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4
그런데 너무나 쉽게 인수하라는 말을 하자 말문이 막힌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매물로 나온 게 있나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필요한 건지요? 급한 겁니까?”
“아마도요. 아무튼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필요하니까요.”
대화를 하면서 인터넷으로 또 다른 전염병이 창궐했는가를 확인하던 현수가 마우스를 놓았다.
그리곤 영국의 가디언지가 보도한 기사를 찬찬히 읽었다.
다음은 2012년 말에 보도된 내용 중 일부이다.
웰컴 트러스트와 옥스퍼드 대학 열대의학 조사 협력 사업에 참가한 폴 뉴턴 박사 등은 ‘말라리아 저널’에 아프리카에서 가짜 말라리아 예방약이 판매 중이라면서 2002∼2010년 11개국에서 수집된 가짜 약으로 의심되는 약을 보고했다.
연구팀은 가짜 약의 일부 성분이 동아시아 지역의 꽃가루였으며, 특히 에이즈 환자가 복용하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들 가짜 치료제는 지나 등에서 제조되고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참고로 나이지리아에서 유통되고 있는 약품의 45%는 가짜로 추정된다.
“이런 개만도 못한 새끼들!”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의약품을 가짜로 제조해서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현수는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하는 놈들의 대가리를 부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여 저도 모르게 욕을 한 것이다.
이때 인터컴이 소리를 낸다.
띠리리리링!
“네.”
“사장님, 라일라 아지즈 씨 전화가 와 있는데 연결할까요?”
“라일라 아지즈? 아, 그래요. 연결해 주세요.”
두바이 공항에서 환승을 대기하던 중 방문했던 아라비안나이트라는 풍물 가게 주인의 딸이다.
“여보세요. 김현수입니다.”
“아! 라일라 아지즈입니다. 사장님을 찾아뵙고 싶은데 시간이 있으신지요?”
“지금 어디에 계신지요?”
“플라자 호텔에 방금 당도하였습니다. 기다릴 터이니 언제든 방문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찾아뵈어야 하나 서울 지리를 모르니 양해하여 주십시오.”
상당히 정중하다. 현수는 괜스레 흐뭇함을 느꼈다.
“흐음, 알겠습니다. 잠시 후에 찾아뵙지요.”
전화를 끊고는 곧장 시청 앞 플라자 호텔로 향했다.
딩동―!
초인종을 누르자 깊은 소리가 난다. 호텔의 품격을 고려한 듯싶다.
“김현수 사장님이신가요?”
“네, 김현수입니다. 라일라 아지즈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아! 환영합니다.”
신분이 확인되자 문이 활짝 열린다.
“라, 라일라 아지즈 씨인가요?”
현수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은 것은 만개한 장미처럼 너무도 아름다운 얼굴 때문이다.
아랍에미리트(United Arab Emirates) 구성원 중 하나인 두바이는 아랍 국가이면서도 상당히 개방되어 있다.
크리스마스가 국경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다른 아랍 국가와 확연히 다르다.
대부분의 무슬림 국가에선 여인들이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한다. 하지만 두바이에선 히잡조차 쓰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라일라 아지즈는 맨얼굴이다.
현수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많은 미녀를 접했다.
동양 미인으론 권지현, 강연희는 물론이고 한창호와 열애를 시작한 조인경이 있다.
이 밖에 이수정, 이수연 자매, 그리고 이실리프 무역상사의 미녀 삼총사인 이은정, 김수진, 이지혜가 더 있다.
서양 미인의 대표는 당연히 이리냐이다. 그리고 강전호의 여인이 될 베아트리체도 눈에 확 띄는 미녀이다.
아르센 대륙으로 가면 아프로디테의 환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카이로시아가 있고, 우아함의 대명사인 로잘린이 있다.
이 밖에도 가꿔지지 않은 야생 장미 같은 다프네도 보았다.
용병 미녀 줄리앙도 있으며, 처음엔 까칠했지만 결국 오매불망 현수만을 바라보게 된 엘리시아 나후엘 드 율리안이 있다.
뿐만 아니라 미판테 왕국의 현자라 불리던 아르가니 판 포인테스 후작의 손녀 케이트 에이런 판 포인테스도 눈에 확 뜨이는 미녀이다. 레더포드 아물린 반 피리안 백작의 손녀 카트린느 조세핀 반 피리안 역시 미녀이다.
따라서 웬만한 미녀는 현수 앞에서 명함조차 내밀지 못한다. 그럼에도 현수의 눈이 번쩍 뜨인 것은 라일라 아지즈가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5장 벌어놓은 건 많습니까?
“네, 제가 라일라 아지즈랍니다. 어서 오시어요.”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는데 현수는 움찔했다. 귀밑머리 흔들림이 너무도 매혹적인 때문이다.
“아! 네, 네. 반갑습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던 현수는 얼른 손을 뺐다.
아랍에선 여자들의 얼굴을 빤히 바라봐선 안 된다.
먼저 말을 걸어도 안 되고, 악수를 청해서도 안 되며, 사진을 찍어서도 안 된다.
두바이로 가는 동안 비행기 안에 비치되어 있던 아랍 국가에 관한 안내문에서 본 내용이다.
방금 현수는 두 가지 결례를 범했다.
첫째는 라일라 아지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것이다. 둘째는 악수하자고 손을 내민 것이다.
이를 깨달았기에 정중히 고개 숙이며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합니다.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깜박했습니다.”
“어머,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여긴 한국이잖아요. 그리고 계속 거기 서 계실 거예요? 들어오세요.”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말을 하며 안쪽을 살폈다. 안에 라일라 아지즈의 부모가 있다면 들어가도 괜찮다. 만일 혼자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생각했기에 저도 모르게 살핀 것이다.
“그럼요. 들어오셔도 돼요. 부모님하고 같이 있었어요.”
있어요와 있었어요는 엄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현수는 객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두 발짝을 떼고 나서야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곤 얼른 말을 끊으려 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그러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한 발짝을 더 들여놓았다.
딸깍―!
룸 안에 발을 들여놓자 문이 닫힌다. 화들짝 놀라며 되돌아 나가려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자칫 상대에게 실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일라 아지즈가 먼저 안으로 움직인다.
“자, 이쪽으로 오셔요.”
여인의 뒤를 따르던 현수는 얼른 시선을 들었다. 저도 모르게 살랑거리는 둔부에 시선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음, 정신 차리자. 그나저나 대단하네. 나를 이처럼 정신없이 만들다니……. 아랍 미녀가 예쁘다더니 정말 그러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모양이다.
“네? 뭐라 하셨어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수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다행히 한국말로 중얼거렸는지라 상대는 알아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래요? 일단 여기 앉으세요.”
“아, 네.”
소파에 앉자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주스를 내온다.
“집이 아니라 접대가 변변치 않네요. 양해해 주실 거죠?”
라일라 아지즈는 생긋 미소 짓고는 맞은편에 앉는다.
“그, 그럼요. 근데 부모님은……?”
“김현수 전무님이 언제 오실지 몰라 잠시 외출하셨어요.”
“아, 그래요? 언제쯤 오시는지요?”
단둘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부담되었지만 이미 들어와 앉았으니 어쩌겠는가!
“곧 오실 거예요. 한국은 처음이시거든요. 근처만 보고 온다고 하셨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뭐, 그러죠.”
대답을 하니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근데 정말 우리말을 잘하시네요.”
“그런가요?”
“네, 우리말을 전공하셨나요? 아님 쭉 아랍에 계셨어요?”
“아뇨. 그냥 독학한 겁니다. 그리고 아랍엔 두바이에 잠시 머물렀던 게 전부이구요.”
“그럼에도 이처럼 말을 잘하시니 정말 대단해요. 참, 사인 하나 해주실래요?”
“사인이요?”
“호호, 저도 보았답니다. 김 전무님께서 카메오로 출연하신 신화창조 티저 영상을요.”
“아, 그랬어요?”
현수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사이에 발딱 일어나더니 안쪽으로 들어가 종이와 펜을 들고 나온다.
그녀가 내민 종이에 현수는 정성 들여 글씨를 썼다. 시간을 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بقلم ليلى العزيز(라일라 아지즈님)
لشرف لي أن ألتقي بك (당신을 만나 영광입니다)
حظ العلم دائما جميلة (능 아름다우시길 빕니다)
능숙한 아랍어로 쓴 내용의 아래엔 한글로 천지건설 김현수라 썼고, 그 뒤에 사인을 했다.
“와아! 말씀만 잘하시는 게 아니라 글씨도 정말 잘 쓰네요. 고마워요. 잘 간직할게요.”
“에구, 고맙기는요. 쓰고 보니 졸필인데요.”
“어머! 아니에요. 정말 정말 잘 쓰신 거예요. 저도 이만큼은 못 써요. 진짜예요.”
“고맙습니다.”
의례적인 대답을 하고 나니 또 침묵이다. 라일라 아지즈는 현수가 써준 글귀를 읽으며 환한 웃음을 짓는다.
“그런데 혹시 아버지 말대로 진짜 마법사인가요?”
“네?”
현수는 느닷없이 허를 찔린 기분이 되었다.
“김 전무님을 만난 뒤로 아버진 실성한 사람처럼 하루 종일 ‘날아라, 양탄자!’라는 말만 해요.”
“아, 그래요?”
심심풀이로 사람을 놀려먹은 죄가 있기에 현수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짐짓 놀라운 척 표정을 짓는다.
“네, 김 전무님이 그 말을 했을 때 분명히 양탄자가 허공으로 떠올랐다고 하면서, ‘왜 안 되지? 나는 왜 안 될까? 마법사가 아니라서 그러나? 알라딘은 마법사가 아니었는데’라는 말만 반복해요. 어떻게 하죠, 우리 아빠? 히잉, 걱정이에요.”
라일라 아지즈가 짐짓 눈물 닦는 척한다. 그런데 음성과 표정, 그리고 몸짓 하나하나가 장난이 아니다.
‘후와! 애교 끝장이군. 웬만한 사내 같으면 살살 녹겠어.’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현수는 반성을 했다.
‘흐음, 무심코 던진 돌이라도 개구리가 맞으면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내가 딱 그 짝이군. 앞으론 주의해야겠어.’
“김 전무님, 정말 마법사 아니세요?”
“에구, 마법사라니요. 21세기를 사시는 분이…….”
“그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법사는 동화책에만 나오는 존재잖아요. 근데 아빠가 왜 그럴까요? 우리 아빤 평생 거짓말을 안 하고 사셨어요. 그런데 전무님이 나온 동영상만 보면 마법사라고 하신단 말이에요.”
“글쎄요. 아버님이 왜 그러시는지는 제가 알 수가 없죠. 아무튼 좋아지셨으면 좋겠네요. 참, 병원엔 가보셨어요?”
“네. 근데 모르겠대요. 그래서 전화 드린 거예요.”
라일라 아지즈는 새삼 걱정스럽다는 표정이다.
“흐음, 저를 만난다 해서 꼭 나아지리란 보장도 없는데 이렇게 발걸음을 하게 해서 어쩌죠?”
“그건 할 수 없죠. 우린 김 전무님이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고 온 거니까요.”
“아무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식구들이 다 오면 가게는 어떻게 합니까? 휴업인가요?”
“아뇨. 가게는 문을 닫았어요.”
“네?”
“아침에 가게로 가면 아빠는 하루 종일 거기에만 계세요. 주말도 없이. 가족을 위해 평생 그러셨죠. 그 좁은 데에 있어서 이런 건가 싶어 엄마가 팔아버렸어요.”
“그럼 뭔가 다른 일을 시작하셨나요?”
“아뇨. 아직은 없어요. 엄마는 집에만 계셨고, 저는 아직 학생이에요. 그래서 수입이 없는 상태가 된 거죠.”
“끄응!”
현수는 나지막한 침음을 내며 또 한 번 반성했다. 재미로 친 장난에 어떤 가족의 생계가 끊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김 전무님 정말 대단하세요.”
“네? 그게 무슨……?”
“오기 전에 신문에 난 전무님 기사를 모두 읽어보았어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이룩하신 업적을요.”
“에구, 업적이라니요. 조금 남세스럽네요. 그런 말은 위인들에게나 적합한 말이잖아요.”
“아뇨! 제가 판단하기에 그건 분명한 업적이에요. 한국에서도 그만한 일을 이루었던 사람이 없었다면서요.”
“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