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5
“네, 사장님.”
“좋아요.”
전화를 끊어 주영에게 돌려주며 싱긋 웃었다.
“다 들었지?”
“사장이 좋긴 좋다. 뭐든 마음대로 해도 되니.”
“알았으면 얼른 퇴근해. 알았지?”
“너는?”
“난 누굴 좀 만나기로 했어 인터넷 검색이나 하다 나갈 테니 내 걱정은 마.”
“고맙다. 이 원수 꼭 갚아주마.”
“오냐. 죽을 때까지 갚아라.”
주영과 윤 비서가 퇴근한 후 현수는 인터넷으로 박인재 의원을 검색해 보았다.
“흐음, 친일재산환수법에 반대를 하셨다고?”
현수는 나직이 코웃음을 쳤다.
친일재산환수법은 17대 국회(2004년 5월 30일∼2008년 5월 29일) 때 상정된 법안이다.
일제시대 때 일본 놈의 앞잡이 짓을 한 놈들이 일본으로부터 얻은 토지 등을 토해내라는 법안이다.
전 국민의 97%가 찬성했던 이 법안에 현재의 여당인 한심당의 전신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 전원은 국회에 등원하지 않음으로써 입법을 막았다.
참고로 당시 야당인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그리고 민주노동당 소속의원들은 100% 찬성에 기표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수립된 이후 이처럼 극명한 결과를 빚어낸 법안은 없었다.
이로써 현재의 여당인 한심당은 친일파의 후손, 또는 친일 비호 세력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라는 것을 확실히 드러냈다.
현수는 계속해서 박이재의 프로필을 훑었다.
“흐음, 4대강 개발 사업은 찬성하셨네. 작년에 태풍 불어 홍수가 났을 땐 유럽으로 놀러 가셨다고? 그것도 마누라와 딸까지 데리고.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지?”
박인재에 관한 것들을 검색해 보니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국회의원으로 하루만 재직해도 월 120만 원씩 지급되는 연금법을 상정한 장본인이다.
지방에 있던 저축은행의 퇴출이 결정되자 피해를 입은 예금자와 후순위 채권자의 손해액 전액을 보상하는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세금으로 부실한 저축은행의 죄를 덮어주자는 뜻이다.
이밖에도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정신 나간 짓을 많이 했다. 그런데 현재 여당 사무총장이다.
이쯤 되면 여당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새끼가 그런 자리에 있으니 나라가 이 꼴이지. 쯧쯧!”
나직이 혀를 찬 현수는 컴퓨터를 꺼버렸다. 더 보았다간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시계를 보니 9시를 조금 넘었다. 이제 이경천이라는 놈이 락희에서 누군가를 만날 시간이 다 된 것이다.
사무실의 불은 일부러 끄지 않았다. 컴퓨터도 다시 켰다. 그리곤 포털사이트 아고라에 들어가 댓글을 남겼다.
부모가 이혼할 때 누가 아이를 돌봐야 하는지 의견을 묻는 폴에 남긴 것이다. 1번은 경제력은 있지만 돌볼 시간이 부족한 아빠이고, 2번은 경제력은 부족하지만 정성으로 아일 돌볼 엄마이다.
누가 만든 폴인지 참 구구절절 말들도 많다.
현수는 1번에 찬성한다는 글을 남겼다. 돈이 없어 고생한 것이 지긋지긋해서이다.
“자, 이제 슬슬 내려가 볼까? 인비저빌러티!”
투명화 마법을 구현시킨 후 계단을 딛고 지하까지 내려갔다.
락희는 여전히 성업 중이다. 벌써 거의 모든 룸에 손님이 들었는지 웨이터와 아가씨들이 분주히 오간다.
‘이렇게 해서 버는 돈이 전부 조폭들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이거지? 어쭈? 에라, 인간아!’
아홉 시 반도 안 되었는데 벌써 비틀거리는 사람이 있다. 보아하니 기업체 간부인 듯싶다. 초저녁부터 누군가로부터 접대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현수는 교묘히 움직이며 이경천 검사를 찾았다. 그런데 좀처럼 찾을 수 없다.
‘후배니까 분명 먼저 와 있을 텐데, 어디 있지?’
처음부터 모든 룸을 샅샅이 뒤졌지만 이 검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하여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때 눈에 익은 사람이 들어선다. 이경천 검사로부터 선배님 소리를 들었던 장본인이다.
입구에 들어서더니 웨이터에게 말을 건다. 잠시 귀를 기울이던 웨이터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앞장선다.
녀석들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조금 전에 살펴봤지만 평범한 회사원들이 술 마시는 룸으로 들어간다.
‘응? 거긴 없는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따라 들어갔다. 룸 안으로 들어간 웨이터는 화장실 문을 연다.
변기 외에 또 다른 문이 보인다.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이경천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서 오십시오, 선배님!”
“그래, 많이 기다렸나?”
“얼마 안 되었습니다. 기다리다 맥주 몇 잔 했을 뿐입니다.”
“그래? 조금만 기다리지.”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그냥 하는 말이야. 자, 앉지.”
“네, 선배님!”
웨이터가 얼른 허리를 숙이곤 밖으로 나간다.
룸 속에 룸을 감춰놨으니 밖에서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현수는 룸의 귀퉁이에 앉아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선배님, 이번엔 액수가 조금 더 커졌습니다.”
“그래, 알아. 감당할 수 있으니 보내라고 해.”
“액수가 커서 금감원에서 눈치챌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 번에 송금하는 액수가 300만 원 이상이면 금감원으로 자료가 넘어갑니다.”
“그보다 적은 금액으로 쪼개서 보내면 되잖아. 왜 이래, 선수끼리? 세정에 이야기하면 알아서 다 해줄 테니 자넨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게… 요즘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그럽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요.”
“전에도 그런 얘길 해서 자네 곁에 사람들을 배치했었잖아.”
“네, 그랬죠. 근데도 자꾸 그런 기분이 들어요. 지금도 누가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자, 보라고. 여기 누가 있어? 그리고 여긴 세정파가 마련해 놓은 밀실이야. 여기 종업원 아니면 알지 못해. 근데 누가 본다고. 자자, 괜히 움츠러들지 말고 술이나 한잔해.”
“…네.”
이경천 검사는 선배가 따라주는 양주를 받았다.
“참, 세정캐피탈 이중장부 건은 끝난 거지?”
“증거 불충분으로 인한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자료를 보냈다는 녀석으로부터 전화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발신지 추적을 했나?”
“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놈이 제 할 말만 하고 끊어서요. 한 가지 확실한 건 놈이 서초구에서 전화했다는 겁니다.”
“서초구가 어디 한두 평인가! 쯧!”
“네, 아무튼 끝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놈이 장부 원본을 가져오기 전에는요.”
“보아하니 경쟁 관계에 있는 놈들의 농간 아닐까? 그렇지 않고야 발신지 추적에 필요한 시간을 교묘히 이용하진 않을 거 아냐.”
“네, 저도 그렇게 추리하고 있습니다.”
“흐음, 누구지? 세정과 경쟁 상대라면 백곰캐피탈?”
“화이트 베어요? 그보다는 캐쉬모아가 아닐까 싶은데요?”
“화이트 베어는 삼합회 자본이고 캐쉬모아는 야쿠자 자본이야. 그들 중 토종 자본인 세정을 먹으려던 놈은 누구지?”
“저는 둘 다라고 생각합니다. 총장님께서 뒤를 봐주지 않으셨으면 둘 중 하나에게 먹혔을 겁니다. 세를 비교해 봐도 답이 나오는 거 아닙니까?”
이경천 검사는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 올리고는 양주잔을 비웠다. 그러자 선배가 술을 따라주며 입을 연다.
“그러니까 총장님께 대한 후원을 아끼지 말라고 전하게.”
“세정에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감시하는 눈이 많아 현재로선 그게 최선입니다. 잠잠해지면 알아서 인사한다고 했으니 총장님께 말씀 전해주십시오.”
“그러지. 그나저나 자네도 다음 번 총선에 놔와야지? 내가 총장님께 자네 이야기 많이 하네.”
“저는 선배님만 믿습니다. 잘 이끌어주시면 나중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자, 제 술 한잔 받으시죠.”
나머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경천은 더 높은 곳을 꿈꾸는 자였다. 문제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것을 택했다는 것이다.
대작하고 있는 자는 이경천의 대학 선배이다.
지난 번 총선에서 낙선했지만 여당 사무총장의 비서실장이다. 박인재를 대신하여 여러 업무를 총괄하는 일종의 집사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은 세정으로부터 보다 많은 돈을 뜯어내라는 사무총장의 지시를 받고 매개 역할을 하는 이 검사를 불러낸 것이다.
알고 보니 세정파엔 이 검사의 사촌이 있다.
이모의 아들이니 이종사촌인데 현재 유진기 밑에서 부두목 비슷한 노릇을 한다. 놈의 능력이 좋아 부두목인 게 아니라 이 검사의 사촌이라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서울 중앙지검에 세정캐피탈과 관련된 사건이 접수되면 지금껏 이 검사가 도맡아 처리했다. 그 결과는 물론 대부분 무혐의 내지는 기소유예 처분이었다. 확연하게 드러나 범죄 행위를 감출 수 없을 경우엔 최대한 낮은 구형을 내렸다.
어쨌거나 이 검사는 출세를 위해 검은 세력과 부패한 세력 두 군데에 선을 대고 있는 셈이다.
술잔이 오가는가 싶더니 아가씨들이 들어와 분위기가 질펀해진다. 현수는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모두 이뤘기에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냥 가기 섭섭하다. 하여 귀신 소동을 또 한 번 벌였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가게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중엔 아직 덜 취한 이 검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껏 내놓았던 술값은 당연히 못 받는다. 따라서 오늘 락희는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잠시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현수는 품속의 핸드폰을 껐다. 지금껏 녹음 애플리케이션을 구현시켜 놓았던 것이다.
“이 검사, 당신은 조만간 끝날 거야.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으면 거기에 합당한 청렴성과 능력을 갖췄어야지. 밀실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조폭 새끼들을 봐주면 안 되지.”
* * *
“흐음! 여긴 여전하군.”
현수가 바라보는 마타디 항은 여전히 분주하다.
“아! 안녕하세요? 이실리프 상사 통관 담당 최인주입니다.”
“네, 수고가 많네요. 근데 러시아에서 온 화물의 통관은 다 끝난 겁니까?”
“그렇습니다. 저기 있는 것들입니다.”
최인주가 가리킨 곳에는 이실리프 상사의 로고가 그려진 컨테이너들이 쌓여 있다.
체코산 부드바이저 맥주 200만 캔과 러시아 군화 6만 족, 그리고 팔턍카( )라 부르는 발싸개가 들어 있다.
이제 마타디 항엔 이실리프 상사의 직원이 상주한다. 거의 매일 엄청난 물량이 반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에탄 카구지 내무장관의 특명에 따라 이실리프 상사의 로고가 그려진 컨테이너는 무관세 통관이 된다.
아울러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항상 최우선 통관 대상이다.
요즘 마타디 항은 한국으로부터 보내온 각종 중장비로 몸살을 앓는 중이다.
불도저, 페이로더, 로그 마스터, 타이거 캣 등이다. 이밖에도 소형 트럭은 물론이고 25톤 덤프트럭도 들어온다.
뿐만이 아니다. 본격적인 개발을 위한 각종 기자재도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들어온다.
그러므로 상주 인원이 필요한 것이다.
“저기 저 컨테이너들은 하치장으로 가져가지 마세요.”
현수는 노트북을 꺼내 킨샤사 인근 공터를 알려주었다.
일전에 화영공사 왕영백이 수입했던 금괴와 마약이 든 컨테이너를 내려놓았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