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1
아니라면 어딘가에 감춰둔 좀비, 스켈레톤, 구울, 데스 나이트, 듀라한 같은 언데드들을 총동원하여 공격했을 것이다.
쒜에에엑! 퍼어억―!
와장창! 쿵! 와당탕탕!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튕겨져 나간 리치의 동체가 또 나뒹굴다 일어선다. 머리만 없을 뿐 여전히 멀쩡하다.
“하여간 저놈의 몸은…….”
하도 달려들어서 난도질했다. 거의 100여 조각으로 잘라낸 것이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다음엔 화염계 마법으로 태워보았다. 그래도 소용없다. 동체 자체에 항화염 마법진이라도 걸어놓았는지 불이 붙지 않는다.
얼려도 보고 번개를 쏘기도 했으나 모두 소용없다. 머리까지 온전히 있었다면 엄청난 고전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현수는 가까이 다가선 동체를 발길질로 밀어냈다. 차서 쓰러뜨린 게 아니라 멀찌감치 가도록 민 것이다.
쿵! 와당탕탕! 와르르르르르!
이번엔 서가에 부딪쳤다. 그러자 꽂혀 있던 책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순식간에 리치의 동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잠시의 시간을 벌었다 생각한 현수는 아직 살피지 않은 부분으로 예리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라이프 베슬은 보이지 않는다.
와르르르―!
삐이꺽―! 와창창창!
지금까지 듣던 소리와 달라 시선을 돌리니 리치의 동체가 일어서면서 서가의 선반을 잡아당긴다.
그런데 너무 오래돼서 그런지 선반이 떨어져 나간다. 그와 동시에 서가가 앞으로 엎어진다.
와르르르! 콰아앙―!
리치의 동체는 서가 아래에 깔려 버렸다. 조금 웃긴다는 생각을 하며 입가를 실룩이던 현수의 눈에 뭔가가 뜨인다.
서가가 완전히 가리고 있던 벽에 시뻘건 무언가가 일렁이는 수정구가 보인 것이다.
“저거다!”
얼른 다가가 수정구를 뽑아냈다. 리치가 서가를 엎지 않았으면 백 년을 뒤져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머리가 없어서 어처구니없게도 스스로 라이프 베슬을 헌납한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으음, 넌 좀 엎어져 있어.”
현수는 엎어진 서가 앞에 있는 서가를 밀어서 쓰러뜨렸다.
와르르르르! 콰아앙―!
엎친 데 덮치게 해놓은 이유는 라이프 베슬을 어떻게 파괴해야 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함이다.
“아공간 오픈! 이실리프여, 열려라! 아차!”
아공간이 열리고 이실리프 마법서가 열리던 순간 현수는 당혹성을 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리치의 머리가 튀어나온 것이다.
“내 몸! 내 몸은 어디에 있지?”
리치의 머리가 동체는 찾는 동안 현수는 재빨리 최초의 장소로 되돌아갔다. 리치와의 대결은 넓은 곳보다는 좁은 곳이 더 유리함을 깨달은 때문이다.
“어서, 어서! 라이프, 라이프 베슬 파괴 방법! 아이, 어디에 있지? 분명히 전에 봤는데.”
멀린이 남긴 이실리프 마법서엔 리치를 만났을 경우를 대비한 내용이 있다. 그런데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 하더니 전에는 다른 걸 읽으려면 잘도 튀어나오던 것이 보이지 않는다.
“아! 여기 있다.”
현수가 막 읽으려는 찰나 온전해진 리치의 음산한 음성이 들린다.
“거기까지! 내 소중한 레어를 어지럽히고 지금껏 내 몸에 별짓을 다 했겠다? 죽엇! 데스 브레스!”
또 9서클 궁극 마법이 시전된다.
“앱솔루트 배리어.”
이번에도 배리어로 일단 막았다. 물론 세 겹이 만들어진다. 그리는 동안 재빨리 이실리프 마법서의 내용을 훑었다.
이때 리치의 또 다른 공격이 쇄도한다.
“데스 스트라이크! 데스 커터! 데스 파이어!”
휘유우우웅! 쒜에에엥! 슈아아아악!
퍼엉! 파파파팍! 탱탱! 화르르르!
분노가 극에 달했는지 온갖 마법을 다 구사한다. 하지만 세 겹의 앱솔루트 배리어는 이 모든 것을 다 막아냈다.
그러는 사이 데스 브레스가 소멸되었다.
리치의 뻥 뚫린 눈 부분에서 시뻘건 불빛이 일렁인다. 분노를 표현하는 방법인 듯싶다.
그러던 어느 순간 멈칫거린다. 현수의 손에 들린 라이프 베슬을 본 것이다.
“그, 그건? 네 이놈, 당장 내놓아라!”
“흥! 어림도 없는 수작! 간악한 네놈은 이 세상에서 소멸하는 것이 정답이다!”
“아, 안 돼!”
리치가 다급성을 낸다. 라이프 베슬을 바닥에 패대기치려는 현수의 동작 때문이다.
“하나만 묻자. 오늘 이곳으로 여인 하나가 왔었나?”
“아, 아니다. 네가 처음이야. 20년 만에 처음 들어온 생명체가 바로 너야. 그리고 그건 이리 다오. 네가 무엇을 원하든 소원을 들어줄 테니 어서.”
“흥! 웃기는 소리 하자 마라! 자아, 이제 가랏!”
현수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라이프 베슬인 수정구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소드 마스터가 가진 근력 전부를 동원했다.
안 그러면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같은 순간 리치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낸다.
“꺄아아악! 안 돼!”
전력을 다해 달려든다. 현수의 힘이 약하면 수정구는 깨지지 않는다. 그 즉시 라이프 베슬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리치의 기대는 깨졌다.
퍼어억―!
수정구가 깨짐과 동시에 작은 불꽃같은 것이 허공으로 솟는다. 리치가 수정구에 봉인한 생명력이다. 언젠가 새로운 육체를 얻으면 그 육체에 담으려 보관한 것이다.
“사악한 것은 사라져라. 플라즈마 볼!”
현수의 손에서 이글거리는 열구가 생성되더니 작은 불꽃 모양의 생명력을 태워 버린다.
그와 동시에 리치의 몸이 화염에 휩싸인다. 검강으로 분리시켜도 다시 붙던 몸이 이번엔 사라진 것이다.
“휴우! 끝났군. 참 지독한 놈이었어.”
이마에 솟은 식은땀을 닦아낸 현수는 이실리프 마법서의 나머지 부분도 세심히 읽었다. 혹시 부활할까 싶었던 것이다.
“흐음! 이제 전리품을 챙겨볼까?”
현수는 곳곳에 비장되어 있는 여러 가지를 챙겼다.
회복 포션도 있지만 마나 포션도 상당히 많았다. 9서클 네크로맨서 마법사가 제조한 것인지라 순도가 높아 보였다.
마법서들도 상당히 많았지만 일부만 남기고 모두 태워 버렸다. 세상에 남겨봐야 좋은 꼴 못 볼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가 아공간에 갈무리한 리치의 마법서는 모두 생명 연장과 관련된 것이다. 친가와 처가 부모, 그리고 배우자들이 훨씬 먼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통로의 끝에 당도한 현수는 마지막으로 안쪽을 살펴보았다. 거의 폐허 수준이다. 누가 와도 건질 건 별로 없다.
“좋아, 이제 나간다. 마법진 가동!”
스르르르릉―!
“흐으음!”
지하의 텁텁한 공기가 아닌 신선한 공기가 느껴진다. 마법진이 그려져 있던 바위 위로 공간 이동한 것이다.
“이 마법진은 쓸모가 있겠네.”
현수는 바위에 새겨진 마법진을 지웠다. 평범한 바위가 되게 한 것이다.
“그나저나 카트린느는 어디로 간 거지?”
본래의 목적을 잊지 않았기에 현수는 조금 더 수색했다. 하지만 소득이 없어 야영지로 되돌아갔다.
“어딜 갔다 이제 와? 설마 밤새 수색한 거야?”
“그래.”
“근데 자네에게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이건 리치의……? 설마 리치를 만났나?”
라세안이 눈빛을 빛낸다. 이실직고하라는 뜻이다.
“그래, 카트린느를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아무리안 델로 폰 타지로칸이라는 놈을 만났어.”
“아무리안 델로 폰 타지로칸? 설마……?”
“그래, 네크로맨서 리치야.”
“그놈이 아직도 세상에 있어?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천신만고 끝에 놈을 제압하고 라이프 베슬을 깨버렸어. 생명력은 플라즈마 볼로 태워 버렸고. 그랬더니 몸에 불이 붙어 한 줌 재가 되더군.”
“순순히 당해줄 리는 없는데?”
“몇 시간 동안 놈과 사투를 벌였지. 그러다 라이프 베슬을 찾아서 깬 거야. 그나저나 카트린느는?”
“아직 안 왔어.”
라세안은 대답을 하며 진위를 살핀다.
‘무서운 놈! 9서클 리치면 인간 9서클 마법사보다 훨씬 센데 그런 놈을 제압했다고? 놈의 데스 브레스는 앱솔루트 배리어로도 막아내기 힘든데, 대체 어떻게 상대했지?’
라세안은 현수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진짜 몇 시간 동안 혈전을 벌였는지 흐트러져 있다.
‘하긴 10서클이었으니 9서클 리치를 제압했겠지.’
라세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렸다. 동이 트고 있었던 것이다.
“라세안, 카트린느를 두고 그냥 갈 수 없어. 그러니 영역을 나눠서 수색하자.”
“그, 그래. 난 이쪽을 맡을게.”
“좋아. 참, 길잡이.”
“네, 마탑주님!”
밤새 따뜻한 침낭 속에서 숙면을 취한 길잡이는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자넨 이곳에 남는다. 무슨 일 있으면 이걸 힘껏 불게.”
아공간에서 호각 하나를 꺼내주었다.
“스스로를 지킬 능력은 있지?”
“걱정 마십시오. 혼자 있어도 제 한 몸 건사할 수는 있습니다.”
“좋아. 그럼 이만… 플라이!”
현수의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는가 싶더니 새벽안개가 스러지는 숲을 향해 쾌속 질주한다.
“흐음, 그렇다면 나도. 플라이!”
라세안 역시 사라졌다. 길잡이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두 마법사를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흐음, 여기도 없다면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야영지로부터 무려 5㎞나 떨어진 곳까지 샅샅이 뒤졌다. 그럼에도 카트린느의 종적은 묘연하다.
현수는 갔던 길을 되짚어 야영지로 향하면서도 수색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없다.
“찾았나?”
“누군가에 의해 납치당한 듯싶어.”
“납치?”
라세안의 말에 현수가 안광을 빛낸다.
“그래. 남아 있는 마나의 향기를 보니 골드 일족인 듯하다.”
“골드 드래곤이 왜 카트린느를……? 골드라면 드래곤 중에 가장 지혜롭다는 종족이 아닌가?”
“그래, 자칭 가장 지혜로운 일족이지. 게다가 자뻑이 엄청 심하고, 근거 없는 우월감을 느끼며 사는 녀석들이지.”
“그런 골드 드래곤이 왜 카트린느를 납치했다는 거야?”
“그건 나도 모르지.”
“혹시 이 산맥 안에 산다는 드래곤이 골드 일족인가?”
“아마 그럴걸. 마주친 적이 없어서 정확히 누군지는 몰라. 다만 상당히 골치 아픈 존재라고 소문나 있을 뿐이야.”
“흐으음!”
현수는 라이세뮤리안처럼 골드 드래곤이 새끼를 낳아줄 모체로 카트린느를 납치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여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은 때문이다.
라세안은 잠시 잠자코 있었다.
“이봐, 머피라고 했나?”
“네, 마탑주님!”
길잡이 머피는 깊숙이 허리 숙이며 대답한다. 머피 역시 아드리안 공국 사람 중 하나이다. 이실리프 마탑주가 어떤 존재인지 어려서부터 들어왔기에 극고의 공경을 보이는 것이다.
“나이젤의 지배자가 어디에 둥지를 틀었는지 아나?”
“네? 설마 위대한 존재의 레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어디에 있는지 아나?”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 근처는 피해서 가야 합니다.”
“카트린느가 납치되어 갔다. 당연히 가서 구해야지. 레어가 어디쯤에 있는지는 아는가?”
“그, 그야……. 근데 레어로 가시면 안 됩니다. 위대하신 존재는 인간들이 접근하는 걸 극도로 혐오합니다.”
“그래도 가야 하니 레어가 어디에 있는지 방향만 알려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