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7
“고맙네. 기억해 두지.”
“참, 보좌관은 몇 명이나 두셨습니까?”
“넷이네.”
현수는 역시나라는 생각을 하곤 물었다.
“왜 더 뽑지 않으셨어요? 다들 아홉 명씩 두잖아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근데 왜 묻지?”
“곧 겨울이 됩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항온 재킷을 보낼 테니 민생 현안을 잘 살펴봐 주십시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하하, 하하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제 갈 시간인 것이다.
홍진표 의원과 헤어진 현수는 곧장 천지건설 본사로 향했다. 빨리 들어와 달라는 전화가 있었던 때문이다.
* * *
“사장님은… 안에 계세요?”
“네,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세요. 얼른 들어가세요.”
조인경 대리가 환한 웃음을 지어준다. 마음에 드는 사내를 소개해 줘서 고맙다는 뜻이다.
“아, 네.”
“참, 손님도 계세요. 참고하시라고요.”
조 대리에게 싱긋 웃어주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처음 보는 사내가 사장과 함께 있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그래, 어서 오게. 자, 앉지.”
“네.”
현수가 자리에 앉자 신 사장이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를 바라본다.
“인사하게. 통일부 고만섭 차관이시네.”
“아! 그렇습니까?”
“자네 없는 동안 회장님께서 바쁘게 움직이셨네.”
“그랬군요. 처음 뵙습니다. 김현수라 합니다.”
현수가 예의를 갖추자 고 차관이 손을 내민다.
“통일부 고만섭입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악수를 하면서 고 차관은 잠시 현수를 유심히 바라본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북한 주민 접촉 신청을 하셨는데,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려는 것은 아닌 거죠?”
“그렇습니다. 제가 만나야 할 사람은 고위관리들입니다.”
“흐음, 고위관리라……. 군인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내용으로 만나려는 건지요?”
“죄송합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대답이었는지 고 차관의 눈썹이 씰룩인다.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다.
“저희가 주무부서인데 말씀을 안 해주신다면 허가해 드리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주 부드러운 음성과 표정이다. 하지만 내용은 그러하지 않다. 털어놓지 않으면 허가해 줄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제가 북한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국익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극도의 보안이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현수 또한 말해줄 수 없다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했다.
“흐음, 국익과 보안이라……. 주무부서 차관인 나도 알아선 안 될 일입니까?”
“네, 일이 성사되기 전까진 그렇습니다.”
이번 대답도 의외이다. 그러곤 더 할 말 없다는 듯 입술을 굳게 다문다. 고 차관은 슬며시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억지로 다스리고 있다. 보낸 사람 때문이다.
오늘 직속상관인 통일부 장관의 호출을 받았다.
그리곤 천지건설로 가서 김현수 전무이사의 방북 요청 사유가 뭔지 알아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연서 천지그룹 회장이 직접 움직인 일이다. 그래서 국무총리가 직접 장관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면담해야 할 상대가 나름 거물이기에 사무관 내지는 서기관 급보다는 차관이 적합할 것 같아 보낸다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전무, 국민배우가 된 현수를 한 번쯤을 만나보고 싶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입에 달고 사는 사내이기 때문이다.
늦장가를 갔기에 차관의 딸은 이제 겨우 고2이다. 그런 딸아이가 신화창조 티저 영상을 보더니 반해 버린 것이다.
하여 나름 호감을 갖고 왔는데 슬쩍 기분이 나빠진다.
차관은 소속 장관을 보좌하고 장관의 직무를 대행할 수 있는 정무직(政務職) 국가 공무원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임명한다. 참고로 대한민국 공무원의 직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9급 서기보 : 지방관서 대민 업무.
8급 서기 : 지방관서 대민 업무.
7급 주사보 : 지방관서 계장.
6급 주사 : 지방관서 계장 내지 팀장.
5급 사무관 : 지방관서 과장.
4급 서기관 : 지방관서 서장.
3급 부이사관 : 국장, 인구 15만 이상 기초자치단체장.
2급 이사관 : 국장, 인구 50만 이상 기초자치단체장.
1급 관리관 : 차관보, 인구 100만 이상 기초자치단체장.
차관은 1급 공무원인 관리관 위의 차관급 공무원이다. 더 위로는 장관급, 부총리급, 총리급, 대통령급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웃음기 띤 얼굴을 굳히진 않았다. 그만한 내공은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게는 말을 해줘야 합니다. 주무부서에서 모르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요.”
“죄송합니다. 현재로선 밝힐 수 없습니다.”
“끄으응! 말이 안 통하는군요. 알겠습니다. 이렇듯 완강하시니 할 수 없지요.”
고 차관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찌 되었든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앉아서 대꾸할 수 없기에 따라 일어섰다.
“미안합니다. 사정이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뭐, 그렇다니 할 수 없지요. 저희도 내부 사정이 있다는 걸 이해해 주십시오. 방북 신청을 한다고 알아보지도 않고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을요.”
“그럼 제가 구체적인 방문 목적을 차관님께 말씀드리지 않으면 허가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지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고 차관은 단호한 표정이다. 현수는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거둔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포기하지요.”
“끄으응!”
고 차관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그리곤 신형섭 사장에게 인사도 없이 나가 버린다. 몹시 불쾌하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실례도 이런 실례가 없기에 신 사장은 당황한 듯 현수를 바라본다.
“이보게.”
뭐라 하기 전에 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성사될 확률이 큰 일입니다.”
“그, 그렇긴 해도…….”
신 사장 역시 사안의 중대성을 알기에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인터컴이 울린다.
띠리리리링―!
“으음, 누군가?”
“사장님, 총리실에서 전화 왔습니다. 2번 누르고 받으세요.”
“총리실에서? 알겠네.”
신형섭 사장은 2번을 눌렀다.
“전화 바꿨습니다. 천지건설 신형섭 사장입니다.”
“반갑습니다, 신 사장님. 국무총리 비서실의 안 사무관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총리님을 바꿔 드리겠습니다.”
“네, 그러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보세요. 신 사장님? 총리 심호철입니다.”
“아, 네, 신형섭입니다. 총리께서 어인 일로 제게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가끔 리셉션장에서 보는 얼굴이기에 고 차관보다는 편하게 대하는 듯하다.
“귀사의 김현수 전무가 신청한 방북 신청이 허가되었음을 알리려 연결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대통령님께서 국가 발전에 지대한 공이 될 수 있으니 적극 협력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신 사장은 무슨 소린지 듣지 않아도 알아듣고 있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이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무총리, 또는 대통령은 주한 러시아대사를 불러 푸틴의 친서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듯 협조적일 것이다.
“아, 네에. 그럼요. 저희 김 전무가 알아서 잘 할 겁니다. 네, 네! 네, 그러지요. 네, 알겠습니다.”
방북 허가가 떨어졌으니 현수는 합법적으로 북한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방법을 택할까를 고심하는 동안 신 사장과 총리의 통화가 끝났다.
“고 차관이 그러고 가서 좀 찜찜했는데 다행이네.”
“네. 아무튼 잘되었습니다. 조만간 제가 북한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왜 조만간인가? 허가가 떨어졌으니 바로 들어가지 않고.”
빨리 들어가 일을 성사시키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가기 전에 저쪽에 대해 공부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무턱대고 들이밀 사안은 아닙니다. 현재로선 저쪽이 얻는 게 보이지 않으니까요.”
“하긴……. 그나저나 우리 회사가 그 공사 전부를 하게 되는 건가?”
“사장님, 냉정하게 보았을 때 다 맡기면 우리 회사가 그걸 소화할 수 있을까요?”
“아니! 현장이 길고 요즘은 콩고민주공화국에 많이 파견해서 그러긴 힘들지.”
“그럼 나눠야지요. 국내 기업은 물론이고 러시아 건설사도 많이 동원해야 할 겁니다.”
“문제는 인력 충원이야. 국내 기술진은 어떻게 될 거야. 요즘 건설 경기가 아주 안 좋으니 뽑겠다고 하면 몰려들 거니까.”
“그럴 겁니다.”
실제로 천지건설을 제외한 나머지 건설사들을 줄줄이 도산 위기에 처해 있다. 아파트 분양은 안 되고, 불황으로 신규 건축은 줄어든 때문이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신 사장은 이맛살을 찌푸린다.
“계열사 임원들 이야길 들어보니 러시아에선 레드 마피아를 끼지 않으면 일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니 큰일이네.”
“맞습니다. 그래서 레드 마피아와 적당히 협력해야죠.”
“그러다가 전부를 먹으려 달려들면 어쩌지? 그런 사례가 있다고 들었네.”
상당히 조심스런 표정이다. 죽 쒀서 개 주는 일이 될 수 있다 판단한 때문이다.
현수는 사람 좋은 신 사장이 스트레스 받는 걸 원치 않는다. 하여 피식 웃고는 말을 꺼냈다.
“제가 운영하는 이실리프 무역상사의 거래처가 레드 마피아와 관련이 있다는 걸 이번에 알았습니다.”
“아, 그래? 별 문제 없나?”
“네, 상당히 호의적입니다. 계산도 깨끗하고요.”
“그래? 그럼 러시아에 들어갈 때 그 선을 좀 이용해 보세. 근데 자네가 아는 선은 어디까지인가?”
신 사장은 중간 간부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제가 아는 분은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라는 사람으로 모스크바의 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뭐? 그, 그럼 레드 마피아의 보스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큰 걱정 마십시오.”
“오오! 이럴 수가!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심했는지 아는가? 혹시 잘못될까 싶어 잠도 못 잤네.”
“에이, 설마요! 멀쩡해 보이시는데요?”
현수가 피식 웃자 진심이라는 듯 손사래를 친다.
“아냐. 진짜 걱정 많이 했네. 우리 직원들을 파견했는데 놈들에게 총 맞아 죽으면 어쩌나 했거든.”
“서울에 오기 전 이바노비치 보스를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가스전 개발 공사와 파이프라인 연결 공사에 필요한 러시아 인력을 부탁드렸습니다. 아마 사람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고맙네. 자네 덕에 한숨 덜었네. 휴우∼! 자네가 그 무역상사인지 뭔지를 한다고 하는 걸 안 말리길 잘했네.”
“그러셨어요?”
2장 사라진 금괴
“그래, 자네 과장으로 진급하기 전에 그 때문에 말이 많았네. 알다시피 겸직을 금지하는 사규가 있지 않은가.”
신 사장의 말대로 이전의 천지건설 사규엔 일체의 다른 직업을 겸할 수 없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현수가 과장이 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이 수정되었다.
전) 천지건설 임직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겸직할 수 없다. 겸직하고 있음이 발견되면 즉시 파면 조치를 취한다. 아울러 그로 인해 회사가 입은 손해를 배상케 한다.
후) 천지건설 임직원은 회사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겸직할 수 있으나 사전에 회사의 승인을 득해야 한다.
당시 신 사장은 공을 세운 현수가 퇴사당하지 않게 하려 이사회를 소집하여 부랴부랴 이렇게 바꾸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의 공사 중 가장 큰 난관은 날씨입니다. 시베리아의 겨울은 인간이 감내해 내기엔 너무나 춥잖아요.”
“그래, 겨울철 평균 기온이 ―50℃라는 말은 들었네.”
시베리아의 대표적인 도시 베르호얀스크의 1월 평균 기온은 ―46.4℃이다. 펄펄 끓는 물을 허공에 뿌리면 곧바로 눈이 되는 온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