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1
꼬맹이가 분주하게 오가며 접시들을 세팅한다.
나무로 만들었지만 시커멓다. 기름기를 먹어서이고, 제대로 설거지가 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술잔도 마찬가지이다.
현수는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라세안과 카트린느, 그리고 머피의 눈에는 괜찮은 듯 거리끼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흐음, 맛을 어떠려나?”
라세안이 먼저 스튜 한 숟갈을 떠먹는다.
“괜찮네. 마탑주님 솜씨만은 못하지만.”
“감사히 먹겠습니다.”
“고마워요.”
카트린느와 머피가 이내 폭풍 흡입을 시작한다. 그간 일부러 맛없는 음식을 소량만 만들어 먹인 결과이다.
“후와, 오랜만에 포식했네.”
라세안이 부른 배를 두드리며 싱긋 웃음 짓는다. 이럴 때 보면 정말 인간인 것 같다.
서비스로 주었던 세크 주의 달달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셋은 술을 곁들였다. 하여 얼굴이 모두 뻘겋게 달아올라 있다.
“자자! 목욕 먼저 하고 내려오자고. 알았지?”
현수가 먼저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곤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사우나를 좋아하지만 지난 보름간 제대로 된 목욕을 하지 못했다. 작은 개울 몇을 만났지만 너무 얕았던 때문이다.
“흐음! 뜨뜻하군. 아공간 오픈!”
현수는 아로마 오일 몇 방울을 목욕물에 떨어뜨렸다. 그리곤 상쾌한 향을 맡으며 기분 좋은 목욕을 했다. 때를 밀고 장미향 비누로 마무리를 했다.
의복은 모두 새것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 보니 아르센에서 입었던 의복을 세탁하지 않았구나. 지구에 가면 세탁소를 꼭 들러야겠어.”
방송 촬영 때 쓰는 의복이라 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새 의복을 입고 1층으로 내려가나 라세안이 세크 주를 마시고 있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갈 거지?”
“예서 영주성까지 거리는 얼마나 되는데?”
“걸어서 이틀이래.”
“그래? 그럼 그러지. 계속 여기 있을 건가? 난 밖으로 나가서 구경이나 할 생각인데.”
“귀찮아. 그냥 여기서 이거나 마시고 있을게.”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어! 저기 카트린느 내려온다. 웬만하면 같이 가.”
“왜?”
“자네가 점찍었다며? 내 것도 아닌데 같이 떠들기 싫어.”
“…그러지.”
드래곤은 일생의 대부분을 홀로 지낸다. 하여 번거롭고 귀찮은 것들을 싫어한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여 준 것이다.
“카트린느, 나 산책 갈 건데.”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우중충한 여관 1층에 머물기보다는 아직 환한 밖이 나을 것이기에 환히 웃으며 다가온다.
“자, 그럼 가지.”
“호호, 네.”
현수와 카트린느가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린다. 그리곤 환한 빛과 함께 기사와 병사들이 들어선다.
“A급 용병은 어디 계신가?”
“…누구십니까?”
“나는 몬테규 영지의 기사 로렌트이다. A급 용병이 이 여관에 있다는데 누군가?”
사내라곤 현수와 라세안뿐이다. 머피는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둘 다 25세 정도로 보인다.
A급 용병으로 인정받으려면 최소한 소드 익스퍼트 중급은 되어야 한다. 그런데 25세엔 그만한 성취를 이루기 어렵다.
새파랗게 젊기에 둘을 보면서도 A급 용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은 것이다.
“A급 용병은 왜 찾으슈?”
“뭐라고? 찾으슈? 지금 네놈이 감히 용병 주제에 준귀족이자 기사인 내게 찾으슈라고 했나?”
로렌트는 40대 중반이다. 그리고 몬테규 백작으로부터 준남작 작위를 받았다. 비록 단승이지만 귀족이다.
그런데 새파랗게 어린 평민이 버르장머리 없이 반말 비슷하게 지껄이자 화가 난 것이다.
“아따 왜 화를 내슈? A급 용병 찾는다 하지 않았소?”
“그래! 이 여관에 있다고 들었다! 어디에 있느냐?”
로렌트는 잠시 전의 분노를 잊은 듯 눈빛을 반짝인다.
심프슨 알몬 드 몬테규 백작은 요즘 캐플렛 가의 가주 그레고리 가렌 폰 캐플렛 백작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다.
반년 전 있었던 기사대전에서 두 가문은 각기 용병을 내세웠다. 둘 다 A급이다. 그 결과 몬테규 가의 용병이 패했다.
덕분에 돈은 돈대로 쓰고 체면은 왕창 구겨졌다.
다음 대결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가문을 대표할 사람이 없다. 아드리안 공국 전체에 A급 이상의 용병을 고용하겠다는 소문을 냈다. 통상 고용 금액의 열 배를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원자 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이다.
대결에서 이기면 고용 수당 이외에 한동안 제대로 된 칙사 대접을 받겠지만 패하면 10년간 검을 쥘 수 없다.
용병이 검을 잡지 못하면 고용될 수 없다. 이건 10년간 수입이 끊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지원자가 없는 것이다.
하여 눈에 불을 켜고 용병이나 자유기사들을 찾고 있다. 그런데 A급 용병이 영지에 들어섰다는 보고가 있었다.
하여 기사단 부단장인 로렌트를 급파했다.
현재 로렌트의 허리엔 검이 매달려 있지 않다. 기사대전에서 패한 결과이다.
2년 전까진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다. 지난 2년간 수련용 검조차 쥐지 못해 얼마나 퇴보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8년 동안 검을 쥘 수 없다.
얼마나 더 퇴보할지 알 수 없다. 다시 검을 쥘 수 있게 되었을 때는 50살이 넘어서이다.
들어버린 나이, 빠져 버린 근육, 퇴보된 감각은 더 이상 검사라는 말을 못하게 될 수 있다. 이미 기사로서 끝난 것이다.
“A급 용병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왜 찾는지 먼저 말해주시오.”
라세안의 물음에 로렌트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런 경을 칠……. 네 이놈! 네가 감히? A급 용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왜 찾는지 말해달라고 했소.”
“이, 이놈이!”
주먹까지 움켜쥐며 부르르 떤다. 치미는 분노를 도저히 감출 수 없다는 뜻이다.
조금 더 놔두면 폭발할 듯싶어 현수가 끼어들었다.
“이 친구가 A급 용병입니다.”
용병 행세를 하기로 했고, 나이도 많기에 말을 높인 것이다.
“뭐, 뭐라고? 저, 정말인가?”
“맞으니 용건을 말하시죠.”
현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렌트의 시선이 라세안에게 쏠린다.
“정말 A급 용병이신가?”
A급이라면 최소가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다. 로렌트도 상급이었지만 간신히 발을 걸친 상황이다. 어쩌면 라세안의 화후가 더 높을 수도 있기에 저도 모르게 말을 높인 것이다.
“맞소!”
“화후를 물어도 되겠소?”
“응? 나, 난 소드 익스퍼트 상…….”
라세안은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현수가 끼어든 탓이다.
“이 친군 소드 마스터요.”
“네, 네? 뭐, 뭐라고요?”
로렌트는 현수에게도 말을 높인다.
“뭘 그리 놀라슈? 소드 마스터 처음 봤수?”
라세안의 퉁명스런 말이었지만 로렌트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한다.
검사의 꿈은 소드 마스터이다. 로렌트 역시 그러했다. 그것을 이루고자 죽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눈앞의 젊은이는 일찌감치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경지에 올라섰다. 하여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저, 정말입니까? 정말 소드 마스터입니까?”
이젠 완연한 존대이다.
“그렇수. 근데 날 왜 찾으신 거요?”
“여, 여, 영, 영주님께서 찾으시네. 아니, 찾으십니다. 같이 가주십시오.”
“네에?”
“허허, 어서 오시게.”
라세안과 현수를 맞이한 사람은 한눈에 보기에도 귀족이다. 60살쯤 된 중후한 멋을 지닌 사내이다.
“심프슨 알몬 드 몬테규 백작님이십니다.”
로렌트 기사의 소개에 라세안과 현수가 예를 갖춘다.
“처음 뵙습니다. A급 용병 라세안입니다.”
“C급 하인스라 합니다.”
“어서들 오게. 자자, 자리에 앉으세. 이쪽으로…….”
백작이면 대귀족이다. 그럼에도 절절맨다. 라세안이 소드 마스터라고 귀띔 받은 때문이다.
아드리안 공국엔 소드 마스터가 없다.
그러니 이번 대결에 나서주기만 하면 무조건 이긴다. 이건 그간의 치욕을 단번에 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평민이 분명함에도 정중히 대하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뭐하나? 어서 음료를 내오도록 하게.”
“네, 영주님!”
로렌트가 얼른 허리를 직각으로 꺾고 밖으로 나간다.
“먼저 우리 영지에 온 것을 환영하네. 피리안 백작가의 영애를 호위하고 왔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나이젤 산맥을 넘었는가?”
“그렇습니다.”
백작은 흥미있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이젤 산맥엔 드래곤이 있다. 그리고 몬스터들이 우글거린다. 출발지는 산맥 저쪽에 있는 마레로 마을일 것이다.
그곳에서 몬테규 영지까지 오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 길을 지나치려면 기사 여덟 명과 병사 80명 이외에도 B급 용병 30명 이상이 있어야 지나칠 수 있다. 다시 말해 약 120명이 하나로 뭉쳐야 간신히 지날 만큼 험난한 길이다.
이곳에 당도한 인원은 네 명이라 들었다. 그렇다면 116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는 뜻이다.
대체 어떤 몬스터를 만났는지 몰라도 너무나 과한 피해이다. 하여 어찌 그리되었는지를 듣고 싶어 다가앉은 것이다.
“그래, 마레로 마을에서 출발할 때는 몇 명이었는가? 100명은 넘었지?”
“아뇨. 넷이었는데요.”
“뭐라고? 넷? 겨우 넷이 출발했다는 말인가? 참말인가?”
“그렇습니다. 백작가의 영애와 길잡이, 그리고 우리 둘이 전부였습니다.”
“허어∼! 말도 안 되는……. 나이젤 산맥을 관통하면서 겨우 넷이라니? 정말 넷이 출발했다고? 백작가 영애와 길잡이 빼고 자네 둘뿐이었다고?”
“네, 그래서 가뿐히 지나왔습죠.”
“허어, 정말인가 보군. 하긴 소드 마스터가 있으니.”
백작은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검사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검의 끝이라는 소드 마스터가 되기를 꿈꿨다. 하지만 지금도 그게 어느 정도 화후인지 모른다.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몬스터들은 안 나타났나?”
“안 나타나기는요? 오크와 트롤은 물론이고 오우거와 와이번까지 만났습죠. 하하하!”
라세안은 짐짓 너스레를 떠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백작은 놀랍다는 얼굴이다.
백작가의 영애는 무력이 없을 것이다. 길잡이 머피도 용병으로 등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칼잡이가 아니다.
그렇다면 단둘이서 물리쳤다는 뜻이다.
“그럼 모두 물리쳤는가? 다친 덴 없고? 대단하군.”
“그것뿐만 아니라 드래곤도 물리쳤는데요, 뭐.”
“뭐? 드, 드래곤? 에이, 농담이겠지.”
“농담 아닌데요.”
“……!”
백작은 라세안의 말이 진짜냐는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허어! 이거야 정말…….”
백작은 놀랍다는 얼굴로 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그나저나 저희는 왜 부르셨는지요?”
“아참, 자네에게 부탁할 게 있어 불렀네.”
“말씀하십시오.”
“며칠 후 이웃 영지와 기사대전을 벌이게 되네. 우리 영지를 대신하여 자네가 나서주었으면 좋겠어서 불렀네.”
“네?”
“저쪽 영지에서 내세우는 자 때문에 우리 영지 기사 여럿이 패했네. 그놈 좀 꺾어주게.”
“놈을 꺾어요?”
“그래, 목숨은 빼앗지 않아도 되네. 저쪽이 패배한 걸 인정하기만 하면 되네.”
“좋습니다. 그럼 보수는 얼마나 주실 겁니까?”
“500골드면 어떤가?”
한화로 5억 원이다. 거금이다.
준비된 판에 들어가서 정해진 상대와 검을 나누는 것뿐이다. 상대를 죽이라는 것도 아니다. 패배만 인정받으면 된다.
그런 임무에 대한 보수로는 상당히 큰 금액이다.
하여 현수와 라세안은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이곳 몬테규 백작가에 관한 자세한 소문을 듣지 못한 때문이다.
그렇기에 왜 이리 큰 금액을 부르느냐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