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1
귀국한 이후 누군가가 살펴보는 듯한 느낌을 자주 느꼈다. 그때마다 고개 돌려 살펴봤으나 워낙 사람이 많은 곳이었는지라 누가 주시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직원들과 회식을 하러 나오면 비교적 좁은 장소로 들어가게 된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면 보다 찾아내기 쉬울 것이다. 하여 나오자고 한 것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리고 당도한 이후에도 시선이 느껴졌다. 여전히 파악할 수 없었다. 마치 아무도 없는데 현수 혼자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이다. 진짜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 전문가가 따라붙었다는 뜻이다.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리는 것도 이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다시 방으로 들어온 현수는 직원들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 마셨다. 그리곤 정해진 코스인 양 우르르 노래방으로 몰려갔다.
불콰하게 술이 오른 황만규 주임은 넥타이를 풀었다.
구본홍 사원 역시 취한 듯 비틀거렸다. 박진영 과장과 김지윤 대리는 얼굴은 붉었지만 취하진 않은 것 같다.
룸으로 들어간 현수는 직원들이 노래하는 사이에 밖을 살폈다. 누군가 따라왔다면 이쪽을 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흐음, 누구지? 이경천 검사는 아직 날 모르니 아닐 테고. 그렇다면 강철환 쪽인가?’
기무사는 잠입 미행에 도사들이 많은 곳이다.
그렇다면 지금껏 느껴진 눈길이 이해된다. 저쪽은 전문가이고 이쪽은 아마추어 축에도 못 끼기 때문이다.
‘아니면 최세창 대령 쪽일 수도 있겠구나.’
현수가 자신의 짐작이 맞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김지윤 대리가 노래 목록이 적힌 책을 들이민다.
“전무님, 전무님도 한 곡 하셔야죠.”
“응? 아, 그래요.”
현수가 고른 곡은 미스터K가 부른 ‘담백하라’라는 곡이다.
영화배우 백윤식이 뮤직비디오에 출연하여 멋지게 립싱크한 곡이다.
차라리 떠나가자. 떠나 버리자. 사랑이 없던 것처럼.
차라리 잘 가 하며 웃어버리자. 뒷모습 멋있어야지.
약간 빠른 박자의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 직원들은 모두 일어서서 탬버린을 치며 박자를 맞춰준다.
유명한 곡이 아니라 그런지 따라 부르는 직원은 없다.
현수는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혼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이 어린 직장 상사를 보필하느라 마음에도 없는 율동을 한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래도 말리진 않았다. 이게 직장 생활이기 때문이다.
“와아아! 우리 전무님 최고!”
들어올 땐 멀쩡했던 김지윤 대리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다가선다. 들어와서 홀짝거린 맥주 때문에 취한 듯 보인다.
“김 대리도 한 곡 해야죠?”
“그럼요! 저도 한 곡 하겠습니다. 근데 전무님이 좀 도와주십시오.”
“하하, 그래요? 제목이 뭡니까?”
“이상우의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골라주세요.”
“좋아요.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서둘러 노래책을 뒤적여 번호를 눌러주었다.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나도 몰래
먼 길을 걸어오는 나의 마음
밤이면 행여나 그대 오질 않나
내 맘에 등불이 되고 싶네.
잔잔하게 시작된 노래가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반주만 들리고 김 대리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마이크가 고장 났나 싶어 바라보니 화면만 바라보고 서 있다. 그러더니 눈가를 훔치는 동작을 한다.
노래 부르다 가사에 심취하여 눈물을 흘리는 모양이다.
“어이, 김 대리! 왜 노래 부르다 말고 울어? 누가 김 대리 마음 아프게 했어?”
박진영 과장의 말에 김 대리는 얼른 고개를 흔든다. 그리곤 정지 버튼을 누르고 나가 버린다.
“자자, 이번엔 황 주임 한 곡 뽑아야지? 뭐로 부를래?”
“네? 저는…….”
황 주임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1절이 끝나고 2절도 끝나 가는데 김 대리가 오지 않는다.
현수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에 가보니 누군가 울고 있다. 여자 화장실 안에 있기에 이브즈드랍 마법까지 써서 확인한 것이다.
‘실연당했나? 꽤 예쁘장해서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을 텐데. 아무튼 여기 있으니 다행이군. 좀 진정되면 오겠지.’
화장실에서 방으로 돌아가는 동안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 주시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느낌도 없었다.
방으로 돌아가니 잠시 후 김 대리가 들어온다. 눈가의 화장이 지워진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실컷 울고 온 모양이다.
“에이, 김 대리, 어딜 그렇게 갔다 와? 자자, 늦게 온 벌로 한 곡 뽑아.”
“네, 과장님!”
언제 울었느냐는 듯 밝고 경쾌한 곳을 골라 한 곡 뽑는다. 그러는 모습을 보니 조금 안쓰럽다는 느낌이다. 직장 상사들과 함께 있기에 감정마저 감춘다 생각한 것이다.
“후우! 좀 시원하네.”
“네, 전무님은 댁이 워커힐 쪽이시죠? 그럼 죄송하지만 김 대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박진영 과장의 말에 시선을 돌려보니 김 대리는 속칭 골뱅이가 되어 있다. 안 보는 사이에 또 술을 마신 모양이다.
“그러죠. 다들 잘 갈 수 있죠?”
“그럼요. 전무님 먼저 들어가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회사에서 봅시다.”
어느새 연락을 했는지 현수의 스피드가 스르르 다가온다. 대리기사를 부른 것이다.
“전무님, 김 대리는 풍납초등학교 인근이 집이랍니다.”
“네, 알았습니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차가 출발한다. 조수석에 앉은 현수는 뒷좌석을 보았다. 잠이라도 든 듯 좌석에 기대 있다.
왠지 불쌍해 보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수는 손을 뻗어 김 대리의 가방을 들었다. 지갑을 찾아 집주소를 확인했다. 그리곤 휴대폰을 찾아 번호를 검색했다.
‘엄마’라 쓰인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받질 않는다. 하여 ‘우리 집’이란 번호로 걸었다. 이것 역시 받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풍납초등학교 인근에 당도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내비게이션에 김 대리의 주소를 찍었다.
잠시 후, 아파트 입구에 당도했다.
현수는 김 대리를 내리게 하곤 부축했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때문이다.
“으이구! 그나저나 107동 906호면… 저기군.”
아파트 입구를 찾았다 싶은데 누군가의 음성이 들린다.
“지윤아! 너 지윤이지? 어머, 누구세요?”
시선을 돌려보니 스웨터를 걸친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아! 김지윤 대리 어머님이십니까?”
“그런데요. 누구시죠?”
“저는 김 대리와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입니다. 오늘 부서 회식이 있었는데 과음해서……. 죄송합니다.”
책임자로서 아래 직원이 술에 취할 때까지 내버려 둔 것이 미안하다는 뜻으로 한 사과이다.
그런데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은 모양이다.
“그쪽이 우리 지윤이 마음 아프게 한 사람인 건가요?”
“네? 그게 무슨……?”
현수의 말이 중간에 잘렸다. 김 대리 모친의 속사포가 시작된 때문이다.
“요즘 얘가 얼마나 우는지 알아요? 대체 왜 그랬어요? 우리 지윤이가 어디가 어때서 찬 거지요?”
팔짱을 낀 채 노려보는 김 대리의 모친이다. 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괘씸하다는 표정이다. 현수는 오해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모친께서 먼저 입을 여신다.
“생긴 건 멀끔하네요. 좋아요. 그건 인정할게요. 그런데 어디가 얼마나 잘나서 우리 지윤이한테 그런 거예요?”
“네?”
뭐라 말하기도 전에 또 한 번 속사포 신공이 시작된다.
“우리 지윤이요, 중학교 다닐 때부터 전교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는 애예요. 대학교 들어가서도 공부하느라 연애 한번 못해봤구요. 그리고 너무 착하고 예쁜 아인데 뭐가 부족해서 우리 애한테 헤어지자고 한 거지요? 말해봐요. 그쪽은 뭐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저어, 어머님, 그게 아니고요.”
“아니긴요! 그리고 어머님이요? 내가 왜 댁의 어머님인 거죠? 애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매일 밤 베갯잇을 적시는 딸이 안쓰러워 한 말일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현수는 차에 대기하고 있는 대리기사를 힐끔 바라보았다. 뭔가 투덜거리고 있는 듯하다.
“오해라니요. 그쪽이 헤어지자고 한 거 아니에요? 얘는 그것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어 날마다 우는 거구요. 안 그래요?”
“어머님, 저는 김 대리와 같은 직장에 있는 동료입니다.”
“알아요. 동료라는 거. 같은 회사에 있으면서 그러면 못쓰죠. 얘는 직장 생활을 어떻게 하라고…….”
보아하니 천지건설 직원 중 누군가와 연애를 한 모양이다. 그리고 최근에 헤어지자는 통고를 받고 우울해한 듯싶다.
“어머님, 저는 김 대리와 사귄 적 없습니다.”
“뭐라고요? 애가 이렇게 되었는데도 사귄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해요? 그러고 보니 양심이 불량한 사람인 모양이군요.”
“에구! 그게 아니라니까요.”
놔두면 오해만 점점 깊어질 것 같아 명함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건네며 시선을 주었다.
“저는 김 대리가 몸담고 있는 부서의 장입니다. 오늘 저희 부서 회식이 있었구요. 저는 강 건너 저쪽에 사는데 가는 길에 김 대리 집이 있다고 해서 바래다주러 온 겁니다.”
“네?”
어두워서 명함의 글자가 잘 안 보인 모양이다.
“아무튼 저는 김 대리를 무사히 인계해 드렸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대리기사가 기다리고 있어 어머님의 오해를 다 풀어드리지 못하는 점 죄송합니다. 그리고 김 대리가 과음하도록 내버려 둔 것도 죄송합니다. 만나 봬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이번엔 현수가 속사포 신공을 발휘했다. 그리곤 얼른 차에 올라탔다.
대리기사는 기다렸다는 듯 즉시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이봐요. 이, 이봐요. 그냥 가면 어떻게 해요? 이봐요. 야! 이 나쁜 놈아! 내 딸 책임져! 거기 서! 서란 말이야!”
김 대리의 모친이 손짓으로 차를 세우라 하였지만 무시하고 달렸다. 우미내 집에 당도한 것은 새벽 1시 반 경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자리노와 그리셀다가 와락 달려든다. 하루 종일 심심했는데 왜 이제 오냐는 듯 손을 혀로 핥으며 꼬리를 흔든다.
“그래, 리노! 그리고 셀다. 내가 좀 늦었지?”
현수는 고깃집에서 먹고 남아 싸달라고 했던 한우구이를 꺼내주었다. 잘도 받아먹는다.
“녀석들, 배가 고팠냐? 사료가 없어? 어디 보자. 응? 사료 많이 남았는데…….”
주인이 준 거라 반갑게 먹는다는 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현수는 두 녀석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줬다.
“자, 난 이만 들어갈게. 오늘 밤에도 잘 지켜줄 거지?”
현수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꼬리를 살랑거리며 올려다본다. 하여 또 한 번 쓰다듬어 주곤 안으로 들어갔다. 두 분 모두 주무시는지 조용하다. 살그머니 2층으로 올라갔다.
“논 노이즈!”
소음 때문에 깰까 싶어 마법을 구현시키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냉장고를 열어 시원한 주스 한 잔을 들이켰다.
책상 위에 놓인 신문을 잠깐 보고는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낮에 본 발전용 보일러와 터빈에 대해 더 알아보았다.
전문 서적이 필요할 듯싶어 상당히 많은 책을 주문했다.
“그나저나 누가 날 미행하는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나?”
집에 올 땐 아무도 따라오지 않은 것 같다.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이내 검색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시 반이 조금 넘었다.
크와앙―!
“아악―!”
“헉! 느, 늑대다!”
크와아앙―!
“으아악!”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나자리노와 그리셀다가 각기 하나씩 물어뜯고 있다.
아래층의 어머니가 불을 켰는지 정원이 환해진다. 침입을 시도했던 사내들은 늑대의 이빨로부터 벗어나려 애를 쓴다.
하지만 야생 늑대는 그리 쉽게 상대할 수 없는 놈들이다.
“혀, 현수야! 나가지 마라!”
“아니에요, 어머니. 걱정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