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6
“아! 권 전무, 이 시간에 웬 일인가?”
사장도 어디선가 술 한잔한 모양이다.
“사장님, 저 권철 전무입니다.”
“어! 그래, 무슨 일 있어? 오늘은 일요일인데 이 시간에 웬일이야?”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권철 전무는 세 과장에게 아무런 소리도 내지 말라는 뜻으로 한쪽 눈을 끔벅인다. 이에 모두 입을 막으며 웃음소리를 감춘다. 뭔가 음모를 꾸미려는 걸 눈치챈 것이다.
“큰일? 무슨 큰일? 누가 어떻게 됐어?”
“네, 저희 지금 잡혀 있습니다.”
“뭐라고? 뭐가 어떻게 되었다고?”
갑자기 사장의 음성이 커진다.
“저하고 강 과장, 그리고 우 과장과 박 과장이 지금 강남역 뒷골목에 위치한 홀딱 비즈니스 클럽에 잡혀 있다구요.”
“술집에 잡혀 있어? 술 마셨어? 돈만 내면 되는 일이잖아.”
“네, 그런데 지금 저희 넷 모두 지갑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빼앗겼습니다.”
“지갑을 빼앗겨?”
“네, 사장님밖에 없습니다. 와서 좀 구해주십시오.”
“권 전무,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지? 나 지금 귀한 손님 모시고 접대 중이야.”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희 지금 잡혀 있구요, 금방 해결해 주지 않으면 여기 있는 조폭들에게 맞아 죽게 생겼습니다. 어서 와서 좀 구해주십시오.”
권철 전무의 연기력은 상당했다.
“허어, 이 사람이 지금……. 좋아, 진짜지?”
“네, 진짜 맞습니다. 어서 구해주십시오.”
“좋아, 그리로 금방 가지. 가서 장난인 게 드러나면 알지?”
사장은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한 죄로 엄한 처벌을 할 것이다. 시말서는 당연하고 감봉 또는 견책 처분이다.
“사장님, 아니, 하늘같은 선배님!”
“왜?”
“제가 어떻게 감히 하늘같은 선배님을 상대로 장난을 치겠습니까? 더구나 아랫사람들 데리고요. 그러니 얼른 와서 구해주십시오. 네? 저희, 죽게 생겼습니다.”
“알았어, 알았어. 어디라고?”
“네, 강남역 4번 출구 뒤쪽 골목으로 쑥 들어오면 홀딱 비즈니스 클럽이란 곳입니다. 술값은 대략 200만 원쯤 됩니다.”
“헐! 많이도 마셨군. 좋아, 어떤 룸에 있는데?”
“저흰 12번 룸에 있습니다.”
“알았어. 금방 가지. 어디 다친 덴 없지?”
“네,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그래. 끊어.”
무뚝뚝한 사장답게 전화를 끊는다.
“크크! 크크큭!”
“키키키킥! 키키키킥!”
“우하하하! 하하하하!”
“하하! 하하, 아, 통쾌하다! 하하하!”
권 전무는 대학 2년 선배인 사장 때문에 겪은 수많은 스트레스가 한 방에 해결된 듯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다.
“근데 사장님이 진짜 클라이언트 접대 중이었으면 어쩌죠?”
“클라이언트 접대는 무슨. 역삼동에 새로 생긴 칵테일 바의 바텐더랑 노닥거리고 있었을 거야.”
“네? 그걸 전무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내가 거길 알려줬거든. 그 칵테일 바에 새로 온 바텐더가 아주 삼삼해. 우리 사장님 이상형인 청순가련한 인상에다 아주 새침한 아가씨거든.”
“우히히, 그래서요?”
“뭐가 그래서야? 사장님 혼자 된 지 꽤 되었잖아. 흐흐, 그래서 새장가 가려고 요즘 작업 중이시다.”
“아, 그랬군요.”
권 전무는 술에 취해 부하들이 알면 안 될 일을 발설하고 말았다. 나중의 일이지만 태백조선소 사장은 스물네 살이나 어린 신부와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직원들이 사모님이라 불러야 할 그 여인은 전직이 바텐더이다.
그리고 이 소문은 슬슬 회사 내로 번져 간다. 셋 중에 입 싼 사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중에 일어날 일이다.
“강 과장, 계약서 잘 챙겨둬. 최 사장 들어오면 면상에 확 디밀어. 그럼 난 이렇게 말할 거야.”
“뭐라고요?”
“최 사장, 그게 계약서라는 거야. 총액은 얼마 안 돼. 겨우 30억 달러. 한국 돈으로 따져도 얼만 안 돼. 겨우 3조 6천억 원이니까. 3억짜리 아파트는 12,000채밖에 못 사.”
“하하! 그다음엔요?”
사장님의 반응이 궁금했던 우 과장의 물음이다.
“그 돈은 12,000TEU급 컨테이너선 30척을 계약한 거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 술값은 최 사장이 다 내! 알았지?”
“하하! 하하하!”
세 과장은 박장대소하며 쓰러진다,
한편 12번 룸 밖에 있던 웨이터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안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이해되지 않은 때문이다.
남자 넷이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기에 이런 웃음소리가 나오는지 궁금하다.
하여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아가씨들 불러 달라는 콜을 대기하면서.
최 사장이 룸에 당도했을 때 권철 전무와 세 과장은 취해 있었다. 기분이 좋다면서 계속해서 원샷을 한 결과이다.
하지만 꾸며놓은 음모마저 망각한 것은 아니다.
최 사장이 룸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강 과장은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리곤 권 전무의 호기로운 발언이 이어졌다.
엉겁결에 계약서를 받아 든 최 사장이 내용을 살필 때 넷은 연기처럼 룸을 빠져나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최 사장은 고함을 질러 넷을 부르려다 멈춘다.
약간의 취기가 남아 있지만 계약서의 내용을 해독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당 1억 달러씩 30척이라는 구절을 보고는 아예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천천히 계약서를 살폈다.
그리고 얼마 후 사장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한다.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오시마조선소, 큰소리 뻥뻥 치며 약 올리더니 잘되었다. 하하! 하하하하!”
한편 밖에 있던 웨이터는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다.
안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일제히 빠져나가고 새로운 인물 하나가 들어왔다. 그런데 잠시 후 미친놈처럼 앙천광소를 터뜨리고 있으니 이상한 것이다.
웨이터는 먹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료를 더 불렀다.
새로 들어간 놈이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고 우길 때 잡아두기 위함이다.
최 사장은 몰랐다, 이게 수주 홍수의 시초였음을.
아폰테 사장으로부터 태백조선소의 신형 엔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CMA 오머런이 가장 먼저 전화를 한다.
그리곤 전 세계를 누비고 있는 오머런사의 선박 전체의 엔진 개조 작업 의뢰가 들어온다.
당연히 새로 건조할 배들에 대한 문의도 한다.
이날 이후, 태백조선소에는 전에 없던 새로운 기구가 만들어진다. 엔진 개조 및 신조 선박 수주 상담부가 그것이다.
이 부서의 책임자는 강전호 부장이다.
권철 전무의 예상과 달리 두 계급이나 특진한 것이다.
애석하게도 현수 근처에 머물면 이런 대박이 터진다는 걸 아직 아무도 모른다.
* * *
“우미내라고? 좋아, 알았어. 둘 중 아무나 하날 납치해.”
“네, 알겠습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강철환의 입가엔 괴소가 물려 있다.
“김현수! 네놈이 언제까지 버티는지 두고 보지. 크흐흐!”
강 예비역 대령은 현역 시절 데리고 있던 선진식 소령으로부터 노후를 편안하고 안락하게 보낼 수 있는 건을 소개받았다. 들어보니 이건 큰 건이다.
그냥 편안한 노후 정도가 아니가 재벌 부럽지 않은 여건을 갖출 수 있는 건이다.
본능적으로 사냥감의 크기를 가늠한 것이다.
접촉하여 기술을 달라 하였다. 기무사 출신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원하는 바를 쉽게 이루곤 했다.
그중엔 현재 내연 관계를 맺고 있는 여인도 있다.
혼인신고도 않고 같이 살고 있는 이 여인은 남편을 여의고 물려받은 사업체를 운영하던 과부이다.
골프 연습장에서 만나 자주 안면을 텄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인의 어려운 점을 해결해 주었다.
사업이 잠시 어려울 때 사채를 빌려 쓴 적이 있었다.
빌려 쓴 액수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여 받았던 어음을 할인하여 약속한 날짜에 모두 갚았다.
그런데 상대는 그날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우긴다. 그리곤 말도 안 되는 고리 이자를 복리로 붙여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실제로 사채업자 사장을 만나 돈을 준 것은 아니다. 밑에 있는 직원에게 주었는데 그 돈을 들고튀었다는 것이다.
물론 진위 여부는 파악할 수 없다.
아무튼 당장 돈을 갚던지 운영하는 회사를 통째로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남편이 죽고 난 뒤 여자 혼자 자식들 데리고 살면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많았다.
그걸 견뎌내고 기업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협박하는 사채업자와 그 일당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강철환은 수심 가득한 여자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었다. 그리곤 알아서 해결해 주겠다고 나섰다.
이틀 뒤, 여자는 모든 빚이 완전히 변제되었으며 그동안 착각하여 협박한 죄를 용서해 달라는 반성문을 받았다.
사채업자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권력 기무사를 등에 진 사내를 상대할 수는 없기에 받아낸 상환 확인서와 반성문이다.
현재 강철환은 이 여인과 같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재산을 야금야금 빼돌리는 중이다.
아무튼 강철환은 권력을 이용하여 온갖 일에 관여하였다. 하여 현재는 상당히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강철환은 선진식 소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속에서 돈 냄새를 맡았다. 몇 억, 또는 몇십 억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전화로 협박했다. 그런데 싸가지 없이 제 할 말만 한다. 아무리 현역을 떠났다 하더라도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하여 펄펄 끓는 분노를 삭이느라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 그동안 생각했던 바를 실천에 옮긴 것이다.
강철환이 부하에게 내린 명은 명확하다.
우미내 마을에 사는 현수의 부모님 가운데 하나를 납치하라는 것이다. 인질을 잡아놓으면 현수로선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 * *
“어, 형! 여기야!”
“그래.”
현수가 카페에 들어서자 이현우가 손을 번쩍 들며 환한 웃음을 짓는다.
“짜식! 잘 지냈지?”
“그럼. 형 덕분에 요즘 할아버지 뵙는 게 겁나지 않아.”
“왜?”
“평생 형이랑 진짜 친형제처럼 잘 지내라면서 어깨를 탁탁 두드려 주시거든.”
이현우가 흰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는다.
‘현우야, 너 이제 내 사촌 처남이야. 그러니 싫어도 평생 보고 살아야 해.’
현수는 웃음 지으며 현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앞으로 평생 잘 지내보자.”
“하하! 그래, 형! 자, 자리에 앉아. 근데 뭐 마실래?”
“흐음, 난 그냥 아메리카노 마실래.”
“알았어. 내가 가져올게.”
현우가 자리를 비운 새 현수는 문득 스치는 상념이 있었다.
‘커피는 미국이 본고장도 아니다. 근데 왜 아메리카노라 이름을 붙였지? 흐음, 이거 문제 있네. 좋아, 나중에 내 커피가 나오면 내가 이름을 붙이지. 코리아노로. 후후!’
농담처럼 생각했던 이 이름은 실제로 붙여진다.
현수의 원두를 받는 커피숍에선 현재 아메리카노라 불리는 메뉴의 이름이 전부 코리아노로 바뀐다.
그리고 그건 대세가 된다. 다시 말해 한국에선 아메리카노라 불리는 커피를 찾아보기 힘들게 된다는 뜻이다.
“자, 여기 있어.”
“그래, 고마워.”
“고맙긴, 뭘 이깟 걸로. 그나저나 형, 장가간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