함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함구? 그런데 내게 왜 이런 이야길 했나?”
“회장님!”
“왜?”
“저 강 대리와 결혼할 겁니다.”
“뭐어?”
이연서 회장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연희 씨는 이강혁 회장님은 부친으로 인정할 수 없답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다더군요.”
“그, 그래서?”
“부친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딸을 달라는 말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 회장님의 손서가 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현수는 이 회장의 앞에 정중히 무릎 끓고 고개 숙였다.
아내 될 여자의 친조부이기에 취하는 예절이다.
“…고맙네. 잘해주게.”
“감사합니다. 평생 행복하도록 애쓰겠습니다.”
“허허, 허허허허! 하하, 으하하하!”
이연서 회장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진다. 너무도 기분이 좋아서이다.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손짓을 한다.
손서가 불편할까 봐 해주는 배려이기에 얼른 일어났다.
“강혁이 그 녀석에겐 평생 비밀로 해주지. 어째 화학이 콩고민주공화국에 가서 아무 소득도 없었나 했네. 후후, 그럼 혼 좀 나야지. 수린이 어미도.”
“……!”
“걱정 말게. 강혁이도 수린이 어미도 연희가 자네 아내라는 걸 평생 모르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하하, 하하하! 기분 좋네. 천지건설이 업계 1위가 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보다 더. 하하! 하하하!”
김현수라는 걸출한 인재를 잡았다는 느낌에 이연서 회장의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회장님!”
“왜? 뭐가 또 있나?”
“네, 드릴 말씀이 또 있습니다. 이 또한 함구해 주십시오.”
“좋아, 뭐든지 말하게.”
이연서 회장은 현수가 원하기만 하면 계열사 두어 개를 뚝 떼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기에 환한 웃음을 짓는다.
“연희와 결혼하기 전에 먼저 결혼할 여자가 있습니다.”
“뭐라고?”
상식적으로 납득가지 않는 말이기에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수를 바라본다.
“먼저 제 상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현수는 콩고민주공화국에 조성될 이실리프 농산과 농장, 그리고 축산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다음엔 레드 마피아가 소유한 드모비치 상사와 연간 12억 달러 규모의 수출이 진행됨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킨샤사와 아디스아바바의 천지약품에 대해 설명했다.
이실리프 어패럴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될 즈음 이연서 회장은 눈을 크게 떴다.
평범했던 회사원이 어느새 천지그룹에 육박하는 거대 기업의 수장이 되어 있음을 느낀 것이다.
특히 제주도보다도 큰 이실리프 농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땐 입을 딱 벌렸다. 유니콘 아일랜드도 상당히 큰 규모이다.
그런데 이실리프 농산에 비교하면 코끼리와 비스킷을 비교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마친 현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는 권철현 서울고검장님의 딸 권지현과 먼저 결혼을 할 겁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이브에.”
“……?”
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 대꾸도 하지 않는다.
“연희와 이리냐는 현재 콩고민주공화국에 있으며 크리스마스 날 결혼을 할 생각입니다. 한국에서의 부인은 권지현이지만 콩고민주공화국에선 연희가 제 아내입니다. 러시아로 가면 이리냐가 그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으으음!”
이연서 회장은 나지막한 침음을 낸다.
“말씀드렸듯이 제가 가장 오래 머물 곳이 비날리아나 반둔두 지역이 될 겁니다. 지금은 황량한 벌판과 밀림이지만 곧 사람들이 살아갈 터전이 될 테니까요.”
“연희를 행복하게 해줄 거지?”
“물론입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연희입니다.”
“고맙네. 애비나 할아비 도움도 없니 자네 같은 용을 문 녀석이네. 대견해. 너무 대견해. 잘해주게.”
이연서 회장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결혼식에는 오실 거죠?”
“당연하지. 이번 겨울은 킨샤사에서 머물겠네.”
“하하, 네에.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준비해 놓겠습니다.”
“근데 나 혼자만 가나?”
“입만 굳게 다물어주신다면 누구든 데려오셔도 됩니다.”
“알겠네. 그나저나 이제부터 자넨 내 손서네.”
“고맙습니다.”
“지금도 당당하지만 어디에서도 그 당당함을 잃지 말게.”
“하하, 물론입니다.”
스르르릉―!
현수가 웃음 지을 때 장지문이 열리고 신형섭 사장이 들어선다.
“회장님, 저녁 드셔야죠. 다금바리 준비해 놓았습니다.”
“오! 그래? 좋아, 가지. 참, 둘이 먼저 가 있게. 난 화장실 잠깐 들르겠네.”
신 사장과 현수가 깔끔한 식당에 발을 들여놓을 때 이연서 회장은 민 집사를 불러 이야기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