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5
“하하하! 라세안 경, 어서 오시게나.”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트린느 양도 어서 오시게.”
“네, 백작님을 뵈어요.”
카트린느가 치마를 살짝 들며 고개 숙여 예를 갖춘다.
“이쪽은 C급 용병 하인스입니다.”
“아네. 자네도 어서 오게.”
“아! 그런가요?”
“자자,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으니 일단 배부터 채우세.”
“그러죠.”
캐플렛 백작은 라세안과 앞장서서 식당으로 이동했다. 뒤에는 호위기사들이 따른다.
자연스레 뒤로 처진 현수와 카트린느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공왕조차 하대 못할 이실리프 마탑주는 내버려 두고 그의 수하만 정중히 대하는 모습이 웃긴 때문이다.
“우리도 밥은 먹어야겠지?”
“그럼요. 우리도 가야죠.”
카트린느가 자연스레 팔짱을 낀다. 기회를 틈탄 스킨십 시도이다. 보는 눈이 많기에 현수는 슬쩍 팔짱을 푸는 대신 손끝을 가볍게 잡는다. 레이디를 인도하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쳇! 그냥 가도 되는데.’
카트린느는 내심 불만족스러웠으나 어쩌겠는가!
현수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희미한 미소만 지었다. 물론 보여주기 위한 미소이다.
식탁에 당도하니 예상대로 백작의 맞은편 자리는 라세안의 것이다. 그의 좌우에는 백작의 아들과 조카, 그리고 중요 가신들이 앉도록 배치되어 있다.
카트린느는 별도의 식탁으로 안내되었다. 백작가 영애이기에 캐플렛 가의 여자들과 함께 자리하도록 한 것이다.
여기까진 별 문제 없다.
현수는 다른 테이블로 안내된다. 하긴 C급 용병이 대귀족인 백작과 한 식탁을 쓰도록 하진 않을 것이다.
자리에 앉고 보니 저쪽에 다른 식탁도 있다. 영지 행정관들과 기사를 위한 자리인 모양이다.
잠시 후 누군가 다가온다. 길잡이 머피이다. 음식이라곤 빵 두 개와 멀건 야채 스튜가 전부이다.
기사들이 있는 식탁엔 빵은 물론이고 스튜 외에도 고기와 과일도 보인다. 라세안 쪽은 아예 진수성찬이다.
“저, 저어…….”
현수의 신분을 알기에 머피는 안절부절못한다. 어찌 공왕조차 하대할 수 없는 존재에게 이런 대접을 한단 말인가!
오는 동안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하인스 대마법사는 세상에 알려진 9서클 마스터가 아니라 10서클 마법사이다. 게다가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선 그랜드 마스터라고 한다.
아르센 대륙 역사상 어느 누구도 성취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경지이다. 아마 앞으로도 적어도 수천 년은 이 기록을 아무도 깨지 못할 것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드래곤과 맞장 떠서 이겼다. 인류 역사상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한 위대한 업적이다.
그런데 가장 말석에 앉히는 것으로 모자라 형편없는 음식만 내온다. 가만히 있다간 불호령이 떨어지거나 난리법석이 날 수도 있다. 어쩌면 캐플렛 영지에 미티어 스트라이크 같은 대재앙이 내려질 수도 있다.
“이봐, 아가씨! 여긴 이게 다인가?”
“그럼요. 근데 뭘 더 바래요? 흥! 주제도 모르고.”
식탁에 물을 가져다 준 시녀의 퉁명스런 대꾸이다.
“아니, 저긴 저렇게 음식도 많은데 우린 왜 딱 두 가지만……. 그러지 말고 빵이라도 좀 더 좋은 걸 주지.”
“흥! 내가 왜요? 그쪽은 길잡이잖아요. 이쪽은 C급 용병이구요. 근데 뭘 더 바라요? 이 정도면 감지덕지 아닌가요? 그리고 어여 먹고 일어나요. 저쪽 기사님들 식탁보다 늦게 일어나면 경을 칠 수도 있으니까요.”
“어떻게 저쪽보다 늦게 일어나겠나? 음식이라곤 겨우 두 가지뿐인데.”
“그만! 그만하게. 그냥 먹고 어서 일어나세. 늦게 일어나면 경을 친다지 않는가.”
“네?”
머피는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어찌 이런 대접을 받고 가만히 있느냐는 눈빛이다.
이때 시녀가 머피를 째려보며 한마디 한다.
“흥! 깜박 잊고 말 안 했는데요, 다 먹고 나면 뒤쪽 마구간 청소를 해야 할 거예요. 먹은 밥값은 해야 하니까요.”
“뭐, 뭐라고? 지금 뭐라고……?”
머피가 발작하려는 순간 현수가 손짓한다.
“그냥 있게. 어서 먹고 마구간 청소 하라지 않는가.”
“네? 지, 지금 뭐라고……?”
“어서 먹고 일어나자고.”
“흥! 그래도 이쪽은 분수를 아니 다행이네요. 아무튼 어서 먹고 마구간으로 가세요. 싸질러 놓은 게 많아서 치울 게 많을 거예요. 냄새도 좀 날 거구요.”
“뭐, 뭐라고?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머피, 그냥 먹고 일어서자고. 이곳 마구간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네. 우리 말도 거기 있을 테니.”
“그래도 어떻게……? 이건 아니잖아요.”
“뭐야? 거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영주님과 귀빈께서 식사하시는데? 베시, 저놈들 식탁 치워. 어차피 마구간으로 갈 놈들이니 아예 거기로 옮겨. 시끄러우니까.”
“네?”
“지금 즉시 치워! 분수도 모르고 말만 많은 놈들, 내 눈 앞에서 당장 치우란 말이야. 알았어?”
“아, 알았어요. 지, 지금 치울게요.”
베시라 불린 시녀의 시선이 머피에게 향한다.
“이봐요, 얼른 일어나요. 이건 마구간에 갖다 줄 테니 거기로 가서 먹어요.”
“뭐라고? 지금 이분이 누군 줄 알고……?”
머피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부르르 떤다. 마음속 깊이 너무도 존경하는 이실리프 마탑주이다. 그런데 이건 너무나 심한 모욕이다. 하여 대리 분노를 느끼는지 주먹까지 말아 쥔다.
이 순간 베시의 눈에서 경멸의 빛이 흘러나온다.
“흥! 누구긴요? 한낱 C급 용병과 길잡이 D급 용병이잖아요. 어서 가요. 빨리 안 일어나면 기사님들에게 혼날 거예요. 그럼 나도 혼난단 말이에요. 어서요!”
“허어! 이건 대체……. 하하! 이젠 어이가 없네요.”
“머피, 그냥 일어나자.”
현수는 자신의 지시가 즉각적으로 이행되지 않음에 짐짓 성난 표정을 짓고 있는 기사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 화도 안 나십니까? 어떻게 감히 하인스님을 이 자리에 앉힌단 말이죠? 게다가 이건 뭡니까? 딱딱한 빵 한 덩이에 멀건 스튜뿐이잖아요. 그리고…….”
분노한 머피가 현수에게 화를 내라는 의미의 말을 이으려는 순간 아까부터 노려보던 기사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이, 거기! 지금 영주님께서 귀빈과 식사하시려는 거 안 보이나? 안 되겠어. 너희 둘 다 나와.”
“네? 뭐라고요?”
“귓구멍에 안개 꼈어? 나오라면 나와! 어서!”
심심하던 차에 잘되었다는 듯 기사 둘이 더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곤 흥미롭다는 듯 머피와 현수를 바라본다.
“하인스님……!”
“머피, 나오라니 한번 나가보자.”
“네?”
머피가 뭐라 하려는 순간 현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조용히 속삭였다.
“재미있잖아. 안 그래?”
“네? 아, 네에. 알겠습니다.”
현수가 앞장서고 머피가 따른다. 그전에 머피는 겁도 없이 이실리프 마탑주에게 도발한 기사들을 쏘아보았다.
나가서 어디 한번 당해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를 곡해한 듯 기사들의 시선이 싸늘해진다.
오늘 이곳에 온 영주님의 귀빈은 라세안이라는 A급 용병이다. 몬테규 영지를 11연패에서 구한 장본인이다.
그는 본시 피리안 백작의 손녀인 카트린느를 멀린까지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일행으로 머피와 하인스가 더 있다.
머피는 D급 용병으로 나이젤 산맥을 헤치고 나오는데 꼭 필요한 길잡이이다.
C급 용병 하인스는 허드렛일을 맡았을 것이다. 음식을 만들거나 잠자리를 조성하고 밤새 경계근무를 섰을 것이다.
둘은 귀빈을 환영하는 이 자리에 낄 자격이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입장을 허락했다. 사소한 일행이라도 환영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귀빈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함이다.
그런데 분수도 모르고 음식 타박을 하며 기사들의 심기를 어지럽힌다. 당연한 징계 대상이다. 그렇기에 나가기만 하면 단단히 혼쭐을 내주리라 마음먹었다.
“어이, 둘! 거기 멈춰!”
베시의 뒤를 따라 마구간으로 이동하던 머피와 현수가 발걸음을 멈췄다. 자신들을 부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릴 불렀소?”
머피의 음성엔 분노가 배어 있다. 감히 이실리프 마탑주를 마구간으로 보내는 것이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이다.
“그래, 분수도 모르는 싸가지 없는 두 놈! 일단 좀 맞자.”
“허어, 이건 뭐 개만도 못한 놈들이 감히 누구에게……. 마탑주님, 저놈들을…….”
“머피, 쉿! 조용히.”
머피의 뒷말은 기사들의 귀까지 전해지지 못했다.
분노를 씹어 삼키느라 음성을 줄인 때문이다. 그리고 현수가 중간에 끼어든 때문이기도 하다.
“뭐라고? 개만도 못한 뭐라고? 이이……!”
스르르릉―! 툭―!
한낱 D급 용병의 망발에 기사는 분노를 이길 수 없는지 검을 뽑아 든다. 그리곤 결코 그냥 두지 않겠다는 듯 검집을 한쪽으로 던진다. 이는 상대의 피를 보고야 말겠다는 의미이다.
“어이, 거기! C급 용병이라 했나? 네가 먼저 검을 뽑아라.”
“지금 내게 검을 뽑으라 했나?”
“그래, 이 개 가죽만도 못한 종자야. 분수도 모르고 설친 대가로 한쪽 팔을 내놔야겠다.”
“자넨 오른쪽 팔을 베게. 나는 왼팔을 베겠네.”
“그럼 나는 목인가? C급과 D급 주제에 건방진…….”
기사 셋 모두 형형한 안광을 빛낸다. 도발적인 눈빛을 받은 현수가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뀐다.
“흥!”
“뭐, 흥? 이런 건방진! 검을 뽑으라고 했다!”
기사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이를 악물며 말한다.
“내가 검을 뽑으면 피를 볼 텐데?”
“푸하하! 뭐라고? 하하! 하하하! 피를 본다고?”
“크큭! 크크큭! 피를 본댄다, 피를 봐! 크하하하!”
“하하! 하하하! 건방짐의 끝을 보이는군. 하하하!”
기사 셋 모두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때 현수가 한마디 거들어주었다.
“하나씩 덤비면 시간 걸리니 한꺼번에 덤벼라.”
“뭐라? 한꺼번에 덤비라고?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자네들은 물러서게. 내가 저놈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겠네.”
스르르르릉―!
기골이 장대한 기사는 분노를 감출 수 없다는 듯 검을 뽑는다. 그리곤 성큼성큼 걸어 현수에게 다가선다.
“뽑아라, 검!”
“…그러지.”
스르릉―!
현수가 허리춤의 검을 뽑는 순간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 기합을 터뜨리며 검을 휘두른다.
“야아압!”
쉬이익―! 챙―!
두 검이 격돌하는 순간 불꽃과 더불어 요란한 금속성이 터져 나온다.
“어쭈? 건방진 놈! 야압!”
쒜에엑―! 채챙!
여유있게 상대의 검로를 차단한 현수가 실소를 베어 문다.
“후후, 겨우 이 솜씨로 기사가 된 건가?”
“뭐야? 이놈이? 죽엇!”
쒜에엑―! 퍼억! 우당탕탕―!
“크으윽! 으으윽! 웨엑! 크으으윽!”
목이 베어지려는 순간 현수의 신형이 흩어진다.
그와 동시에 기사의 가슴에, 배에 현수의 발이 꽂힌다. 타격음에 이어 비명이 있었고, 먹었던 음식을 토하는 소리 다음엔 또 다른 신음이 터져 나온다.
불과 수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이런 개 같은……. 죽엇!”
쒜에엑! 챙! 촤악―!
“크으윽!”
두 번째 기사가 휘두른 검은 현수에 의해 중간에 멈췄다. 그 순간 옆으로 누인 검이 기사의 뺨을 때린다.
골이 흔들릴 정도로 아찔한 충격을 받았는지 기사는 비틀거리더니 힘없이 주저앉는다.
“이건 뭐야? 오라, 한가락 한다 이거지? 좋아, 해볼 만하겠군. 덤벼, 이 비겁한 자식아!”
“뭐라? 비겁해? 내가? 내가 뭘 비겁하게 했는데?”
“……!”
일순간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기사는 시선만 보낸다.
“죽어라! 이 벌레 같은 놈아!”
쉬이이이익―!
검기 실린 검이 허공을 베며 예리한 파공음을 낸다.
현수의 목을 노리고 있다. 물러서지 못하거나 막지 못하면 수급이 허공으로 치솟을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