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0
그 결과 전전대 영주부터 소드 마스터를 배출하지 못했다.
캐플렛 가의 가주는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었고, 몬테규 가는 상급이었다.
같은 소드 익스퍼트라 할지라도 상급과 최상급에는 엄연한 격차가 존재한다.
아무튼 캐플렛 가의 가주는 공국의 검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물론 몬테규 가는 아니다. 전대 영주 땐 역전되었다. 몬테규 가의 가주가 공국의 검이 되고 캐플렛 가는 아니다.
현재는 캐플렛 가의 영주가 공국의 검이다.
문제는 두 가문이 가진 비전이다. 오로지 가주에게만 전해지던 마나 심법과 검법 등 비전을 빼내기 위한 암투가 벌어졌다.
가주의 부인들이 상대 가문 쪽 사람이기에 부부 간의 불신이 극에 달했다. 며느리를 믿을 수 없으며, 사위 또한 믿을 수 없는 놈이 되어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두 가문은 자연스럽게 앙숙 관계가 만들어졌다. 하여 툭하면 전쟁이다.
상대의 영지를 빼앗기 위한 영지전이 아닌지라 공왕은 물론이고 공작들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다.
우선 둘 다 국왕파나 귀족파에 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둘은 전쟁은 벌이되 상대의 목숨은 빼앗지 않는다. 혈연으로 따지고 보면 조카가 되거나 외손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결을 벌여 승자가 되면 상대에게 한 가지를 요구한다.
10년간 검을 잡지 말라는 것이 그것이다. 상대의 성취가 나아지는 꼴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두 가문은 현재 매월 말일마다 대결을 벌인다. 두 가문의 영지가 만나는 곳에는 이를 위한 결투장이 조성되어 있다.
처음엔 가문 사람들만 대결에 임했다. 그러다 용병들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많은 돈을 받는 대신 지면 10년간 검을 쥐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대결에 임한다.
“웃기는군. 그깟 칭호가 뭐라고.”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두 가문에겐 자존심이 걸린 일입니다. 그래서 그 칭호를 얻으려고 가산을 몽땅 탕진해 가며 대결하고 있는 거죠.”
“가산을 탕진해?”
“네, 용병들을 엄청 고용하니 돈이 많이 들죠.”
“그렇겠군. 근데 그렇게 대결을 하면 양쪽 가문 사람들 가운데 검을 놓은 사람들이 많겠군.”
“그럼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양가 사내들 가운데 80%는 검을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젠 여자들도 검을 듭니다.”
“여자들도?”
“네.”
“그렇군. 알겠네.”
잠시 후, 넷은 각자의 텐트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현수는 라세안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카트린느는 귀를 틀어막은 채 괴로워하고 있다. 벌써 며칠째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한 때문이다.
반면 길잡이 머피는 벌써 잠들었다.
잠자리에 들었던 현수는 텐트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글자 그대로 별이 쏟아진다.
태양을 제외하고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은 알파별인 시리우스(Sirius)이다. 시등급이 ―1.5등급이다.
북극성은 2.5등급이다.
그런데 그런 별들이 널리고 또 널려 있다. 깊은 밤이지만 별빛만으로도 사물이 식별될 정도이다.
“별이 참 많구나.”
지구에선 볼 수 없는 광경이기에 현수는 한참 동안이나 밤하늘에 시선을 주었다. 시선을 뗄 수 없는 장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새벽이 되었다.
짹, 짹, 짹!
산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즈음 현수는 팔베개를 한 채 풀밭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것만은 지구와 똑같았다. 신새벽의 고요함을 깬 것은 라세안이다.
“뭐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벌써 다 자고 일어난 거야?”
“어! 그래. 자네도 다 잔 거야?”
“하암! 그럼. 근데 배가 좀 고파.”
“어이구, 돼지! 알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현수는 무얼 만들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샌드위치를 떠올렸다. 만들기 쉽고, 먹기도 편하면서, 영양가도 있고, 길을 가면서도 먹을 수 있다.
식빵, 상추, 치즈, 토마토, 햄 등을 꺼내 금방 만들었다.
“그건 뭔가? 오늘은 좀 다르네. 딴 날은 지지고 볶고 삶고 데치기를 했잖은가. 근데 오늘은 왜 썰기만 해?”
“일단 먹어봐. 참, 우유도 먹어야지?”
아공간에 담긴 흰 우유를 한 컵 가득 따라주자 이게 웬 건가 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건 뭔가?”
“우유라는 거네. 몸에 좋은 거니 마시게. 참, 따끈하게 데워주지. 히팅!”
따끈하게 데워진 우유에 소금을 조금 넣어 건네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라세안은 샌드위치 한 덩이를 뚝딱 씹어 삼키곤 새것에 손을 대고 있다.
“으이그, 누가 쫓아오냐? 왜 이리 급하게 먹어?”
“이, 이거? 마, 마시써서. 정말 되게 마시써!”
씹느라 발음이 이상했지만 알아들을 만했다.
“하암, 지금 뭐하는 거예요?”
카트린느가 눈을 비비며 다가오자 현수는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건넸다.
“일어났어? 배고프지? 이거 먹어.”
“네, 고맙습니다.”
카트린느는 제니스에게 잡혀갔다 온 이후 현수 대하기를 하늘 대하듯 한다. 그 사나운 드래곤과 싸워서 구해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유도 마셔.”
“네, 마탑주님! 감사합니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 카트린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부드럽고, 달콤하며, 고소하고, 맛이 있기 때문이다.
현수가 내민 우유는 고소하다. 가히 환상적인 궁합이다.
잠시 후, 머피도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현수는 계속해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최소 열 명은 먹을 분량이다.
셋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꾸역꾸역 먹었다. 우유도 1인당 1리터씩은 마셨다.
“어휴! 배불러. 더 이상은 못 먹겠어.”
“크으! 토할 것 같아. 너무 많이 먹었어.”
“으윽! 목구멍까지 찼나 봐.”
“그러게 작작 먹지. 돼지처럼 그렇게 먹으니 안 그래?”
“끄으윽! 그러게. 너무 많이 먹었어.”
“휴우∼! 저는 움직일 수도 없어요.”
“죄송합니다. 너무 맛이 있어서…….”
먹기 시작한 시각은 6시 무렵인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오전 10시가 넘어서이다. 셋이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현수는 이들이 자고 일어난 텐트 등을 주섬주섬 거둬들였다.
나이젤 산맥을 모두 벗어나기까지 현수는 이들에게 간단한 음식만 주었다. 다시는 과식하지 못하도록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주지 않았다.
보름 만에 산맥을 벗어나니 탁 트인 평야 지대가 나타난다.
“자아! 이게 지긋지긋한 산맥은 벗어났습니다!”
머피의 말에 카트린느가 탄성을 지른다.
“와아, 평야다! 이제 좀 살겠네요.”
울울창창한 산맥 속엔 길도 없다. 설사 길이 있었다 하더라도 1년만 지나면 그 길은 사라진다.
너무도 울창해서 10m 앞도 제대로 식별 불가능한 숲의 연속이었다. 어떤 곳은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평야 지대가 나타나자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른 것이다.
“흐으음! 이제 얼마 안 남았군.”
수도인 멀린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하여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것이다.
“뭘 이까짓 걸 가지고. 라수스 협곡은 남북으로 1,000㎞야. 거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숲도 아냐.”
라세안의 말에 현수는 피식 실소를 지어 보였다. 라세안 역시 울창한 숲속에서 수없이 투덜거렸던 것이다.
하긴 플라이 마법으로 슈웅 날아가면 될 걸 그러지 못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아무튼 시야가 탁 트이니 좋기는 하네. 자, 가세.”
현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8장 몬테규 가 vs 캐플렛 가
나무들이 조금씩 성글어지더니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보인다. 그것은 점점 길의 형상을 갖춘다.
“어휴! 이제 좀 살 만하네요.”
정글도를 꺼내 울창한 수풀을 베며 전진한 것만 거의 한 시간이다. 그런데 길이 나타나니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카트린느가 중얼거린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으니 목책이 보인다. 안에 있던 경비병인 듯한 사내들이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내다본다.
“멈춰라! 어디서 온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C급 용병 하인스라 하오.”
“나이젤 산맥을 거쳐 왔나?”
“그렇소.”
“흠, 먼저 용병패를 던져라.”
이곳에 오기 전 현수와 라세안은 당분간 용병 행세를 하기로 했다.
아드리안 공국은 현수가 보호해 줘야 할 곳이다. 그런데 별것도 아닌 것 때문에 두 가문이 가진 것을 모두 소진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파악하고 싶어 그런 결정을 한 것이다.
“나머지들의 신분증도 던져라.”
“내 건 여기 있소.”
길잡이 머피 역시 용병으로 등록되어 있다. 그렇기에 용병패를 던졌다. 다른 용병패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한쪽에 길잡이를 뜻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건 내 것이다.”
라세안은 A급 용병패가 있다. 피리안 영지에서 만든 것이다.
“흐음, 용병들이군. 그런데 인원이 이것뿐이오?”
“그렇소.”
“으으음! 나머진 모두 죽었는가?”
경비병은 나이젤 산맥을 관통하는 동안 몬스터의 공격으로 많은 용병이 죽었을 것이라 짐작한 듯하다.
“……!”
일행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유감이오. 근데 저 아가씨의 신분은 뭐요?”
“변경백이신 피리안 백작님의 영애이시다. 예를 갖춰라.”
“앗! 그,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삐이꺽―!
목책의 문이 열려 안으로 들어가니 경비병들이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변경백인 피리안 백작은 존경받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긴 어느 영지에 속하나? 몬테규? 캐플렛?”
“몬테규 영지요.”
“여관은 있지?”
“물론이오. 저쪽으로 가면 하나 있수. 값이 좀 비싸다는 게 흠이지만 음식 맛은 일품이오.”
A급 용병의 물음이었는지라 경비병은 순순히 대답해 준다. 이에 라세안이 고맙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다.
“고맙네. 자, 여관으로!”
“어서 옵셔! 여행자이십니까?”
일행을 맞이한 것은 열 살쯤 된 꼬맹이다. 보나마나 이 여관의 아들일 것이다.
“음식도 먹고 목욕도 할 거야. 다 되지?”
“아이고, 그러믄입쇼. 자자,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엄마! 손님 오셨어요!”
“자자, 이쪽으로…….”
여관 1층은 다른 곳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그런데 손님이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가장 너른 테이블을 차지했다.
“이 집에서 제일 잘하는 걸로 가져와. 참, 방 많지?”
“그럼요. 1인실로 네 개 준비할까요?”
“그래. 각 방마다 따끈한 목욕물도 준비해 줘.”
“네, 알았습니다요. 그럼 식대와 방값, 목욕물 등 다 합쳐서 일 인당 6실버입니다요.”
아르센 대륙의 여관 대부분 1인실 일일 숙박비 3실버, 식대 1실버, 그리고 목욕물 2실버이다.
한화로 환산하면 6만 원쯤 된다.
꼬맹이가 합산 금액을 말하지 않고 1인당 금액을 이야기한 것은 대부분의 용병이 더치페이를 하기 때문이다.
“여기 있다.”
팅, 팅, 팅―!
현수의 손을 떠난 은화 세 개가 꼬맹이의 손으로 정확히 떨어진다. 10실버짜리이다.
“나머진 팁이다.”
“아이고, 고맙습니다요. 정말 고맙습니다.”
꼬맹이는 혹시 마음이 변할까 싶었는지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쪼르르 달려간다.
“엄마,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달래요. 4인분이에요. 내가 도와줄게요.”
꼬맹이가 주방 안으로 사라진 뒤에야 어두컴컴한 실내의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엔 제법 공들여 지은 듯한 여관의 내부는 세월의 풍파가 드러나 있다. 곳곳에 창같이 뾰족한 것에 찔린 흔적이 보이고, 검이나 도로 베어진 것들도 보인다.
안에서 많은 싸움이 벌어졌음을 의미한다.
“흐음! 여관이 여기 하나밖에 없다고 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인지라 다들 말이 없다.
“자아, 셋이 먹다 둘이 죽어도 모를 진짜진짜 맛있는 스튜와 스테이크입니다. 참, 세크 주는 엄마가 서비스로 드리는 겁니다. 한 잔씩 맛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