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3
“일단 알겠습니다.”
현수는 분노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에도 누군가가 다가올 것이다. 통화 대기 시간도 길었고 이 검사와의 통화 시간도 제법 되었기 때문이다.
“블링크!”
현수의 신형이 공중전화 박스로부터 50여m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승용차가 다가온다.
끼이이익―!
텅! 텅!
다다다, 다다다다다!
예상대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춘다. 그리곤 사내 셋이 후다닥 공중전화 박스로 뛰어가고 있다.
“으으음!”
이번에 온 사내들은 조폭은 아닌 듯싶다. 그렇다면 검찰청 소속 수사관들일 것이다.
“공권력을 이런 데 쓰다니… 쯧쯧!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이경천 너, 두고 보자.”
현수는 나직이 혀를 차고는 물러났다. 차들이 씽씽 달리는 큰길 건너편이기에 수사관들은 현수를 보고도 의심하지 않는다.
* * *
“아, 어서 오시게!”
“네, 그동안 안녕하셨죠?”
현수를 반갑게 맞아준 사람은 백두화학 조인성 회장이다. 조경빈의 부친 되는 분이시다.
“김 전무를 만나려면 내가 가야 하는데 보다시피 무릎이 시원치 않아서……. 미안하네. 양해하시게.”
“아! 괜찮습니다. 경빈이 아버님이신데요. 아들 친구처럼 편히 대하셔도 됩니다.”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네.”
“네. 그런데 저를 만나자고 하셨다고요.”
“그렇다네. 전에 우리가 만났을 때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우리가 할 일을 찾아내면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랬지요. 뭔가 찾아내셨습니까?”
“그쪽에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만들고 싶네. 도와주시게.”
“흐음, 석유화학 제품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품목을 말씀하시는 거죠?”
“고밀도 폴리에틸렌, PVC, 아크릴 등 석유화학계 기초 화학 물질을 제조하고 싶네.”
“혹시 인건비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국내 기업에 비하면 콩고민주공화국의 인건비는 2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국내에서 한 명을 고용할 돈이면 현지에선 20명 이상을 고용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국내 기업의 상당수가 외국으로 공장을 이전한 바 있다. 그 결과 취업난이 가중되는 상황이다.
“국내 공장을 폐쇄할 생각은 없네. 그쪽에 생산 공장을 지어 아프리카 쪽을 공략해 보고 싶어서 그러네.”
“아, 네.”
콩고민주공화국은 아프리카 대륙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조 회장의 이런 구상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물론 생산된 제품을 실어 나를 교통망이 갖춰졌을 때의 이야기이다.
“제 도움이 없으면 설립이 어려운 건가요?”
“그렇다네. 콩고민주공화국 내무부 관리들과 접촉해 본 결과 외국 기업의 투자는 환영한다면서 내부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지 난색을 표한다고 하네.”
“그래요? 그럼 제가 한번 알아보죠. 어디에 얼마만 한 규모로 만들 건지 계획 잡은 걸 주시면 접촉해 보겠습니다.”
“고맙네. 잠깐만 기다리시게.”
삐이이잉―!
“네, 회장님!”
“김 비서, 콩고민주공화국 공장 신설 계획안 사본 한 부 만들어서 가져오게.”
“네, 회장님!”
비서실 직원과의 통신을 끝낸 조인성 회장은 새삼 현수를 바라보며 아깝다는 표정을 짓는다.
천지그룹이 아닌 백두그룹에 있었다면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었을지 알 수 없는 인재이기 때문이다.
한편, 현수는 백두화학의 도움 요청을 어찌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현수가 알기론 천지화학 역시 비슷한 계획을 잡고 있다. 하지만 도와줄 마음이 없다.
그렇다면 경쟁사인 백두화학을 밀어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이연서 회장도 이 건에 대해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래, 연희를 아프게 했으니까.’
현수는 마음을 정하곤 조 회장과 담소를 나누었다.
* * *
“여기예요, 지현 씨!”
“네, 현수 씨!”
서울중앙지검에 들러 면회 신청을 하니 권지현은 5분도 안 되어 튀어나온다.
“퇴근 시간 거의 다 돼서 데이트 신청하러 왔습니다.”
“어머, 그래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안에 가서 말씀드리고 나올게요.”
“그래요. 그동안 여기저기 둘러볼게요.”
“그러실래요?”
방문객 표찰을 목에 건 현수는 검찰청 청사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지현과의 데이트가 첫 번째 목적이라면 둘째는 이경천 검사를 보는 일이다. 국가의 녹을 먹는 검사가 조직폭력배들의 뒤를 봐주면서 대체 무엇을 얻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전에 온 기억을 더듬어 이경천 검사 방 근처로 움직인 현수는 놈이 나올 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엉뚱한 사람만 드나든다.
“어머! 혹시 김현수 전무님 아니세요?”
“네? 혹시 절 아시나요?”
생전 처음 보는 아가씨였기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요. 저 권지현 사무관님이랑 같은 사무실에 근무해요. 근데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아! 그렇구나. 데이트하러 오신 거죠? 히잉, 근데 어쩌죠? 권 사무관님 퇴근하려면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만나는 보신 거예요? 아님 제가 저희 사무실까지 모시고 갈까요?”
“아, 아뇨. 지현 씨는 봤어요. 그냥 구경하는 중이에요.”
“에이, 중앙지검에 구경할 게 뭐 있다고요. 전부 다 사무실뿐인데. 가요. 제가 커피 한 잔 뽑아드릴게요. 여기 자판기 커피가 아주 괜찮아요.”
“네?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치! 이번 크리스마스이브에 결혼하신다면서요? 그것 때문에 우리 지검 검사님들 전부 뿔났어요.”
여직원은 짐짓 입술을 삐죽인다. 마치 본인이 삐친 것처럼.
“왜죠?”
“왜긴 왜예요? 우리 중앙지검 여신을 잃게 되었으니 그런 거죠. 근데 결혼하시면 출근 못하게 하실 건가요?”
“네?”
“부자시잖아요. 사무관 월급 없어도 되구요.”
“아뇨. 지현 씨가 원하며 언제까지든 근무하게 할 거예요.”
“어머! 정말요? 권 사무관님이랑 친하게 지내서 결혼하고 안 나오시면 쓸쓸할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잘되었어요.”
시커먼 사내 녀석들이 득시글한 곳에 근무해서 그런지 여직원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둘은 자연스레 자판기 앞까지 이동했고, 여직원은 커피를 뽑아왔다. 현수는 이경천 검사가 보이는 방향에 자리 잡고는 여직원의 수다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줬다.
“…그래서 권 사무관님이…….”
뭔가 또 새로운 이야길 꺼내려 할 때 현수가 말을 잘랐다.
“근데 퇴근 시간 다 되면 윗사람들한테 결재 받고 뭐 이런 거 해야 하지 않나요?”
“아차! 정말 그러네요. 김 전무님, 오늘 정말 반가웠어요. 결혼식 날 봬요. 저는 바빠서 이만…….”
여태 수다를 떨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쪼르르 내뺀다.
“지현 씨도 이렇게 수다를 떨까?”
나직이 중얼거린 현수는 나머지 커피를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이경천 검사의 방문이 열린다.
뿔테 안경을 쓴 풍채 좋은 40대 후반의 사내다. 이 사내의 뒤를 따라 이경천 검사가 나오더니 고개를 숙인다.
“이브즈드랍!”
약 20m쯤 떨어져 있지만 엿듣기 마법을 구현시키니 둘의 대화가 들린다.
“살펴 가십시오, 선배님.”
“그래, 난 이 검사만 믿겠네.”
“그럼요.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래, 이따가 락희에서 만나세.”
“알겠습니다. 9시 반까지 가겠습니다.”
“그래.”
사내가 가자 이 검사는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간다.
‘이따가 락희엘 간다고? 잘됐네.’
다시 로비로 내려가니 지현이 두리번거리고 있다.
“화장실 다녀오신 거예요?”
“아니. 근데 왜?”
“금방 내려왔는데 현수 씨가 안 보여서요.”
“아, 그랬어? 미안. 한 30분쯤 있다 내려올 것 같아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녔어.”
“에구, 여기 볼 게 뭐 있다고요.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데.”
“그렇긴 하더군. 아무튼 이제 가도 되는 거야?”
“네. 저 맛있는 거 사주세요.”
“그래, 가지.”
지현을 데리고 나온 현수는 ‘토반’이라는 한정식 집으로 향했다. 웰빙 한식집으로 소문난 곳이라 한다.
“여기 대구탕 괜찮아요. 그거 어때요?”
“나는 뭐든 괜찮아. 그걸로 해.”
“네, 언니, 여기 대구탕 2인분이요.”
얼굴을 까도녀인데 하는 짓을 보면 털도아이다.
까도녀가 까탈스런 도시의 여자라는 뜻이라면, 털도아는 털털한 도시의 아낙네쯤 된다.
하여 피식 실소를 지었다.
“왜요? 제가 뭐 잘못했어요?”
“아니. 예쁘고 귀여워서.”
“치! 입술에 침도 안 바르시고.”
짐짓 삐친 척한다. 더 귀엽고 섹시해 보인다.
“흐음, 자꾸 귀여운 척하면 오늘도 집에 못 가는 수가 있는데. 뭐, 그래도 좋다면…….”
“쳇! 알았어요.”
지현은 얼른 정색하며 주위를 살핀다.
혹시 오늘도 집에 못 간다는 말을 누가 들었을까 싶은 모양이다. 이곳은 직장 근처이다.
누가 듣고 소문이라도 퍼뜨리면 결혼도 하기 전에 속도위반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7장 가을비 실드 아래에서
현수는 지현의 깜짝한 모습에 흐뭇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 그냥 헤어졌으면 나만 억울한 뻔했구나. 크크, 저 예쁜 여자가 내 거란 말이지?’
“그건 뭐예요? 웬 엉큼한 표정이죠?”
“으음, 이건 우리 지현이가 마음에 들어서야.”
“쳇! 느끼한 아저씨처럼 왜 이래요?”
말을 이렇게 하지만 지현도 기분 좋은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전에 아버님께 드렸던 그 서류들에 대한 내사는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혹시 알아?”
“서류요? 아, 그 조폭, 아니, 세정캐피탈 장부 말하는 거죠?”
“응. 뭔가 잡아내셨대?”
“그 얘긴 조금 있다가 해요.”
말을 하며 주위를 살피는 것으로 미루어 뭔가 있다 생각한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에 종업원이 다가와 대구탕을 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간다.
둘은 서로에게 더 큰 생선 토막을 올려주려 옥신각신하면서 즐거운 식사를 마쳤다. 그러는 내내 시선을 마주치며 자주 웃었다. 없던 정도 새록새록 솟아날 그런 식사였다.
식당에서 제공하는 원두커피를 들고 길 건너 새로 지은 교회 마당으로 들어섰다. 예배가 없는 시간이라 그런지 한적하다.
“여기 앉자.”
“네.”
잘 가꿔진 조경수들 사이에 놓인 벤치는 깊어가는 가을의 풍광을 즐기기에 좋았다.
수은등 불빛 아래로 보이는 나무 잎사귀의 빛도 오묘했다. 아직 완연한 단풍 계절은 아니지만 그렇게 보인다.
“여기 괜찮은데?”
“네, 좋네요.”
“춥지 않아?”
이렇게 말하며 현수는 슬쩍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지현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온다.
“고마워. 날 포기하지 않아서. 살면서 많이 사랑해 줄게.”
“네, 사랑해요.”
지현의 나직한 고백에 현수는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이렇게 오 분만 있자.”
“네.”
천천히 손에 든 커피를 마시며 둘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가을비가 오려나 보다.
“현수 씨, 비 와요.”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될까?”
“비 오잖아요. 옷 다 젖어요.”
“안 젖게 해줄게.”
“네?”
우산 없다는 걸 뻔히 알기에 한 반문이다.
“실드!”
현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의 막이 쳐진다. 그와 동시에 불어오던 바람이 차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