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6
“알겠습니다. 금일 중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최인주를 뒤로하고 현수는 차를 몰아 킨샤사로 향했다.
8장 파고라 아래에서
“어째 이곳은 하나도 안 변해? 하긴 시간이 얼마 안 됐지. 참, 대한약품을 못 들렀네. 쉐리엔이 다 떨어질 텐데. 흐음, 아르센에도 다녀와야겠군.”
현수가 저택에 당도한 것은 꽤 시간이 흘러서이다.
딩동―!
입구의 벨을 누르니 화면에 알리사의 얼굴이 보인다.
“어머! 주인님 오셨어요?”
찌이잉―!
소리와 함께 정문이 열린다.
부우우웅―!
현관에 당도하자 알리사와 다른 하녀들, 그리고 경호팀 수석 팀장인 피터스 가가바 이외에도 연희와 이리냐, 그리고 그녀들의 두 모친이 나와 있다.
“주인님, 어서 오세요.”
“어서 오십시오, 보스!”
“자기야, 어서 와요.”
“덥지 않아요?”
모두 한마디씩 한다. 현수는 일일이 대꾸해 주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장모님, 절 받으십시오.”
“아이고, 절은 무슨…….”
연희의 모친인 강진숙은 손사래를 치며 소파에서 일어난다.
“연희를 제게 안 주실 거 아니면 절 받으세요. 처음 뵙는데 절도 안 드리면 예의가 아니지요.”
“그, 그래도…….”
“그래요, 엄마. 절 받으세요. 이제 곧 사위가 되잖아요.”
“그, 그래도…….”
“장모님, 절을 받으셔야 제가 사위가 됩니다. 그러니 편히 앉으세요.”
한국어로 대화하기에 셋만 알아듣지만 모두 웃는 낯이다. 어떤 상황인지 대강 짐작하기 때문이다.
“아이고, 내가 참…….”
강진숙 여사는 몹시 쑥스러워하면서도 양탄자 위에 앉는다.
자리를 잡자 두 손을 모으고는 정중히 큰절을 올린다.
“장모님, 연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끼고 아껴서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그리고 장모님도 잘 모시겠습니다.”
“아이구, 고마워요. 고마워. 흐흑!”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현수의 등을 토닥이던 강 여자가 기어코 눈물을 흘린다.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진 모양이다.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 친부는 나 몰라라 다른 여자와 결혼해 버린 뒤 낙심하여 죽고만 싶었다.
하지만 갓 태어난 아이를 어찌 놔두고 혼자 갈 수 있나!
하여 이를 악물고 거친 세파를 헤쳐 나왔다. 워낙 근본이 없었기에 자립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영특하면서도 부지런하고,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런 연희가 있었던 때문이다.
연희가 커서 회사에 입사한 후에야 조금씩 나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옛 남자의 부인이 나타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을 때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어렵게 취업한 딸이 직장을 잃는 꼴을 어찌 보나 싶었다. 다행히 현수가 있어 여기까지 왔다.
딸은 좋은 곳이라고 했지만 한국을 떠날 때는 후진국의 조악한 환경을 상상했다. 그래도 딸과 함께 마음 편히 머물 수 있는 집이 있다는 말을 한 가지 위안으로 삼았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이건 으리으리한 궁전이다. 쓰라고 내준 방은 아무리 작게 잡아도 실면적만 50평이 넘는다.
이 방엔 여러 개의 부속실이 딸려 있다.
자쿠지 딸린 대형 욕실은 기본이고, 드레스 룸과 파우더 룸, 그리고 생활용품을 보관하는 창고까지 있다.
가장 기분이 좋았던 것은 사람보다 약간 큰 성모마리아 상이 입구를 지켜주고 있는 기도실이다.
마음의 시름을 덜기 위해 열심히 다닌 성당이다.
이곳에도 성당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종교 생활을 할 수 있음이 마음에 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하녀들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해 준다. 삼시세끼 가만히 앉아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거대한 저택은 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이 특별히 파견한 경호원들에 의하여 24시간 경호된다고 한다.
후진국 복판에 있지만 더없이 안전한 장소인 것이다.
저택 내부를 둘러보던 중 창고의 문을 열게 되었다. 그 안은 한국의 거의 모든 종류의 생활용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연희가 안내한 다른 창고를 열어보니 화장품이 지천이다. 돈으로만 따져도 족히 수천만 원 어치가 진열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창고엔 의복과 신발이 종류별로 가득하다.
주방 창고엔 신선한 고기와 생선이 잔뜩 들어 있고, 채소와 과일도 널려 있다.
연희는 현수가 상당히 많은 돈을 버는 부자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천지건설에서 이룩한 일들을 설명했다. 아울러 이실리프 무역상사와 천지약품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강진숙 여사가 놀라 자빠질 뻔한 이야기는 넓이 1,825㎢인 제주도의 거의 두 배나 되는 거대한 농장과 그보다 약간 작은 농장 두 곳이 개발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해 연희는 두 곳이 향후 200년간 치외법권 지역이므로 현수가 왕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그런 현수와 결혼을 하니 자신은 왕비가 되는 셈이라 하였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온 강 여사가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이만한 저택을 가진 게 결코 이상하지 않다 생각한 것이다.
아무튼 그런 대단한 사위가 공손히 절을 했다. 하여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눈물을 흘린 것이다.
“아이 참, 엄마는. 사위를 보는데 왜 우셔?”
“흐흐, 그러게 말이다. 좋아서 그래. 우리 연희가 벌써 시집갈 만큼 커서. 그리고 이런 사위를 얻을 수 있어서. 고맙네.”
“장모님, 이 집에 머무시는 동안 무엇이든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그래, 그러겠네. 고맙네, 고마워.”
강 여사는 현수의 손을 잡고 또 눈물을 흘렸다.
“자, 인사 시간은 이제 끝! 배고프니 점심 먹으러 가요.”
연희가 짐짓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는 순간 누군가의 뱃속에서 쪼르륵거리는 소리가 난다.
“하하! 하하하하!”
“호호호호! 호호호!”
한바탕 웃음 짓고는 모두 식당으로 갔다.
유럽식 긴 탁자에는 스무 개의 의자가 있다.
연희의 제안에 따란 현수 좌우에 두 여인이 앉고, 맞은편엔 장모님들이 앉았다.
서로의 언어를 모르기에 둘은 대화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랭귀지 트랜스레이션!”
현수는 통역 마법을 걸어주었다. 물론 알리사 등은 모른다.
“두 분, 이제 대화가 통하실 거예요.”
“정말? 사돈, 참 사돈은 아닌가? 미세스 안나, 내 말 알아들어요?”
“네, 우리말 참 잘하시네요. 근데 왜 지금껏 말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답답했는지 알아요?”
“응? 난 지금 한국말로 하는 건데?”
[연희, 이리냐, 두 분께 내가 마법사라는 거 말씀드려도 돼.]
둘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동안 전음을 보내자 연희와 이리냐가 귓속말로 설명한다.
둘은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마법사라니, 믿을 수 없다.
세상에 마법이란 게 진짜 있다고 생각해 본 적조차 없다.
애들 보는 이야기책, 또는 영화 속에나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실로 다가오니 놀란 것이다.
“두 분 장모님, 저 사악한 마법사 아닙니다. 그러니 마음 놓으셔도 돼요.”
현수가 싱긋 미소 짓자 그제야 안심한 듯하다.
“그나저나 한국식 음식도 먹고 싶은데 내가 음식을 만들어도 되나?”
“그럼요.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아주 특별한 거 아니면 거의 다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 그래? 알겠네. 나중에 목록으로 만들어주지.”
“하하! 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친 현수는 두 분 장모님이 혹시 불편함이 없을까 세세히 보살폈다.
그리곤 중년 여인들에게 필요한 여러 물품들을 꺼내 놓았다.
다음은 건강 챙기기이다.
강진숙 여사는 어렵게 사느라 본인의 건강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힘든 일도 많이 했다.
하여 나이보다 퇴행성 질환이 일찍 온 듯하다.
노안도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고, 신장 및 간장 등 장기들도 정상이 아니다. 이것들은 회복 포션 한 병과 리커버리 마법 한 방에 모조리 사라졌다.
지현의 부모님이 그러했듯 20년 정도의 세월을 거스르는 몸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리냐의 모친 안나 게라시모바 체홉은 더했다.
한국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버틴 결과이다. 관절염도 진행 중이고 류머티즘도 시작되어 있었다. 백내장도 있었으며, 엄지발톱은 내향성 조갑증8)이 있어 보행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회복 포션 한 병과 리커버리 한 방으로 끝냈다.
두 분 모두 이제부터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을 것이며, 세심한 관리 속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에 따라 차츰 젊음을 되찾아가게 될 것이다.
모든 일을 마친 현수는 연희와 이리냐를 데리고 저택을 거닐었다. 그러면서 서울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권지현과의 일이 순조롭게 매듭지어져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서울에서 결혼을 하고 나면 다음날 이곳에서 합동결혼식을 하겠다고 했다.
콩고민주공화국과 러시아 시민권 모두를 가졌기에 현수는 연희를 콩고민주공화국의 아내로 맞이하고, 이리냐는 러시아에서의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했다. 둘은 같이 살기만 하면 그깟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며 환히 웃는다.
아폰네 사장으로부터 받은 선물도 이야기했다. 자가용 제트 비행기와 융프라우 별장 단지를 갖게 되었다는 말에 상당히 기뻐한다.
결혼식 소식을 전해들은 두 분 장모는 뛸 듯이 기뻐한다. 정식 아내가 되는 것과 동거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다녀오면 이리냐는 모스크바로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나머지 학기를 마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안나도 동행한다. 그렇게 되면 이곳은 온전히 연희 차지가 될 것이다.
한편, 피터스 가가바는 보스인 현수가 세 명의 아내를 얻게 된다는 것을 누설했다.
“이보게, 미스터 킴! 크리스마스에 결혼한다며?”
“아!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부하가 피터스 가가바와 통화하다 알게 되었네. 축하하네, 축하해! 결혼식에 꼭 부르게.”
“하하! 네, 물론입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짧은 통화를 마친 현수는 피터스 가가바를 불렀다.
“미스터 가가바!”
“네, 보스!”
“가가바의 보스는 나야, 아니면 내무장관님이야?”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가가바는 찍소리 않고 본인의 과오를 시인했다.
“이 저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오늘부터 대외비야. 무슨 뜻인지 알지?”
“알겠습니다. 부하들에게도 주의를 주겠습니다.”
“좋아, 난 미스터 가가바를 내 사람이라고 생각해.”
“압니다. 그래서 더 죄송합니다.”
가가바는 고개를 떨구었다.
대통령 경호실 소속 요원으로 근무하면서 받는 급여는 월 12만 원 정도이다. 경찰보다는 20% 정도 더 받는 금액이다.
이곳에 배치되고 한 달이 지났을 때 가가바는 감격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현수가 자신은 물론이고 저택에 배속된 경호원 전체의 집에 선물을 보낸 때문이다.
선물은 깨끗한 식수를 얻을 수 있는 우물이다.
피터스 가가바를 비롯한 경호원들의 이름으로 사는 마을마다 하나씩 만들어준 것이다.
게다가 봉투 하나씩을 남겼다. 그 안엔 한 달간의 노고를 감사하는 뜻으로 돈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매달 같은 금액이 급여로 주어진다는 내용의 쪽지도 들어 있었다.
한국 돈으로 치면 50만 원씩이다. 넉 달치 급여가 넘는 어마어마한 액수이다. 가가바를 비롯한 팀장 셋은 50만 원이고 나머지 경호원들은 40만 원씩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