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0
“전무님, 한전과 통화되었습니다.”
“그래요?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되죠?”
“3시, 마포구 당인동입니다. 제가 모실까요?”
“아닙니다. 혼자 가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도착하셔서 김종인 소장님을 찾으라고 합니다.”
“네, 수고했습니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진영 과장이 물러간다.
시계를 보니 곧 출발해야 할 것 같아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임원 전용 주차장에 스피드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부우우우웅―!
단번에 시동이 걸린다. 하여 안전벨트를 매고 출발하려는데 휴대폰이 진동한다.
찌이이잉, 찌이이이잉!
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다.
“흠, 누구지? 여보세요.”
“아, 안녕하십니까? 천지건설 김현수 전무님이시죠?”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3장 국정원으로 와주십시오
“국정원 엄규백 요원입니다. 바쁘시겠지만 내곡동으로 와주실 수 있는지요?”
“내곡동이요?”
“네, 저희 차장님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
현수는 짚이는 것이 있었다.
“혹시 3차장님이신 겁니까?”
“네, 그렇게 알고 오시면 됩니다. 언제 오실 건지요?”
“오늘은 어렵고 내일 가죠. 도착해서 전화하면 되나요?”
“네, 출발 전에 전화 주시면 제가 나가겠습니다.”
“흐음, 좋아요. 그럼 그러죠.”
짧게 통화를 마친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국정원 3차장은 대북 업무를 맡고 있다. 자신은 아직 북한에 들어가지 않았고, 접촉 승인은 대통령이 나서서 해준 것으로 알고 있다.
대통령이 승인한 걸 국정원에서 걸고넘어질 수도 있나 하는 생각을 해보니 아닌 것 같다. 그랬다간 국정원장 본인의 자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체 왜 보자고 하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현재로선 아무것도 알 수 없기에 일단 출발했다.
당인동 발전소에 당도하니 경비가 방문 목적을 묻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젊은 놈이 스포츠카를 몰고 왔으니 잘못 온 게 확실하다는 표정이다. 하긴 누가 이런 차를 몰고 발전소로 가겠는가!
“김종인 소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누구요?”
맨날 듣던 이름이지만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반문한다.
“김종인 발전소장님이요. 안 계신가요? 약속하고 왔는데.”
“아! 그럼 천지건설에서 오신 겁니까?”
그렇지 않아도 발전소장으로부터 전갈을 받아 언제 오나 기다리던 중이다. 건설회사에서 온다고 했으니 오프로드를 즐길 수 있는 큼지막한 SUV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날렵한 스포츠카를 타고 왔다. 얼굴을 보면 전혀 기술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네, 여기 제 명함입니다.”
“아! 그렇습… 헉! 전무님이십니까?”
“네, 어쩌다 보니 어린 나이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눈에 익다. 한동안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리던 그 인물이다. 경비원은 얼른 허리를 펴며 경례를 붙인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저기 저쪽에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경비원의 손짓에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여주곤 안으로 들어섰다. 발전소라 그런지 삭막하다.
“어서 오십시오. 김종인 소장입니다.”
“네, 김현수라 합니다.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먼저 제 사무실로 가시지요.”
“네.”
두말 않고 김 소장의 뒤를 따라 소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여직원이 커피 두 잔을 내온다.
“본사로부터 연락 받았습니다만 저희 발전소를 방문하신 목적이 뭔지 알아도 되겠습니까?”
“네, 화력발전의 원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서요. 그리고 터빈이라는 것도 보고 싶구요.”
“혹시 수력발전소로 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김종인 소장은 천지건설에서 한전에 도급준 것이 잉가댐 수력발전소라는 것을 알기에 하는 말이다.
“네, 수력발전소에도 가볼 생각입니다. 그보다는 화력발전에 더 흥미가 있어서요.”
“……?”
건설회사 임원이 왜 이런 데 관심을 갖나 싶은 모양이다.
이쯤 되면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야 조금 더 자세하고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콩고민주공화국엔 수력발전소만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곳곳에 화력발전소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제가 그 과정을 모르면 설명할 수 없어 견학을 요청 드린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김 소장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눈앞의 이 대단한 젊은이는 혼자서 엄청난 공사를 따오는 사람이다. 만일 화력발전소 신설 공사를 따온다면 그중 설비는 한전에 도급될 것이 분명하다.
당연히 자세히 알려줘야 한다.
나중에라도 당인동 발전소를 방문했는데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는 말이 나오면 진급하는 데 애로가 있기 때문이다.
커피잔이 비자 김종인 소장은 정말 친절하고 자세한 안내를 시작했다. 덕분에 화력발전의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화력발전의 효율을 높이려면 먼저 보일러의 기술을 발전, 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
환경을 생각한다면 발생되는 이산화탄소를 제로화하는 기술도 필요하다. 다행히 이 기술은 이미 개발되어 있다.
보일러를 살피면서 현수는 어찌 개선할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직은 보일러 전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인지라 즉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이어리엔 보일러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아봐야 한다고 메모했다.
다음에 본 건 원동기와 터빈이다. 이것 역시 효율이 낮다. 30∼40%로 추정한다고 한다.
기계적 효율이 어째서 이 정도냐 물었다. 김 소장은 열역학적 사이클의 원리를 설명한다.
엔진의 경우 오토사이클, 터빈의 경우 직접 연소 시 브레이톤 사이클, 증기를 이용할 경우 랭킨 사이클의 열역학적 원리를 따져서 설명한다.
결론은 열역학법칙에 의해서 일정한 수준의 효율밖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전에 사용된 30∼40%의 에너지를 제외한 열은 모두 손실되는 것이다.
모든 견학을 마치고 전체적인 설명을 부탁했다.
김 소장은 화력발전의 효율을 37∼41%로 추정했다.
순수 발전 효율은 45∼50%이지만 여기에 보일러 등에서 발생하는 열 손실이 더해지면 39∼43%로 떨어진다.
그리고 투입된 열에너지의 3∼7% 정도가 발전 시설 전체의 운용에 소요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견학하는 동안 보고 들은 것들은 꼼꼼하게 메모되었고, 기계적인 것들은 카메라에 담았다.
“오늘 업무에 바쁘실 텐데 저 때문에 많이 귀찮으셨죠?”
“아이고, 아닙니다. 이것도 다 일인데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김종인 소장은 주차장까지 내려와 배웅을 해주었다. 아까 보았던 경비원은 나갈 때 경례까지 붙여준다.
현수는 고개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곤 곧장 차를 몰아 보일러 제작공장으로 향했다.
당인동 발전소에 설치된 보일러를 제작한 공장이다.
이곳에서도 역시 상당히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보일러의 설계도면까지 복사해 받았다.
덕분에 보일러에 대한 이해도가 월등히 높아졌다.
보일러 공장은 나선 뒤엔 터빈 제작 공장으로 향했다. 김종인 소장이 미리 전화를 주어 편하게 일을 볼 수 있었다.
“전무님, 볼일 다 보신 겁니까?”
“네. 이제 퇴근이죠?”
“아직이요. 업무 시간이 30분가량 남아 있습니다.”
“그래요? 그래도 그냥 나갑시다.”
“네, 전무님!”
기획영업단은 본사의 어떤 부서에서도 건드릴 수 없다.
심지어 비리가 저질러지고 있다는 투서가 감사실에 들어가도 조사하지 못한다.
이는 현수가 떠오르는 실세여서가 아니다.
기획영업단은 최근에 만들어진 부서이다.
그러다 보니 사규에 정해져 있는 감사 범위에 들지 않는 상태이다. 그래서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다.
기획영업단은 예산이라는 것도 없다. 필요하면 자금부에 신청만 하면 어떤 액수라도 지불하라 되어 있다.
비록 인원은 얼마 되지 않지만 천지건설에서 가장 막강하다. 그리고 이곳의 장(長)은 김현수이다.
사장과 회장의 명에 따라 출근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다. 다시 말해 내키는 대로 근무해도 된다.
이런 현수가 업무 중단하고 나가자고 한다. 적어도 기획영업단 내에서 이것은 법이다. 그렇기에 박진영 과장은 찍소리 않고 직원들에게 눈짓한다. 빨리 나가자는 뜻이다.
“박 과장님, 근처에 괜찮은 집 있습니까?”
“회식하기엔 고깃집이 괜찮지요. 그리로 모실까요?”
“그럽시다.”
현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박 과장이 앞장선다. 그렇게 하여 안내된 곳은 더하누라는 고깃집이다.
들어서며 흘깃 간판을 보니 한우 전문점이다. ‘The 한우’를 소리 나는 대로 읽어 상호가 만들어진 모양이다.
“전무님, 이 집 고기가 아주 좋아서 이쪽으로 모셨습니다. 괜찮으시죠?”
“네, 좋네요.”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 과장이 종업원에게 뭐라 이야기한다. 그러자 안쪽의 방으로 안내한다.
일행은 현수와 박 과장, 그리고 김지윤 대리와 황만규 주임, 그리고 구본홍 사원 이렇게 다섯이다.
자리에 앉자 주문을 받아간다.
박 과장은 살치살, 꽃살, 치마살, 토시살, 안창살, 제비추리 등 한우 한 마리를 도축했을 때 극소량만 나오는 부위를 맛볼 수 있는 메뉴로 주문했다.
잠시 후, 숯불이 들어오고 밑반찬이 세팅된다. 한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고 청결해 보인다.
종업원은 먼저 제비추리와 살치살을 석쇠에 올려놓는다. 적당히 익혀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조금씩만 올린다.
그리고 술이 들어왔다. 가장 먼저 김지윤 대리의 눈빛이 달라진다. 지난 며칠간 수집된 자료를 분류하고 파악하느라 야근을 했다고 한다. 하여 술을 못 마셨다면서 입맛을 다신다.
현수가 직원들 잔에 술을 따라주자 황송해하며 받는다. 마지막으로 박 과장이 현수의 잔을 채웠다.
이윽고 모두의 잔이 채워졌다.
“여러분이 기획영업단의 무엇을 보고 지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이 바라던 것 이상의 것을 보게 될 겁니다.”
“……!”
현수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직원들은 눈빛을 빛낸다.
“저는 자주 자리를 비우겠지만 여러분은 기획영업단을 지켜주십시오. 여러분의 서포트가 제게 힘이 될 날이 곧 올 겁니다. 그리고 나는 혼자 나아가지 않습니다.”
“……!”
여전히 말들이 없다. 방금 현수가 한 말의 뜻을 곱씹느라 그런 것이다.
“자, 오늘은 그냥 먹고 마십시다. 그리고 내일부터 더 열심히 일해주십시오. 건배 한번 합시다. 기획영업단을 위하여!”
“위하여!”
쭈우욱―!
모두 단숨에 털어 넣는다. 그리곤 석쇠 위에서 익고 있는 고기 한 점씩을 입에 넣고 씹는다.
회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동안 굶주리기라도 했는지 상당히 많이 먹고 마셨다. 현수도 우스갯소리를 섞어가며 상당히 많이 먹고 마셨다. 하지만 취하지는 않았다.
중간 중간 화장실도 다녀오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시선이 마주친 사내가 있다.
애인과 식사하는 듯 보이는 그는 서른은 넘긴 듯하다. 평범한 직장인처럼 양복을 입고 있다.
마주 앉은 여인 역시 오피스 걸처럼 단정한 차림이다.
스치듯 보고 지났지만 이 사내를 어디에서 보았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다.
오늘 당인동 발전소를 떠나 보일러 공장으로 갈 때 왼쪽 차선의 승합차에 타고 있던 인물이다.
대략 1분 정도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있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본능은 그게 아니라는 신호를 보낸다.
직원들과 뜬금없는 회식을 하게 된 것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