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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489화 (489/1,307)

# 489

다음 창고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오크 가죽이 쌓여 있다. 그다음엔 짠내 나는 소금 자루들이 있다. 1톤 트럭의 절반 정도 되는 양이다.

다음 창고에 쌓여 있는 것들은 허접의 극치였다.

나무로 대강 깎아 만든 각종 농기구들이 있고, 알베제 마을에서 만든 듯한 활과 화살이 쌓여 있다.

하나같이 조악해 보인다.

더 있느냐는 말에 알론은 이게 끝이라 대답했다. 케이상단의 규모가 짐작되는 상황이다.

현수는 생각에 잠겼다. 무엇을 꺼내놓아야 이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었던 것이다.

“저어, 마법사님…….”

“흐음, 일단 몇 가지가 개선되어야 할 것 같군. 일단 벌레 좀 잡고 쥐들이 드나드는 것부터 막아보세.”

말을 마친 현수는 가장 먼저 들렀던 곡물 창고에 들어가 뚫린 구멍들을 막고 연막탄을 터뜨렸다. 다음엔 벌레와 쥐의 침입을 막는 초음파 발생 마법진을 만들었다.

연막탄이 효능을 발휘하는 동안 소금 창고에 들렀다.

이곳에선 클린 마법 먼저 구현시켰다.

그리곤 건조 마법진을 만들어서 부착했다. 다음엔 5톤 트럭이 가득 찰 분량의 소금을 꺼냈다.

알론은 눈을 크게 떴다. 이곳은 강을 끼고 있지만 바다까지는 엄청 멀다. 하여 소금이 몹시 귀하다.

당연히 매우 비싼 품목이다. 그런 걸 산더미처럼 꺼내놓으니 놀란 토끼처럼 눈만 크게 뜨고 있다.

“자, 이제 다음 창고로 가세.”

“네? 아, 네에.”

현수의 말에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은 알론은 얼른 굽실거리며 다음 창고로 이동했다. 이번 창고엔 목제 농기구들이 잔뜩 쌓여 있다. 물론 매우 허접한 것들이다.

“흐음, 어디 보자.”

잠시 생각을 정리한 현수는 아공간에 담겨 있던 철제 농기구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삽, 호미, 괭이, 쇠스랑, 낫, 홀태(벼 등을 훑을 때 사용하는 탈곡기), 곡괭이 등이다.

알론은 귀하디귀한 철로 만들어진 농기구들이 끝도 없이 나오자 안색이 창백해진다.

상단 자금을 총동원해도 이미 꺼내 놓은 소금조차 매입할 수 없다. 그런데 그보다 더 비싼 철제 농기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이니 어찌 대금을 지불할지 걱정이 앞선 때문이다.

다음엔 활과 화살 등이 쌓여 있는 창고로 이동했다.

“흐음, 이곳엔… 그래!”

생각을 정리한 현수는 각종 비누를 꺼냈다.

그리곤 카이로시아의 이레나 상단에만 주었던 꽃 그림이 그려진 접시와 찻잔 등 각종 그릇을 꺼냈다.

테세린과 올테른은 바벨 강을 사이에 둔 도시이다. 그런데 강폭이 너무 넓어서 수평선이 보일 지경이다.

짠물만 아닐 뿐 바다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이레나 상단이 보유한 상품들은 이곳 올테른까지 건너오지 않았다. 미판테 왕국 내부의 수요를 충당하기에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알론은 화사한 꽃 그림이 그려진 접시 등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세상에 태어나 이처럼 곱고 균일한 식기는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상인이기에 이건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물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마, 마, 마법사님! 이, 이, 이, 이것들은… 이, 이, 이것들은 어떻게……. 마, 마, 마, 마법사님!”

알론은 담대하다는 평가를 받는 상인이다. 그런데 몹시 말을 더듬고 있다. 너무도 놀란 때문이다.

“이것들을 팔게.”

“네? 저, 저희는 이걸 매입할 자금이 없습니다.”

“매입? 누가 이걸 매입하라 했나?”

“그, 그럼……?”

알론은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는다.

“위탁 판매를 하게.”

“네? 위, 위탁 판매라니요? 그게 뭡니까?”

“물건은 내가 주었으니 자넨 팔기만 하라는 뜻이네. 판매한 금액 중 5할은 케이 상단이 갖고 나머지 5할만 내게 주게.”

“네? 네에?”

“비싸게 팔게. 알았나?”

“아, 네에. 그, 그, 그, 그럼요.”

“판매 대금은 쉐리엔으로 받겠네.”

“네? 쉐리엔이라니요? 혹시 길가에 널려 있는 잡초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찌 그걸로…….”

먹고살기에도 바쁜 동네인지라 이곳에서도 쉐리엔은 잡초 취급을 받는 모양이다.

“마법사님, 쉐리엔은 가치가 없는 잡초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걸로 지불하란 말씀이십니까?”

알론은 머릿속으로 산을 열 개쯤 합쳐 놓은 분량의 쉐리엔을 떠올렸다. 팔아야 할 철제 농기구나 비누, 그리고 접시와 찻잔 등의 가치는 엄청난 금액이기 때문이다.

“줄기와 뿌리, 그리고 열매를 따로따로 분리해 주게.”

“네?”

“채취해서 그냥 쌓아놓기만 하면 금방 썩을 테니 내가 담아놓을 용기를 주겠네.”

“네?”

알론은 계속해서 반문만 하고 있다.

“보존 마법진이 그려진 컨테이너라는 걸 주겠네. 거기에 쉐리엔을 채취해서 담아주게.”

“진담이신 겁니까?”

“그럼 지금껏 내 말이 농담인 줄 알았나?”

“쉐리엔은 잡초인데 그걸 어디에 쓰시려고……?”

“잊었는가? 나는 마법사이네. 각종 시험을 해보려면 시약 등 여러 가지가 필요하네.”

“그, 그래도 쉐리엔은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잡초인데.”

“아니네. 내겐 꼭 필요한 것이네. 그러니 농담이라 여기지 말고 제대로 채취해 줘야 하네. 알았나?”

현수의 정색한 표정을 읽은 알론은 얼른 허리를 접었다.

“알겠습니다. 제대로 채취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쉐리엔을 채취할 곳으로 안내하게. 컨테이너를 놓아주겠네.”

“네? 아, 네에.”

현수는 알론과 더불어 다니며 이곳저곳에 컨테이너들을 배치했다. 각각의 컨테이너엔 보존 마법과 공간 확장, 그리고 경량화 마법진이 부착되었다.

이렇게 하면 최소 3년간은 내용물이 말라비틀어지거나 부패하지 않을 것이다.

40피트짜리 컨테이너엔 쉐리엔을 20톤 정도 담을 수 있다.

하지만 공간 확장과 경량화 마법은 이를 100톤으로 대폭 상향시키게 된다. 이런 컨테이너를 200개나 깔아놓았다.

알론은 두 달 안에 모두 채워 넣겠다고 했다. 대한약품 민 사장이 들었다면 아주아주 반색할 소리이다.

* * *

“아! 왜 이제 오는가?”

“어! 미안. 내가 조금 늦었지?”

“그래! 하룻밤이면 될 줄 알았는데 벌써 며칠이 지났는지는 아나? 케이트가 그렇게 좋았어? 아예 애를 낳아서 데리고 오지그래? 그나저나 뼈와 살이 타는 밤을 보냈나?”

“미안하네. 내가 미안하다 하지 않나.”

라세안이 노골적으로 타박했지만 현수는 짧게 대답하곤 입을 다물었다.

“어머! 오셨군요. 대체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

카트린느의 물음에 현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길잡이 머피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현수가 없던 며칠간 머피는 너무도 안락한 시간을 보냈다.

음식은 카트린느가 했고, 밤엔 텐트의 지퍼를 내리고 따뜻한 침낭 속에서 잠들었다. 널리고 널려 있던 몬스터들은 한 번도 다가오지 않았다. 물론 라세안의 존재감 때문이다.

하여 하루에 두 번 설거지만 하면 되었다.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그건 형편없는 음식 맛이다.

카트린느가 만든다고 만들었지만 그건 인간이 먹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라세안이 거들었지만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하여 본인이 만들겠다고 했다가 핀잔만 들었다. 카트린느 본인이 꼭 만들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보인 때문이다.

“자, 이제 출발하세.”

“그래!”

나이젤 산맥의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라세안은 짓궂은 질문만 해댔다.

케이트와의 밤이 어땠느냐고 집요하게 물은 것이다.

처음엔 적당히 꾸며서 대답했지만 점점 더 상세하게 물었기에 그다음부터는 일절 대꾸하지 않고 주변만 살폈을 뿐이다.

그러자 라세안은 스스로 이야기를 꾸며낸다.

현수와 케이트가 만리장성을 백 번은 만들었다가 허문 듯한 이야기이다. 하도 허무맹랑해서 피식피식 웃어주자 이야기의 심도는 점점 더 깊어지고 적나라해졌다.

어쩌다 가까이 다가왔던 카트린느가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기에 둘은 껄껄대며 웃었다. 라세안은 자기가 한 이야기가 사실에 어느 정도 부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낄낄댔다.

앞장서서 걷던 머피도 계속해서 실소를 지었다. 한국이나 아르센 대륙이나 음담패설은 통하는 모양이다.

산맥을 넘는 동안 몬스터는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괜한 귀찮음이 싫었던 라세안이 존재감을 드러낸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죠.”

“여기? 오, 그러고 보니 경치가 괜찮군.”

머피가 야영하자고 멈춘 곳은 울창한 숲과 절벽이 어우러진 풍광 좋은 곳이었다.

“근처에 계류가 있어요. 물은 제가 떠오겠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머피가 물통을 들고 숲속으로 사라진다.

“카트린느 양은 여기 꼼짝 말고 있어요. 없어지면 또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네? 아, 네.”

현수의 말에 카트린느는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이 사라지는 바람에 현수가 어떤 일을 해야 했는지 라세안으로부터 충분히 들은 때문이다.

“조리 기구에도 손대지 말고.”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자신이 얼마나 요리를 못하는지 충분히 알기에 까트린느는 짜증스런 반응을 보인다.

“그러게 마법 익힐 시간 반만 쪼개서 요리 연습이나 하지.”

“쳇! 알았다구요.”

카트린느가 입술을 삐죽이자 라세안은 피식 웃는다.

“자넨 식사를 만들게. 오늘도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

현수가 왔기에 이제 제대로 된 음식과 소주를 들이켤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라세안은 몹시 기분 좋은 듯하다.

현수가 조리 기구들을 모두 세팅했을 즈음 머피가 당도했다.

“오늘은 뭐를 해줄 건가?”

“오늘 메뉴는 깐풍기5)와 라조기6)라는 걸 만들 생각이야.”

언젠가 읽었던 요리책에 쓰인 레시피는 이미 머릿속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렇기에 능숙한 주방장처럼 식재료를 가다듬었다. 머피는 멍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라면 대륙 최고의 마법사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요리까지 잘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잠긴 것이다.

“이 산맥을 벗어나는 데 앞으로 얼마나 걸리겠는가?”

“이런 속도로 간다면 보름쯤이면 됩니다.”

“산맥을 벗어나면 어떤 영지가 있지?”

“몬테규 영지와 캐플렛 영지가 나옵니다.”

“몬테규와 캐플렛이라고? 후후, 설마 그 영지들도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니겠지?”

현수가 이 질문을 한 이유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두 가문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이다.

로미오는 몬테규 가의 아들이고 줄리엣은 캐플렛 가의 딸이다. 그리고 두 집안은 서로 원수지간이다.

이걸 기억하기에 설마하는 마음으로 물은 것이다.

“아니긴요. 공국 최고의 앙숙입니다.”

“정말인가? 그거 흥미롭군. 그럼 요리하는 동안 그 두 가문에 관한 이야길 해보게.”

“네? 아, 네. 먼저 몬테규 가에 관한 말씀을 드릴게요. 몬테규 가문은 백작가로서 공국의 검이라는 칭호를 듣고 있습죠. 그런데 그 칭호는…….”

원래 몬테규 가와 캐플렛 가의 사이는 매우 좋았다. 이는 아드리안 공국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의 일이다.

아무튼 현 영주들의 4대 조상들은 소드 마스터였다.

둘은 매일매일 검을 맞대고 서로의 성취를 따라잡으려 노력하는 좋은 의미의 라이벌이고 친우였다.

자녀들이 성장하자 둘은 서로의 자식을 내놓아 혈연으로 맺어졌다. 몬테규의 아들과 캐플렛의 딸이 결혼을 했고, 몬테규의 딸은 캐플렛의 아들과 결혼을 했다.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받았기에 두 집안은 대를 이어 소드 마스터를 배출하는 경사를 맞았다.

그리고 그다음 대에서도 소드 마스터가 배출되었다.

그 후에도 두 가문은 서로의 자식을 배우자로 맞아들였다.

그러다 보니 유전적인 문제가 발생되었다. 근친 교배를 하면 신체적 체력 감소, 체격의 왜소함, 성격의 소극적 신경과민, 치아의 이상, 기형 출산 등의 문제점이 발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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