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6
겉보기엔 여느 군복과 다름없다.
두께가 더 두꺼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쌀쌀함이 완전히 사라지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홍 의원은 국내에서 개발된 것이며 항온 기능이 있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처음엔 농담이라 생각한 듯 웃기만 하던 국방장관이다. 하지만 항온 전투복의 놀라운 효능을 느끼곤 이게 대체 뭔가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곤 벗어서 샅샅이 살펴본다.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런 차이점도 발견할 수 없다. 하여 고개를 갸웃거린다.
“대체 뭐로 만든 거죠? 겉보기엔 똑같은데…….”
오정섭 국방장관은 공군 출신이다. 그리고 공군은 타 군에 비해 의식이 깨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홍 의원님, 이 전투복, 국산이라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이실리프 어패럴이란 회사에서 얻은 겁니다.”
“이거 장병들의 군복으로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쪽에 아는 분 있으십니까?”
“그곳의 대주주를 잘 알죠. 아마 장관님께서도 아는 사람일 겁니다.”
“저도 안다고요?”
“하하! 네. 아주 유명한 사람이니까요.”
“누구죠, 그 사람이?”
홍 의원은 거저 가르쳐 줄 마음이 없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꾼 듯 말을 이었다.
“근일 내 공관으로 그 친구가 찾아뵙도록 하죠. 제가 보냈다고 하면 만나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회의 늦겠습니다. 가시죠.”
“아! 그러네요. 근데 시간이……. 그냥 군복 입고 가십시오.”
“네. 그러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날씨가 좀 쌀쌀하네요.”
입고 온 양복은 오늘처럼 쌀쌀한 날씨엔 춥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기에 따뜻함이 느껴지는 항온 전투복을 택한 것이다.
아무튼 홍진표 의원은 현수에게 오정섭 국방장관과의 대화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곤 장관의 직통 전화번호도 가르쳐 주었다.
“참, 해군 관계자들과도 곧 만나게 될 것이네. 빠르면 내일일 수도 있으니 자네가 말한 그 엔진을 준비해 주게.”
“네, 알겠습니다.”
현수는 군부 쪽 사람들과 접촉하게 된 것이 흡족했다. 하여 가급적 빨리 만나게 해달라는 말을 끝으로 통화는 끝났다.
그리곤 곧바로 두 가지를 메모했다.
하나는 국방장관을 만났을 때 할 말이다.
두 번째는 해군 관계자들을 상대할 때 준비할 것 등이다.
논리적이어야 하기에 메모의 양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노란 포스트잇이 시선에 들어온다.
이은정 실장이 사장실에 들어온 것이다.
함민정이란 분 전화가 와 있습니다. 연결해 드릴까요?
처음 보는 이름이기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를 그러라는 뜻으로 이해했는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밖으로 나간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전화 연결음이 들리기에 수화기를 집었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아! 김현수 전무님.”
여자의 음성이기는 한데 누군지 알 수 없어 갸웃거렸다.
“네, 누구시죠?”
“어젯밤에 뵈었던 김지윤 대리의 엄마 되는 사람입니다.”
“아, 어머님! 김 대리는 괜찮습니까?”
“네, 지윤이는……. 어제는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너무 젊으셔서… 그리고 어두워서……. 지윤이에게 많이 들었지만 전무님을 직접 만날 거라곤 생각지 못해서……. 어젠 죄송했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오해인지 아는 걸요. 전 괜찮습니다.”
“지윤이가 회사에서 누군가를 사귄 것 같아요. 근데 요즘 침울해 있고, 그래서… 전무님이 그 사람이라 생각해서 제가 막말을 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김 대리가 누구와 사귀었는지는 모르십니까?”
“네, 몰라요. 말을 안 해서. 우리 지윤이가 실수하고 그러는 게 있더라도 너그럽게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네, 그런 건 걱정 마십시오.”
“아무튼 죄송합니다. 이 말씀 드리려 전화한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어제 일은 잊어버리세요.”
“네, 고맙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전화를 끊고는 피식 실소 지었다. 어젯밤의 일이 떠오른 때문이다.
‘그나저나 회사의 누구지? 흐음, 물어볼 수도 없고…….’
현수가 상념을 떨치려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참, 미행하는 놈들이 있었지? 흐으음!’
생각난 김에 와이드 센스 마법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사람이 움직이고 있기에 지금은 적합하지 않은 마법이다.
“끄으응! 일단 나가봐야 하나? 그래, 나가보자.”
차를 몰고 간 곳을 이실리프 어패럴이다.
6장 어려울 때 의리를 지켰으니
“아! 전무님, 어서 오십시오.”
“네, 어제 저 때문에 상당히 바쁘셨죠?”
“아이고, 아닙니다. 그런 게 우리 일인걸요. 참, 샘플로 드린 전투복은 장관님께 언제 전달된다고 합니까?”
“이미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국방위원회 회의가 조금 늦게 끝난다니 내일쯤 찾아뵐 생각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기대되는군요.”
박근홍 사장이 싱긋 미소 짓는다. 국방장관이 항온 전투복을 채택하겠다고 하면 일이 수월할 것이라 기대하는 모양이다.
“좋은 결과가 있겠지요.”
“우리가 더 준비할 것은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샘플이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열 벌쯤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참, 어제 로버트 켈리 중령이 우리 회사를 방문했습니다.”
“그래요?”
“전투복 10만 벌 공급 계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투화 10만 족과 헬멧 10만 개 임가공 주문도 받았구요.”
“잘됐네요. 가격은 어떻게 하기로 하셨습니까?”
“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전투복은 300달러씩, 전투화와 헬멧은 각기 150달러씩 받기로 했습니다.”
말을 하며 서류철을 꺼내 보여준다.
전투복 3,000만 달러, 전투화 임가공 1,500만 달러, 헬멧 임가공 1,500만 달러이니 합계 6,000만 달러이다.
한화로 환전하면 약 750억 원짜리 주문이다. 선수금으로 총액의 30%를 받기로 했으니 내일 중으로 225억이 들어온다.
이실리프 어패럴의 가용 자금이 풍족해지는 것이 마음에 든다는 듯 박 사장의 만면엔 웃음이 배어 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요. 참,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두바이를 거점으로 이슬람 세계에도 진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돈도 많고 사람도 많으니 장사 좀 되지 않겠습니까?”
“두, 두바이요?”
“엄청 더운 나라 아닙니까? 수요가 만만치 않겠지요?”
“그, 그럼요. 내놓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갈 겁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쪽 사람들의 의복을 조사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내일 중으로 보고 드리지요.”
“에구, 보고는요. 이실리프 어패럴의 경영자는 박근홍 사장님입니다. 저는 그냥 옵서버 정도로 여겨주십시오.”
“아닙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항온 의류는 전적으로 김 전무님이 있으니까 가능한 건데요.”
“아무튼 그냥 조사된 걸 이메일로 보내주십시오. 어찌 적용할 건지 저도 연구 좀 해봐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박근홍 사장이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콩고민주공화국과 러시아에 팔 물량도 많지만 아랍 쪽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다다익선이니 능력만 되면 무조건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입가엔 미소가 배어 있다.
회사가 쑥쑥 크는 모습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내복 제조도 신경 쓰고 계신 거죠?”
“물론입니다. 보건복지부에서 요구하는 수준 이상의 것을 만들려고 원단 매입 중입니다.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네? 뭐가요?”
“기존의 하청 공장만으론 납기일 맞추기가 여의치 않습니다. 24시간 풀가동해도 추가 생산은 어렵습니다. 하여 새로운 거래처를 뚫거나 우리가 공장을 차려 직접 제조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어찌해야 할지…….”
“그럼 기존 업체들을 더 키우는 건 어떤가요?”
“그건 말이죠…….”
까사가 망해서 쓰러져 갈 때 하청 공장은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되었다. 극악스럽게 쫓아 들어와 돈 내놓으라고 소리치거나, 묵묵히 기다려 준 업체로 나뉘는 것이다.
현재는 후자와 거래 중이다. 이해는 되지만 어려울 때 자기 혼자 살겠다고 했던 업체와는 거래를 끊은 것이다.
아무튼 그들만으로도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조만간 필요량을 생산해 낼 능력이 부족해진다. 하청업체들이 영세하기에 확장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돈이 없어서이다.
설명을 들은 현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럼 하청업체들을 지원해 주세요. 원청과 하청은 서로를 키워주는 사이가 되어야 하잖아요.”
“네? 그럼 투자한 만큼 지분을 확보해서…….”
박 사장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아뇨. 그냥 돈만 빌려주는 걸로 하세요. 그런 게 원청이 하청을 야금야금 잡아먹는 수법이거든요.”
“네? 그게 무슨……?”
“대기업들이 기술력 갖춘 중소기업을 그런 식으로 해서 먹잖습니까. 전 그걸 참 안 좋게 생각하거든요.”
“그래요? 저도 그건…….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죠.”
이실리프 어패럴은 이제 돈이 넘쳐난다. 그 돈을 최대 주주가 원청과 하청의 융화를 위해 쓰자고 한다.
누가 들어도 마음 흐뭇할 일이다. 그러니 만면에 미소 지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 우리 상품은 지속적인 물량 증가가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니 하청업체의 생산 능력이 대폭적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그럼요! 확실하게 키워주겠습니다.”
“하하, 네.”
기분 좋아하는 박 사장을 보니 현수 또한 흐뭇해졌다. 그렇기에 환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참, 마트와 백화점 영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그거요?”
기다리던 질문이라는 듯 박 사장은 자세를 바로하며 환한 웃음을 짓는다.
“어제 L백화점 바이어를 만났습니다. 러시아 수출용으로 제작한 항온 재킷과 바지를 들고 나갔지요.”
“뭐라던가요?”
현수의 물음에 박 사장은 서류 가방에서 뭔가를 꺼낸다.
“이게 이번에 새로 제작한 브로셔인데 한번 보시죠.”
페이지 수는 얼마 안 되지만 제법 두툼하다. 질 좋은 종이를 쓴 모양이다. 표지엔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이수연이 털 달린 재킷을 걸친 사진이 있다.
현수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라?”
“탤런트 겸 가수 이수연 양입니다. 아시죠?”
현수가 이수정의 남자친구라는 기사가 있었기에 그녀를 선택한 모양이다.
“네, 알죠.”
다음 장을 펼치니 여러 디자인의 재킷이 보인다. 그리고 아래엔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항온 재킷에 관한 내용이 있다.
“잘 만드셨네요.”
“수출용 브로셔는 따로 제작할 생각입니다. 제 생각엔 요즘 인기 최고인 이리냐 양이 어떨까 싶습니다. 러시아 사람이니 괜찮지 않을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리냐 양 하나로 되겠습니까? 추가로 외국인 모델을 하나 더 알아보시죠. 그리고 남자 모델은요? 누굴 점찍었습니까?”
“그야 당연히 전무님이죠.”
“네? 저요? 농담이시죠?”
“아뇨. 요즘 대세는 전무님입니다. 바쁘시겠지만 시간 내서 스튜디오를 방문해 주십시오.”
“안 됩니다. 제가 어떻게…….”
“모델료 톡톡히 쳐 드리겠습니다. 꼭 찍으셔야 합니다.”
“헐!”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인 듯싶기에 현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아는 외국 모델 있으면 추천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 아, 아는 사람이 하나 있기는 한데 모델을 하겠다고 할지는 모르겠네요.”
현수의 뇌리를 스친 인물은 예카테리나 일리치 브레즈네프이다. 도모비치 상사와 처음 계약을 체결할 때 드미트리가 데리고 왔던 하버드 대학 로스쿨 출신 변호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