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4
검이 부서지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지금껏 많은 돈을 받았지만 목숨과 바꿀 수는 없다. 하여 저도 모르게 물러선 것이다.
하몬드는 대결에 임하기 전 현수를 보고 왔다. 그때 본인은 느끼지 못했지만 몇 가지 마법이 시전되었다.
스트렝스와 헤이스트, 아이언 스킨과 킨 아이(Keen eye)이다. 강한 힘을 내고 재빠른 몸과 강력한 피부, 그리고 예리한 시선을 가지게 하는 마법이다.
마법 지속 시간은 대략 10분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잘 싸우고 오라며 포옹해 줄 때 현수는 하몬드의 어깨를 잠시 주물렀다. 이때 적지 않은 마나가 흘러들었다.
무협으로 치면 격체전공 비슷한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마나가 단전으로 흘러든 게 아니라 하몬드의 어깨와 팔로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붉은 헤르시온이 전신을 뒤덮는 순간 하몬드는 불끈 솟는 기운을 느꼈다.
‘그래, 이거야! 흐음, 검을 뽑았으니 이제 저놈을 바라보며 검에 마나를 실으라고 하셨겠다? 근데 그렇게 하면 저놈이 쫄 거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럴까?’
하몬드는 현수가 일러준 순서에 따라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헤르시온을 걸치곤 있지만 마나의 양이 워낙 적어 검날에 푸른 검기가 맺히는 게 전부이다.
‘저놈은 최상급이라고 했는데 정말 쫄까? 에라, 모르겠다. 난 시키는 대로 할 뿐! 이잇!’
하몬드는 순서에 따라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지이이이잉―!
검끝에서 시퍼런 검기가 쭈욱 솟아난다. 그 순간 관중석의 술렁임이 멈추고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흐른다.
하지만 그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헉! 소, 소드 마스터다! 몬테규의 기사는 소드 마스터야!”
“마, 맞아! 소드 마스터야! 저 검강 좀 봐!”
“소드 마스터 맞아! 세상에! 소드 마스터라니!”
“우왕, 나 플랙스에게 돈 걸었는데! 흐앙! 나 이제 망했다!”
“아! 나도… 망했다, 망했어! 빌어먹을! 소드 마스터라니! 세상에 맙소사!”
관중들이 술렁이는 동안 플랙스가 비틀비틀 뒤로 물러난다.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은 마스터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해보나 마나이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다.
사마귀가 수레를 막는다는 말로, 자기 분수도 모르고 상대가 되지 않는 사람이나 사물과 대적한다는 뜻이다.
플랙스는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덤벼드는 무모함을 만용이라 여긴다. 지극히 올바른 판단이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분수를 알고 물러선 것이다.
그 순간 하몬드의 신형이 움직인다. 500년 전 소드 마스터였던 카룬 후작의 독문검법이 시전되기 시작했다.
시퍼런 빛을 띤 검강이 대련장 허공을 휘젓는 순간 관중들의 입이 딱 벌어진다.
플랙스라 하여 다를 바 없다. 황급히 심판을 바라보자 마침 시선을 보내는 중이다. 플랙스는 즉시 입을 열어 소리쳤다.
“포, 포기! 포기합니다!”
“…모, 몬테규 가의 승리를 선언합니다!”
“와아아아!”
대련장 좌측에서 일제히 함성을 터져 오른다. 몬테규 영지 사람들이 앉는 쪽이다. 반대쪽은 당연히 침묵이다. 캐플렛의 패배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백작님, 2,000골드 잊지 않으셨죠?”
현수의 말에 몬테규 백작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백작은 지금 정신이 혼미한 상태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때문이다. 하여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한낱 소드 유저가 불과 며칠 만에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소드 익스퍼트 초급, 중급, 고급, 최상급을 거쳐 소드 마스터에 이르는 다섯 레벨이 상승한 것이다.
헤르시온의 효과는 두 레벨 상승이다. 그런데 추가로 세 단계가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말도 안 될 일이다.
이건 지난 며칠 사이에 현수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헤르시온이 없어도 하몬드의 화후가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말도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눈앞에서 검강이 휘둘러진다. 한눈에 보기에도 하몬드의 검법은 예사롭지 않다. 끊임없는 검식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예리하게 베는가 싶더니 섬전처럼 찌르는 초식으로 바뀐다. 느닷없이 각도가 바뀌며 검화가 흩뿌려진다. 보기엔 예쁜 꽃 같지만 그것에 닿으면 가죽이 베어지고 뼈가 파인다.
백작이기 이전에 검을 다루는 검사이기에 몬테규 백작은 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지금 눈앞에서 그간 꿈꾸던 상승 검식이 시전되고 있는 것이다.
“이보게, 백작! 소드 마스터라니? 그리고 헤르시온이라니?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세상에 맙소사!”
“……!”
그레고리 가렌 폰 캐플렛 백작의 물음에 심프슨 알몬 드 몬테규 백작은 빙그레 웃음만 지어 보인다.
웬만하면 그간의 분함 때문이라도 잘난 척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의미 모를 웃음만 지은 것은 사전에 이렇게 하기로 약속했던 때문이다.
“대단하십니다, 백작님! 이제 겨우 스물로 보이는 기사가 어떻게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 된 겁니까?”
헤르시온의 효과를 아는 할렌 모리스 반 로미오 자작의 말이다.
“후후, 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
“제가 알기로 저 청년은 얼마 전까지 소드 유저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벌써 상급이 된 겁니까?”
“아마도…….”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감축드립니다. 10연패의 사슬이 드디어 끊겼네요. 그리고 승승장구하시겠군요.”
소드 마스터가 없는 공국이다. 하몬드의 상대는 이제 없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바로 곁에 앉아 있던 캐플렛 백작은 아무런 말도 없다.
오늘의 1패를 시작으로 앞으로 줄줄이 패할 것이라는 생각에 정신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허무하게 끝난 대결이다. 하몬드는 멋진 검법을 시전했지만 플랙스는 검 한번 못 뽑아보고 포기했다.
치열하거나 엄청난 검법이 난무하는 광경을 기대하고 입장한 관객들은 허탈했지만 소드 마스터의 검강을 보았다.
공국의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이다. 하여 소곤소곤 이야기하며 하나둘 퇴장하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내기를 한다. 몬테규 가에서 승리연을 준비했을지 여부이다. 물론 파티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이길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현수는 얼빠진 표정으로 관람석을 벗어나는 캐플렛 백작에게 다가갔다.
“다음 대결은 언제 있습니까?”
“응? 서, 석 달 후!”
누가 물었는지 모르기에 저도 모르게 한 대답이다.
“저 친구, 우리가 만들었는데 백작님의 영지도 들러볼까요?”
“으응? 뭐, 뭐라고?”
백작의 시선을 받은 현수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저기 저 친구 하몬드는 우리가 조련했습니다. 열흘도 안 걸렸지요. 어떻습니까? 관심 있습니까?”
“무, 물론이네. 몬테규 가에서 얼마를 지불했는지 모르지만 우린 그것의 두 배를 기꺼이 내겠네. 우리 영지로 오게.”
“알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찾아뵙죠. 참, 저 친구 이름은 라세안 A급 용병이고 소드 마스터입니다.”
“소드 마스터? 라세안 경? 흐음, 알겠네!”
평범한 용병 차림이지만 왠지 범상치 않음이 느껴졌기에 경이라는 말을 붙인다.
“그럼 물러갑니다. 몬테규 백작님과 정산할 게 있어서요.”
“으응. 그, 그러시게.”
* * *
“영주님, 캐플렛 영지에서 정말 두 배를 준다고 했습니까?”
“그래, 4,000골드는 받을 수 있어.”
“하하, 이거야 참! 돈 벌기 쉽구먼요. 하하하!”
라세안과 현수가 호탕하게 웃어젖히자 카트린느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본다.
‘근데 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만드신 걸까?’
카트린느의 눈에 하인스 대마법사는 거의 신이다. 그렇게 올리기 힘든 검사들의 레벨을 아주 간단히 올려주었다.
어쩌다 한 번이라면 ‘마법으로 그랬구나’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캐플렛 영지로 이동 중이다. 새로운 소드 마스터를 만들어줄 목적이란다.
수도인 멀린으로 가려면 어차피 거쳐 가야 하는 길이다. 그러니 시간낭비하는 것은 아니다.
“참, 몬테규 영지에서 왜 그 녀석을 고른 겁니까? 하몬드는 겨우 소드 유저였지만 익스퍼트 초급이 제법 있었잖습니까?”
“하몬드의 마나가 가장 정순했어.”
“그랬습니까? 아무튼 다시 생각해 봐도 몬테규 백작 놀라는 표정이 너무 웃겼습니다.”
카트린느가 곁에 있기에 라세안은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고 있다. 물론 현수는 평대 내지는 하대이다.
“그래, 압권이었지. 설마 그렇게 변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거야. 그래서 그렇지.”
“크흐흐! 그렇습니다. 눈이 왕방울만 해졌지요.”
“참, 헤르시온은 순순히 내놓던가? 꽤 욕심을 부렸을 텐데.”
“왜 안 그랬겠습니까? 몬테규 백작이 거금을 제시했습니다.”
“그래? 그래서 검이라도 뽑았나?”
“그랬지요. 안 그랬다면 이처럼 순조로운 출발은 없었을 테니까요.”
“욕심 낼 만하지. 그것만 있으면 12연승도 문제없으니.”
현수가 고개를 끄덕일 때 일행은 모퉁이를 도는 참이었다.
“잠깐 멈추십시오.”
모퉁이를 돌고 나니 전방에 일단의 무리가 정연하게 도열해 있다. 일행을 멈춘 건 그들 중 선두에 선 기사이다.
“……?”
“캐플렛 가에서 왔습니다. 어느 분이 라세안 경이십니까?”
“나요. 그런데 왜 길을 막은 게요?”
“일행 분을 모시려고 대기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 그래요? 그럼 같이 갑시다.”
라세안이 흔쾌히 허락하자 일행을 감싸듯 호위한다.
10장 겁 없는 중생의 도발
“어이, 머피! 우리의 새로운 목적지는 캐플렛 영지의 영주성이다. 출발하자고.”
“네! 이랴! 이랴!”
길잡이 머피가 가볍게 채찍을 휘두르자 말들이 걷기 시작한다. 마차 안에 타고 있던 카트린느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시선으로 현수를 바라본다.
‘이분, 이분만 잡을 수 있으면 영지가 안전해져.’
카트리느의 이런 생각은 당연했다.
현수는 드래곤마저 단신으로 물리친 대마법사이자 소드 마스터이다. 그리고 이실리프 마탑주이기에 공왕과 버금가는 권력자이다. 따라서 피리안 영지에 머물기만 해도 영지는 안전해진다. 어느 누구도 감히 도발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근데 어떻게 잡지? 겉보기엔 스물다섯쯤으로 보이는데 진짜 나이는 몇이실까? 대마법사이니 백 살은 넘으셨겠지?’
카트린느는 호호백발이 된 100세 노인을 상상했다.
얼굴과 손등엔 온통 저승꽃이라는 검버섯이 돋아 있다. 이빨은 다 빠졌고, 몸에선 노인 냄새가 풀풀 풍긴다.
허리는 구부정하고 제대로 걷지 못해 한 걸음을 떼는 것도 힘겹다. 손은 덜덜 떨며 눈에선 진물이 흐른다.
그런 노인과 결혼해서 한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고 몸서리가 쳐진다.
‘으히익! 아이고, 못살아.’
카트린느는 청년 모습을 한 현수를 바라본다.
‘맞아! 대마법사가 되면 바디체인지를 한다고 했지? 그럼 나이와 상관없는 거잖아.’
그러고 보니 현수의 곁에 가면 좋은 냄새가 난다.
이는 지구에서의 습관 때문이다. 아침마다 세수를 하고 나면 스킨과 로션을 바른다. 아르센 대륙엔 없는 냄새이다.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묘하게 설레었다.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하기도 했다.
‘그것도 마법인가?’
카트린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차는 쉼없이 도로 위를 달렸다.
두두두두두! 덜컹덜컹! 덜컹덜컹!
덜컹거렸지만 엉덩이가 아프지는 않다. 현수가 마차 아래에 뭔가를 달아놓은 이후부터 진동이 덜 전해지기 때문이다.
캐플렛 영지는 곡창지대인 모양이다. 도로 양쪽에 펼쳐진 밀밭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워워! 워워!”
머피가 소리를 내며 가볍게 채찍을 휘두르자 달리는 속도가 완연히 느려진다. 이에 창밖을 보니 고색창연한 성채가 눈에 들어온다. 유서 깊은 캐플렛 영지의 영주성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