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8
그래서 적당한 수준을 맞추느라 애를 먹었다. 아무튼 이를 해결하기 위해 흡입 마법진을 그렸다.
다음은 손실되는 열을 모두 잡아두기 위한 결계 마법진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외부로 빠져나가는 열을 몽땅 차단하는 효과를 가졌다.
다음은 스케일3)이 끼지 않도록 파이프 전체에 그리스 마법이 걸리도록 하는 마법진이다.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싶어 계면 활성 마법을 추가했다. 이 정도면 스케일이 절대 낄 수 없다.
이러면 원활한 열전달이 되어 효율이 올라간다.
다음은 수차와 터빈에 적용될 마법진이다. 이것들이 회전할 때 걸리는 저항을 줄여주는 리듀스 마법진과 원활한 회전을 위한 그리스 마법진을 중첩시켜 적용시켜 보았다.
효과는 실험을 해보면 알게 될 것이다.
내친김에 선박 엔진을 위한 마법진도 만들어냈다. 어차피 만들 것이니 시간 난 김에 미리미리 만든 것이다.
물론 개개의 엔진마다 제조사가 다를 것이니 현장에서 조금씩 수정하면 되도록 만들었다.
“휴우∼! 다 됐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낸 현수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밀린 숙제를 한몫에 해낸 것 같은 뿌듯함을 느낀 때문이다.
“이제 이쪽 일은 대강 준비되었으니 슬슬 저쪽으로 넘어가 볼까?”
마법진들을 아공간에 넣은 현수는 복장 점검을 했다.
이제부턴 아르센 대륙 최고의 마법사인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후후, 라세안은 잘 있겠지? 자, 마나여, 나를 아르센으로 데려다 줘.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천지건설 본사 옥상에서 스르르 사라졌다.
* * *
“흐으음! 여긴 역시…….”
싱그럽고 상쾌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자 청량감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이다.
“여긴… 알베제 마을 외곽이군.”
좌표를 확인한 현수는 피실 실소 지었다. 아드리안 공국으로 가야 하는데 실수한 것이다.
“내친김에 올테른을 들러봐야겠군. 케이상단 알론에게 주문해 놓고 안 찾아간 것이 있으니.”
만드라고라를 가급적 많이 구해달라고 해놓고는 그걸 챙기지 못했다. 아르센 대륙의 상인 가운데엔 신용을 목숨처럼 여기는 이들도 많다.
만일 알론이 그들 가운데 하나라면 비싼 만드라고라를 잔뜩 쌓아두었을지도 모른다. 이실리프 마탑에서 온 마법사라 했을 때 지나칠 정도로 정중하게 대했으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마법사 대부분이 괴팍한 성격 내지는 성품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실수한 건지도 몰라.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올테른을 떠난 날은 2월 2일이다. 그리고 오늘은 9월 22일쯤 되었을 것이다. 7개월 하고도 20일이 지났다.
이 정도면 장사에 지장을 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자금의 흐름을 막아놓은 셈이기 때문이다.
“가보면 알겠지.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또 한 번 현수의 신형이 사라졌다.
“여긴, 흐음, 제대로 오긴 왔군.”
현수의 신형이 나타난 곳은 헤론찜과 슬럼이 일품이었던 세실리아 여관 인근 공터이다.
“후후, 세실리아는 잘 있을까?”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던 순정파 세실리아를 떠올린 현수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비누를 줄 때 어찌나 좋아하는지 입이 함지박만큼 크게 벌어진 때가 생각난 때문이다.
현수는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케이상단으로 향했다. 일곱 달쯤 지났지만 별반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상단 입구에 당도하자 전형적인 상인 복장을 한 사내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선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상단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찾으시는 물건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정중히 묻는 상인을 본 현수는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알론을 보고 싶네. 불러줄 수 있겠는가?”
“알론 서기님이요? 저어, 누구시라고 할까요?”
이곳 케이상단 제7지부에서 가장 높은 이는 말링코 지부장이다. 다음이 서기인 알론이다.
말링코는 방향만 지시하고 서기인 알론은 지부의 대소사를 관장하며 상행에 관한 대부분의 결정을 내린다. 그런 직속상관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얼른 고개를 숙이며 조아린다.
“하인스 킴이라 하면 안다 할 것이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상인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수의 눈에는 조악해 보이지만 이곳에선 유용하게 쓰이는 것들이다.
나무로 만든 쟁기도 있고 물속에 들어가면 금방 끊어질 것 같은 갈대 비슷한 것을 꼬아서 만든 그물도 있다.
쇠스랑 비슷한 것도 있는데 목재다. 삽이 있는데 철이 귀해서 그런지 날 부분만 쇠로 되어 있고 나머진 목재다.
호미도 목재다. 낫은 없지만 정글도 같은 농기구도 있다. 이것만은 철로 만들어졌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조악했다.
하지만 이곳에선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하나하나를 살피던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론이 만드라고라를 준비해 주었다면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지를 결정한 것이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그래, 잘 있으셨는가?”
“그럼요. 그런데 어찌 소인에게 하대를 하지 않으십니까? 전처럼 말을 놓아주십시오. 듣잡기에 송구합니다.”
“송구하기는, 보아하니 잘 있었던 듯싶으이.”
“네, 대마법사님의 염려 덕분에 아주 잘 지냈습니다요. 그런데 이곳엔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알론은 지나치다 할 정도로 굽실거린다.
그리고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다. 현수가 대륙에 소문난 바로 그 마법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일전에 만드라고라를 가급적 많이 구해달라는 청을 해놓고도 깜박하고 그냥 있었네.”
“아! 그건 저희가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올까요?”
“그래, 그래주면 고맙겠네.”
“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마친 알론은 뒷문을 열고 건물 뒤쪽으로 사라졌다. 아까 안내를 해줬던 상인은 구석에 서서 부들부들 떨고 있다.
“날씨도 그리 서늘하지 않거늘 어찌 그리 떨고 있는가?”
“네? 저, 저요? 저, 저, 저, 저는… 아깐 대마법사님이신 줄도 모르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흐흑! 집에 노모와 어린 아이들이 있습니다요.”
“……?”
이게 웬 황당한 상황인가 싶어 바라보니 바닥에 부복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대, 대마법사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이놈의 눈만 빼시고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흐흐흑! 제발이요.”
“……!”
현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르센 대륙에서 마법사들이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능히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7장 케이상단에서
‘허어, 이거야 원……. 여기 마법사들은 심기만 어지럽혀도 사람 목숨을 빼앗았나? 흐음, 이건 아니지. 나중에 버르장머리들을 고쳐 놓아야겠군.’
“대마법사님,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제발 용서하여 주시길 간청 드리옵니다. 흐흐흑!”
“이제 그만! 용서해 줄 테니 울지 마시게.”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고개를 번쩍 든다. 그런 그의 눈에선 믿을 수 없다는 빛이 흘러나온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상념이 있다. 용서해 준다고 할 때 얼른 상황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본능이 만들어낸 것이다.
“네? 저,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마법사님! 앞으로 10년 동안 매일 아침마다 대마법사님을 위해 주신께 기도드리겠습니다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요.”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거듭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과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찬물 한 잔 마시고 싶구만. 떠다 주겠는가?”
“아이고, 물론입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마친 상인 역시 뒷문을 열고 사라진다.
“여, 여기 가져왔습니다.”
공손히 두 손으로 건네는 물잔은 나무로 만든 것이다.
케이상단은 아직 중소 상단의 범주를 넘지 못하였기에 카이로시아의 이레나 상단처럼 주석 잔을 쓸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레나 상단과는 사뭇 다르다. 조금 허름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낡고 볼품없다.
“고맙네.”
“네, 감사합니다.”
물잔을 받자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뒷걸음질로 물러난다.
벌컥벌컥―!
잔의 용량은 약 500㎖ 정도 된다. 현수는 거의 가득 담겨 있던 물을 다 마셨다. 맛이 좋다는 느낌이 든 때문이다.
“시원하군. 잘 마셨네.”
“네에, 뭐 더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아니, 없네.”
상인은 현수가 내려놓은 물잔을 조심스럽게 들고 나간다. 지극히 공손한 모습이다.
삐이걱―!
문이 열리고 알론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들어선다. 그걸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천천히 뚜껑을 연다.
“저희 상단이 총력을 기울여 수집한 만드라고라입니다.”
“흐음, 그런가? 어디 보세.”
아르센 대륙에서 만드라고라는 100골드 정도에 거래된다. 1골드가 100만 원쯤 하니 하나당 1억이다.
박스 안에는 23개의 만드라고라가 보관되어 있었다.
“이건 구한 지 얼마나 되는 건가?”
“3월에 구한 것도 있고 4월에 구한 것도 있습니다. 가장 위쪽에 있는 건 지난 8월에 구한 겁니다. 더 많이 구해놓으려 했지만 저희 상단의 능력으론 이게 최선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네. 이 정도면 되었네. 내가 가져가도 되지?”
“무, 물론입니다.”
알론이 얼른 고개를 조아린다.
“가격은?”
“하, 하나당 90골드만 주십시오.”
“……!”
카이로시아 덕분에 아르센 대륙의 상품 가격을 대충 안다. 지금 알론은 취해도 좋을 이득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
자신을 위해서 그런다는 것을 알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상자째 아공간에 담았다. 그리곤 골드화를 꺼냈다. 2,070골드이다.
“상품 대금은 여기 있네.”
“아, 네에.”
받을 돈을 받는 것이지만 알론은 황공하다는 표정이다. 현수는 추가로 230골드를 더 꺼냈다.
“이건 그간의 보관료이네.”
“네? 이, 이건 안 주셔도…….”
“그냥 받게.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니.”
“가, 감사합니다.”
알론은 얼른 고개를 조아린다. 조금 전 알론은 말링코 지부장에게 갔었다. 얼마 전 상행을 쫓아 나갔다가 심각한 부상을 당해 현재 병석에 있다. 그래서 하인스 킴 마법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도 오지 못한 것이다.
말링코 지부장은 그간 상단 자금을 꽁꽁 묶어두었던 만드라고라가 드디어 처분된다는 소식에 이빨을 드러내며 좋아했다.
그것을 구해달라던 인물이 하인스 킴 대마법사이기에 다른 이들에겐 팔 수 없던 물건이다. 이실리프 마탑의 마법사는 어느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언터처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은 안 했지만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자금 경색 상황에서 어찌 원활한 상행을 할 수 있었겠는가!
케이상단은 규모가 작기에 2,300골드만으로도 피해를 입을 정도인 것이다.
오늘 2,300골드를 받음으로써 숨통은 트이게 되었지만 기회비용4)으로 잃은 게 적지 않다.
현수는 이를 짐작하고 웃음 지었다.
“그나저나 이 상단에선 어떤 물건을 취급하나?”
“네? 아, 네에. 저희는 곡물과 소금, 그리고 몬스터 가죽과 그걸 가공한 가공품들을 주로 취급합니다.”
“공산품은 없나?”
“네? 공산품이라니요? 그게 뭡니까?”
“아! 여긴 그런 개념이 없지? 흐음, 일단 상단 창고 좀 구경시켜 주겠는가?”
“창고요? 뭐, 별것도 없는데.”
“아무튼 가세.”
“네, 제가 모시겠습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 알론이 앞장서서 밖으로 나간다.
“상단 창고라는 게 이렇군.”
현수의 눈에 뜨인 것은 허접 그 자체이다. 각종 곡물을 담은 자루가 제법 많았지만 자루 자체가 낡았다. 창고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 있어 그런지 구석마다 쥐똥이 수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