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4
“자, 이제 됐어요. 이젠 일어나셔도 돼요.”
“그, 그래!”
몸을 일으킨 어머니는 느낌으로 체내를 살피는 듯하다.
“으응? 그러고 보니 잘 보이네?”
수정체에 발생된 혼탁으로 인해 조금씩 시력 저하 현상이 빚어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게 말끔히 사라지니 젊은 시절처럼 잘 보이는 것이다.
“어! 나도. 이게 그냥 보이네.”
“어머! 여보, 저도 신문이 잘 보여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돋보기를 써야 신문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맨눈으로도 또렷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자아, 몸은 앞으로도 조금씩 더 나아지실 거예요. 아까 복용한 회복 포션과 제가 시전한 리커버리 마법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진행되니까요. 물론 인체엔 아무런 해가 없어요.”
“그, 그래, 고맙구나. 모두 네 덕이다.”
어머니는 흐뭇한 미소로 아버지를 바라보신다. ‘이런 자식을 내가 낳았소’ 하는 표정이다.
“어머니, 전에 드렸던 그 약들 어디에 두셨어요?”
“그거? 혹시 몰라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두 병만 남기시고 나머진 절 주세요. 그리고 그 두 병은 비상용이에요. 전에 아버지 손가락 잘리셨을 때처럼 긴급한 일이 발생되었을 때만 사용하세요.”
“그럼 그때…….”
“네, 그때도 제가 힘을 좀 썼죠.”
“그랬구나. 어쩐지 조금 이상하다 했어. 그렇게 빨리 나을 수가 없는 건데. 고맙구나.”
아버진 이제야 의혹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신다.
“아무튼 그 두 병은 꼭 두 분을 위해서만 쓰셔야 합니다. 그럴 리야 없지만 주임 신부님이 아무리 아파도 주시면 안 돼요. 제가 마법사라는 게 알려지면 어쩌면 이 나라에서 못 살 수도 있어요. 왜 그런지는 아시죠?”
아버진 의미를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머닌 아니다. 마법사가 왜 한국에 못 사느냐는 표정이다.
“현수가 마법사라는 게 알려지면 나라에서 데려가 쓰려 할 거요. 자유는 없어지고 실컷 부림만 당한다는 뜻이오. 연구하겠다고 달려들지도 모르고. 당신 아들이 해부되면 좋겠소?”
“네? 아, 안 되죠. 당연히 안 돼요.”
어머닌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얼른 손사래를 친다.
“그러니까 두 분만 아시고 어느 누구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그럼 사돈이 될 고검장님에게도 말하지 마?”
“아뇨. 고검장님과 사모님께는 말씀하셔도 돼요. 지현이도 제가 마법사인 걸 아니까요.”
“그래, 그랬구나. 그나저나 너 없이 결혼 준비하려니 좀 그렇다. 양복도 새로 맞춰야 하고, 너희 웨딩 촬영도 해야 하잖니. 근데 또 나가야 하니?”
“어머니, 아버지, 제가 두 분께 또 말씀드릴 일이 있어요.”
“오냐, 말해보아라.”
아버진 기특하고 대견한 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신지 웃는 낯이다.
“그래, 뭐냐? 말해봐라.”
“저 크리스마스이브에 지현이와 결혼하죠?”
“그래.”
“그리고 곧바로 출국할 거예요.”
“아암, 당연하지. 신혼여행은 가야지. 그래, 어디로 가려고?”
“신혼여행을 곧바로 떠나는 게 아니라 콩고민주공화국으로 가야 해요.”
“왜? 일이 바빠서 그러니? 전무가 되었다 해서 좋아했건만 신혼여행도 못 갈 정도로 바쁜 거야?”
어머닌 못마땅하다는 표정이다.
하긴 평생에 딱 한 번뿐인 신혼여행을 회사 일 때문에 못 가게 된다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어머닌 당사자가 아니지만 본인이 그런 입장인 듯 인상을 찌푸리신다.
“그게 아니라 거기에서 결혼식을 또 올려야 해요.”
“거기서 왜? 거긴 일가친척도 없는 곳인데. 지현이가 그러자고 그러든?”
“아뇨. 지현이를 만나기 전부터 제가 좋아했던 아가씨가 있어요. 연희라고, 천지그룹 이연서 회장님의 손녀지요.”
“뭐? 천지그룹 이연서 회장님의 손녀?”
“네, 친손녀예요. 둘째 아드님의 큰딸이니까요.”
아버진 많이 놀라는 표정이다.
이연서 회장은 툭하면 뉴스 화면에 등장하는 대한민국의 재계를 주름잡는 재벌 탑3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연희 말고도 아가씨가 하나 더 있어요. 이리냐라고, 쉐리엔 선전에 나오는 모델 있지요?”
“러시아 모델이라는 그 아가씨?”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잘 안 봐서 모르지만 어머닌 각종 드라마를 꿰고 있다.
당연히 시작 전에 방영되는 CF를 봤기에 이리냐를 안다.
게다가 혜성처럼 등장하여 대한민국 사내들의 가슴을 뛰게 한 절세미녀이기에 각종 연예 프로그램에서 이리냐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네. 이리냐도 제 신부예요.”
“헐!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 그럼 신부가 셋이라고?”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현이와 연희는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이리냐는 외국인 아니냐?”
어머닌 이리냐를 밀어낼 속셈인 듯하다.
“어머니, 이리냐는 제가 만든 무역회사와 거래하는 드모비치 상사라는 곳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여자예요.”
“그, 그래?”
“아버진 혹시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레드 마피아를 아세요?”
“레드 마피아라면 러시아의… 맞냐?”
“네, 맞아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마피아이자 세력도 가장 큰 조직이죠.”
“그, 그런데 왜?”
“이리냐는 레드 마피아 모스크바 보스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의 딸이에요.”
“뭐, 뭐라고?”
아버진 대경실색하신다.
“여보, 레드 마피아가 대체 뭐길래 이래요?”
“레, 레드 마피아는 세계 폭력 조직 중 1위인 집단이야. 웬만한 나라 정도는 그냥 찜 쪄 먹을 세력이지. 우리나라 조폭이 모두 덤벼도 당해낼 수 없어.”
“네에?”
“어머니, 이리냐는 참하고 상냥한 아가씨예요. 정상적으로 대학까지 졸업할 거구요.”
“……!”
고검장 댁과 사돈을 맺는 것도 몹시 부담스러웠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런데 고검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재벌의 손녀, 그리고 그런 재벌을 우습게 아는 레드 마피아 두목의 딸이 아들과 결혼한단다.
부모님은 아예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리고 있다.
“아무튼 그곳에서 연희와 이리냐, 그리고 지현이와 결혼식을 올릴 거예요. 거기까지는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갈 거니까 그런 줄 아세요.”
“그, 그래, 네 뜻대로 하거라.”
아버지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기호지세라는 말이 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황이라는 뜻이다.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천지그룹과 척을 져서도 안 되고, 레드 마피아는 더더욱 안 된다. 그랬다간 남아나는 게 없게 된다. 그렇기에 사회 규범에는 어긋나지만 고개를 끄덕여 허락해 준 것이다.
“서울이나 근교에 집을 지을 거예요. 거기선 지현이와 살 겁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킨샤사에선 연희와 살구요. 모스크바 집에선 이리냐와 머물 겁니다.”
“그럴 집은 있는 거냐?”
“네, 킨샤사와 모스크바의 집은 이리냐의 후견인과 보스가 선물해 주셨어요.”
“그래, 알았다. 피곤할 텐데 가서 쉬거라.”
부모님은 현수와 더 이야기하다간 어떻게 될 것 같은지 쉽게 풀어주신다.
이로써 결혼과 관련된 모든 난관은 극복한 셈이다. 현수는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진 때문인지 콧노래를 불렀다.
부우우우웅! 부우우우웅―!
“강전호구나. 일이 잘 되었을까? 여보세요.”
“아! 여보세요. 김 전무님.”
“친구하기로 해놓고 전무님은 무슨……. 아폰테 사장님과의 일은 잘 되었나, 친구?”
“어! 그, 그래. 고, 고마워. 사장님이 마음을 바꿔 우리와 계약을 하시겠대. 근데 친구 좀 보자고 하셔.”
“지금?”
“가급적 빨리 봤으면 하셔.”
“오케이. 지금 바로 갈게. 롯데호텔이지?”
“그래.”
전화를 끊고는 곧바로 차를 몰아 롯데호텔로 향했다.
“오오! 어서 오게.”
“하하! 네.”
아폰테 사장이 두 팔을 벌려 환영의 뜻을 표한다. 이때 부속실에 있던 엘리자베스가 웃으며 나타난다.
“아! 사모님도 계셨군요. 안녕하시죠?”
“어서 와요, 미스터 킴!”
“네, 건강해 보여서 좋네요.”
“자네 덕이지. 자자, 이럴 게 아니라 자리에 앉지.”
“네.”
현수가 자리에 앉자 아폰테 사장이 시선을 준다.
“그런 기술이 있으면 진즉에 말을 하지. 괜히 여러 사람 힘들게 하였네.”
“그게… 원래는 자동차에 적용되는 거였어요. 전호 그 친구가 도움을 청해 선박 쪽에도 된다고 했더니 그런 겁니다.”
“대단해! 역시 대단해! 올해 최고의 기술이네!”
어제 아폰테 사장은 노란색 스피드를 끌고 온 강전호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현수의 말이 없었다면 화를 버럭 낼 상황이다. 세상에 어떻게 1리터에 112㎞나 굴러가는 차가 있단 말인가!
최첨단 하이브리드 차에서도 나오기 힘든 연비이다.
하여 박동현 대표가 데리고 온 울림네트워크 직원에게 연료 탱크를 완전히 채우라고 요구했다.
75리터짜리 탱크가 완전히 채워졌음을 확인한 아폰테는 직접 운전대를 잡고 운전했다.
롯데호텔을 떠나 장지동 쪽을 가다가 서울 도시 외곽순환고속도로로 올라탔다. 그리곤 총연장 127.6㎞짜리 순환고속도로를 완전히 일주했다.
시내 주행에서 리터당 112.3㎞를 운행했다고 한 말은 믿을 수 없다. 하여 그보다 훨씬 연비가 높아질 고속도로를 달려봐서 연비를 살펴볼 생각을 한 것이다.
이 차엔 엘리자베스와 강전호,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울림네트워크 직원이 동승해 있었다. 동승자가 많을수록 연비는 줄어들기에 그건 감안할 생각이다.
아무튼 스피드는 서울 도시 외곽순환고속도로를 일주한 후 롯데호텔 주차장으로 되돌아왔다.
마침 퇴근 시간이 지나 러시아워가 풀린 상태인지라 별다른 막힘 없이 쾌속 주행을 해서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았다.
도착 즉시 탱크에 남아 있는 연료의 양을 측정했다.
계기판을 보니 오늘의 총 주행 거리는 140㎞를 약간 넘겼다. 계측 결과 남아 있는 연료는 74리터가 넘었다.
고속도로 주행 시 리터당 166㎞라는 놀라운 연비를 가졌다는 말이 사실인 것이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된다. 하여 뭐가 잘못된 건 없는지 여러 번 되짚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다.
노란색 스피드는 이 세상 어떤 가솔린 엔진 차도 보여주지 못한 연비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냐는 말에 전호와 울림네트워크 직원은 한결같이 현수 이름을 댄다. 더 이상 물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기에 현수를 만나면 물을 생각을 한 것이다.
“어떻게 그런 엔진을 개발하게 되었나? 정말 대단하네.”
“그냥 관심을 갖고 파고들었더니 의외로 좋은 결과가 나온 것뿐입니다.”
“사람 참 겸손하군. 내 그래서 미스터 킴을 더 좋아해.”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에구,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현수가 슬쩍 고개 숙여 사의를 표하자 노부부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맺힌다.
“여보, 아까 준비한 거 그거 좀 꺼내와.”
“네, 여보. 미스터 킴, 잠깐만 기다려요.”
“……?”
대체 뭔가 싶어 잠시 기다리는 동안 아폰테 사장은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바라본다.
“자아, 대령했어요.”
엘리자베스가 가져온 것은 노란 봉투 두 개였다.
“자, 이건 내 선물이네. 사랑하는 내 아내를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서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해줘 고맙다는 뜻으로 마련했네. 마다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