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0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현수는 화들짝 놀랐다. 생기가 없던 그것으로부터 음성이 들린 때문이다.
“크흐흐! 웬일이란 말인가? 지난 20년간 아무도 오지 않던 이곳에 싱싱한 놈이 떨어졌군. 게다가 인간이라……. 크흐흐!”
“누구냐? 그리고 여긴 어디냐?”
“크흐흐흐! 어린놈의 말끝이 짧군. 크흐흐! 오늘 드디어 내 오랜 염원이 이루어지겠구나. 크흐흐흐!”
“…뭐야, 이건?”
먼지가 가라앉고 드러난 형상을 본 현수는 또 한 번 놀랐다.
“설마… 리치……?”
언데드의 왕이라 불리는 리치는 주로 네크로맨서 계열 마법사가 영생을 얻기 위해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어 만들어진다.
최하 8서클 이상의 성취가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6백 년 이상을 살았던 멀린조차 본 적이 없다고 회고록에 기술해 놓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리치가 서 있다.
“나 위대하신 마법사 아무리안 델로 폰 타지로칸을 만났으니 경배하라. 크흐흐흐! 오! 그러고 보니 네 녀석도 마법사이군. 그것도 8서클? 크흐흐! 오늘 내가 호강을 하는구나.”
현수는 리치의 화후를 가늠하지 못했다. 반면 리치는 단번에 8서클임을 알아냈다. 최하 9서클 이상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전력을 다해야 상대할 수 있다. 하여 잔뜩 긴장한 채 노려보았다.
“보아하니 세상에 오래 머문 존재 같구려.”
“크흐흐! 그럼, 그럼! 이 땅속에 머문 것만 벌써 800년! 지긋지긋한 세월을 살았지. 아! 지겹도록 공허하고 허무한 이 지하……. 리치가 된 이후 단 한 번의 햇볕도 받지 못했다.”
책에 쓰여 있는 대로 햇살을 받으면 스러지는 모양이다.
현수가 이런 생각을 할 때 리치의 말이 이어진다.
“크흐흐! 그런데 네 녀석 덕분에 이젠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구나. 크흐흐! 고맙다, 마나 덩어리야.”
켈레모라니의 비늘을 느끼기라도 한 듯 리치는 심호흡을 하는 몸짓을 한다.
“나를 어찌할 것이냐?”
현수는 짐짓 두려워하는 척했다.
“크흐흐! 네놈의 선혈을 뽑아 위대하신 나 아무리안 델로 폰 타지로칸이 직접 창안하신 흠향10)의 진을 완성시킬 것이다.”
“……?”
흠향의 진이란 것은 현수가 본 마법서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위대하신 마신께서는 이에 응답하사 내게 네놈을 줄 것이고, 나는 햇살 아래 영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날 죽이고 내 몸을 차지하겠다는 뜻이냐?”
“크흐흐! 아니지. 내가 필요한 건 너의 신선한 육체. 그러니 너의 혼백은 마신에게 바치겠다는 뜻이다.”
10장 카트린느를 찾으려다
리치는 보면 볼수록 현수의 몸이 마음에 든다. 풍부하다 못해 넘쳐나는 마나가 어딘가에 꽁꽁 숨어 있다.
게다가 8서클 마법사이다.
제때에 몸을 차지한다면 처음부터 다시 마나 링을 생성시키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8서클 마법사만 되어도 세상을 호령할 것이니 이제 나가기만 하면 지배자가 될 수 있다. 그럼 남은 것은 영원토록 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몹시 흡족한 듯 현수를 바라본다.
이를 가만히 당해줄 수는 없지 않은가!
현수는 최근 익힌 용언 마법 중 하나를 떠올렸다.
“홀리 블레이드!”
말을 마침과 동시에 허연 빛무리가 리치에게 쏘아져 간다. 쇠창살 밖에서 구현된 것이다.
“헉! 이건? 신관이었더냐? 블링크!”
리치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런 괘씸한 놈! 감히 내게! 데스 브레스!”
리치의 입에서 뿜어진 거무스레한 안개 비슷한 것이 쇠창살 사이로 스며든다. 쇠창살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직감이 든다.
현수의 이런 직감은 정확했다.
리치가 뿜어낸 데스 브레스는 9서클에 이른 네크로맨서 마법의 정화가 담겨 있다. 하여 드래곤의 브래스에 버금가는 재앙을 주는 위력이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데스 브레스를 만나는 순간 혼을 잃게 된다. 육체는 상하지 않지만 혼이 떠나게 만드는 것이다. 아무튼 현수는 황급히 마법을 구현시켰다.
“앱솔루트 배리어!”
마법이 시전되는 바로 그 순간 또 하나의 앱솔루트 배리어가 현수의 전신을 감싼다. 그리고 그 속으로 또 하나의 완전한 배리어가 온몸을 휘감는다.
처음의 것은 현수가 시전한 것이고, 두 번째는 전능의 팔찌가 작동시킨 것이다. 마지막은 켈레모라니의 비늘이 위기감을 감지하고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현수는 아주 강력한 마나의 벽으로 세 겹이나 감싸진 것이다.
거무스레한 안개는 현수의 신형을 감싼 채 머물렀다. 시야가 가려진 바로 그 순간 현수는 다른 마법을 준비했다.
한편, 리치는 데스 브레스가 사라지고 나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현수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곧바로 쇠창살을 올리고 흠향의 진 위에 현수를 올려놓아 마신께 현수의 혼백을 올린다.
혼이 육체를 떠나는 바로 그 순간 영혼 전이 마법을 구현하면 싱싱한 육체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면 강렬한 햇살에도 끄떡없는 몸이 된다. 그렇기에 기대에 찬 표정으로 데스 브레스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약 3분 후, 현수의 신형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크흐흐흐! 크흐흐흐!”
예상대로 현수가 바닥에 쓰러져 있자 리치는 회심에 찬 괴소를 터뜨리며 다가선다.
그리곤 쇠창살들이 위로 올라가게 하는 스위치를 건드린다. 흠향의 진 위에 올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스르르르릉―!
어른 팔목 굵기의 쇠창살은 단단하기로 이름난 오리하르콘과 아다만티움이 상당히 많이 섞여 있다.
현수가 만일 아공간에 담겨 있는 많은 보검 중 하나를 꺼내 검강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이것들을 베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계의 마족조차 가둘 수 있도록 온갖 마법진으로 도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리치는 쇠창살을 올리지 않고 계속해서 데스 브레스 같은 마법을 난사했을 것이다.
이럴 경우 현수가 불리하다. 켈레모라니의 비늘이 있지만 리치 역시 그만한 마나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멀린조차 존재를 모르는 이 마법사는 인간으로 700년 가까이 살았다. 그리고 늙어 죽으려던 때에 리치가 되었다. 이후 800년을 이곳에서 머물렀다.
무려 1,500년이나 저승 구경을 못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존재가 현수를 가둬놓고 계속 공격한다면 끝까지 버틴다는 보장이 없다.
어쨌거나 현수는 데스 브레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세 겹의 앱솔루트 배리어가 보호한 때문이다.
데스 브레스의 농도가 너무 짙었기에 리치는 현수가 피해 입지 않았다는 것을 모른다. 그렇기에 마음 놓고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데스 브레스의 위력을 과신한 결과이다.
바닥에 엎어지기 전 현수는 아공간에서 검 하나를 꺼냈다. 그리곤 재빨리 스트렝스와 헤이스트 마법을 걸었다.
그리곤 언제든 검강을 뿜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까이 와라.’
“크흐흐! 흠향의 진이 발동하려면 마나석이 필요하지. 자, 여기. 크흐흐, 이제 이놈만 옮기면…….”
“이놈! 받아랏!”
지이이잉―! 쒜에엑―!
“으읏! 이놈이… 커헉―!”
현수의 느닷없는 공격에 리치의 목이 동체에서 떨어진다. 그 순간 현수의 입술이 달싹인다.
“아공간 오픈! 입고!”
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으로 떨어지던 리치의 머리 부분이 아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아공간 클로즈!”
리치의 머리를 받아들인 아공간이 닫혔다.
현수의 이런 행위는 목을 벤다 하여 리치가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서둘러서 라이프 베슬을 찾아야 해.”
아직 바닥에 쓰러져 있는 리치의 동체는 사라진 머리 때문인지 부르르 떨고 있을 뿐이다.
라이프 베슬이 파괴되지 않는 한 베어도 재구성이 될 것이다. 물론 현수의 아공간에 담긴 머리가 없으니 동체만 일어날 것이다.
그리곤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할 것이다. 머리는 없지만 몸의 예민한 감각만으로도 무시무시할 것이다.
현수는 안광을 빛내며 어두컴컴한 통로로 뛰어들었다.
“라이트! 메가 라이트!”
마법이 구현되자 어두웠던 공간이 환히 드러난다. 사방을 재빨리 살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것저것 너무 많은 물건이 있다는 것이다. 선반, 또는 시렁11)마다 온갖 잡다한 것들이 놓여 있다.
그런데 너무나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도둑들은 현관만 열어보고 들어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한다. 만일 신발이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으면 포기하고 다른 집으로 간다.
어딘가에 재물을 감춰놓았을 경우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도둑이 들었다는 증거가 쉽게 남기 때문이다.
라이프 베슬은 리치의 생명줄이다. 그렇기에 어딘가 아주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현수는 눈에 불을 켜고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쓰러졌던 동체가 일어섰다. 사라진 머리를 찾는지 한동안 빙글빙글 돈다.
3분 후, 머리 찾기를 포기한 리치의 몸이 통로를 따라 이동한다. 안쪽에 넓은 공간이 있는지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은 좁고 긴 통로이다. 높이도 높지 않기에 플라이 마법으로 놈을 따돌리는 것이 쉽지 않을 듯하다.
두 팔을 벌려 사방으로 휘두르며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으으음! 안 되겠군.”
현수는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지이이이잉―!
굵고 선명한 검강이 형성된다. 그와 동시에 리치의 몸이 현수 쪽으로 향한다. 예상대로 신체의 감각이 몹시 예민하다.
현수를 확인했는지 동체의 속도가 빨라진다.
“야아압!”
쉐에엑! 퍼어억!
아무리 리치라곤 하지만 마법사일 뿐이다. 육체적인 능력은 소드 마스터가 월등할 수밖에 없다.
휘둘러진 검강에 격중당한 리치의 동체가 나가떨어진다.
우당탕탕탕―! 와르르르! 와장창창―!
쓰러지면서 선반을 건드리자 정돈되어 있던 것들이 쏟아진다. 방금 전의 공격은 놈의 어깨를 노렸다.
하여 한쪽 팔이 떨어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쪽 손으로 땅을 짚으려는 몸짓을 한다. 없는 손으로 어찌 짚을 수 있겠는가! 몇 번 엎어지더니 다른 손으로 짚고 일어선다.
잠시 후, 떨어졌던 어깨에 다시 팔이 붙는다.
“제기랄!”
현수는 나직이 투덜거렸다. 팔이나 다리를 자를 때마다 아공간에 담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래 놓으면 리치가 아공간 속에 머물게 된다.
안에 담긴 것들을 모두 파괴할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도 머리 부분이 다른 것들을 씹어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리치의 동체는 현수가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 가늠하는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빨리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라이프 베슬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거의 세 시간에 걸쳐 수색한 끝에 현수는 가장 안쪽의 공간에 당도하게 되었다. 사방은 서가로 이루어져 있고, 마법서 등이 즐비하게 꽂혀 있다.
“흐음, 어디에 감췄지? 으읏! 또 왔어? 야아압!”
쒜에엑! 퍼억!
와당탕탕!
놈의 팔과 다리는 베어도 베어도 다시 붙는다. 지난 세 시간 동안 60번도 넘게 베었다. 평균 3분에 한 번 꼴이다.
“으이, 지겨운 놈! 좋아, 와라! 원 없이 베어보자!”
현수가 소리치자 막 일어선 동체가 달려든다. 머리가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몸만으로는 마법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 그랬다면 지금쯤 9서클 마법을 수없이 난사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