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7
현수가 만들어낸 검강을 보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했지만 회수할 수 없었던 때문이다.
쐐에에에엑! 파직! 콰당―!
“으으윽!”
소영주의 검은 시퍼런 검강과 만나는 순간 아주 간단하게 베어진다. 갑작스레 무게를 잃게 되자 소영주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하여 바닥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다음 순간 느껴지는 둔중한 통증에 나직한 신음을 토하는 소영주의 목에 현수의 검이 닿는다.
“…사, 살려주십시오.”
“소영주님을 살려주십시오.”
“소드 마스터시여, 제발!”
“……!”
나직한 신음을 토하던 소영주는 기사들의 음성을 들었다. 그 순간 눈을 뜨니 시퍼런 무언가가 보인다.
잠시 전 이것과 검이 격돌했다. 그 순간 애검이 부서졌지만 그것이 검강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평생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암수로 기사들을 상대했다는 말을 취소하라.”
“…으으, 취, 취소하오.”
“사내답게 인정하니 좋군. 좋아, 그럼 일어나라.”
“……?”
지금까지와 달리 하대를 하자 신음하던 기사들까지 모두 시선을 보낸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하더라도 평민이 차기 백작이 될 소영주에게 반말하는 것은 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엄하오! 그분은 장차 작위를 물려받을 소영주이시오!”
누군가의 말이다. 하지만 현수는 깨끗이 무시했다.
“소영주는 지금 즉시 캐플렛 백작을 이곳으로 데려오라.”
“지금 무어라 했소?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하지만 어찌…….”
소영주도 굵은 눈썹을 찌푸린다. 평민에게 능멸당하는 느낌을 받은 때문이다.
“백작을 불러오라 하였다. 지금 즉시!”
“이것 보시오. 어찌…….”
소영주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지금껏 곁에 있던 머피가 입을 연 때문이다.
“그분은 이실리프 마탑의 탑주님이십니다.”
“……!”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백작을 불러오라 하였다. 아울러 라세안도 오라고 하도록!”
현수의 명령에 소영주는 머피를 바라본다.
“저, 정말인가? 이, 이분이 정말 마탑주님이신가?”
“그렇습니다. 이실리프 마탑의 탑주님이 분명합니다.”
털썩―!
“허억! 이, 이놈이 눈이 어두워 위대하신 마탑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시길……!”
소영주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순간 머피의 말이 이어졌다.
“참고로 마탑주님은 10서클 대마법사이시며 동시에 그랜드 마스터이십니다. 8서클 마법사이며 소드 마스터인 라세안님은 탑주님의 수석호위이구요.”
“허억!”
소영주의 동공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다.
이토록 동공이 확장되는 이유는 성적 흥분, 공포, 당혹감 등이 있다. 현 상황은 성적 흥분과는 관계가 없으니 공포, 내지는 당혹감 때문일 것이다.
“저, 정말인가?”
소영주의 음성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방금 전 신(神)과 다름없는 존재에게 까불었다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방금 전 탑주님께서 백작님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리셨는데 여기서 이러고 계셔도 됩니까?”
“…헉! 마, 맞다. 가, 가네. 지금 가네.”
소영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내성 쪽으로 달려갔다.
후다다다다!
“……!”
머피가 입을 다물자 장내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가 된다. 그러는 가운데 기사 모두 무릎을 꿇었다.
감히 분수도 모르고 하늘같은 마탑주에게 덤벼들었다.
그랜드 마스터는 대륙 최고의 검사이다. 자신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고한 수준에 오른 인물이다.
게다가 이실리프 마탑주라면 공왕과 대등한 권력자이다.
자신들이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캐플렛 백작 따위는 하루아침에 평민 내지는 농노로 만들 권력이 있다.
그런데 상소리까지 해가며 덤볐다. 그것도 떼로.
지은 죄를 알기에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 현수는 이 대목에서 한마디 해야 함을 느꼈다.
“기사가 검을 드는 것은 몬스터를 잡거나 정의를 수호할 때뿐이다. 그런데 너희는 방금 전 전혀 정의롭지 못했다. 이것에 대한 처벌로 너희 모두의 목을 칠 수도 있다.”
“……!”
이 대목에서 모두 움찍거린다.
머피의 말대로 그랜드 마스터라면 언제 목이 베이는지 모르는 채 죽을 수 있다. 그렇기에 눈을 질끈 감는다.
너무도 큰 죄를 지어 목이 베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평민을 무시하는 너희의 태도 또한 바르지 않다. 하여 나는 오늘 너희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 보기로 마음먹었다. 모두 오리걸음 준비!”
“…주, 준비!”
말 떨어지기 무섭게 모든 기사들이 자세를 갖춘다.
“이곳으로부터 영주성까지 총 10회 왕복한다. 몇 회?”
“10회입니다.”
“하나라도 낙오하면 내일 이 자리에서 또 오리걸음을 하게 될 것이다. 뭐라고?”
“하나라도 낙오하면 내일 또 오리걸음을 합니다.”
“좋아, 지금부터 실시한다. 오리걸음을 하는 동안 구령이 있다. 왼발을 디딜 때마다 ‘다시는 평민들을 우습게 보지 않겠습니다’라고 한다. 알았나?”
“네, 알겠습니다.”
“좋아, 실시!”
“실시!”
“다시는 평민들을 우습게 보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평민들을 우습게 보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평민들을…….”
오만한 기사들이 깍지 낀 손을 머리 위에 얹은 채 오리걸음을 하며 내성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생 다시 볼 수 없는 진풍경이라는 것을 알기에 많은 사람이 나와서 구경한다.
“다시는 평민들을 우습게 보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평민들을 우습게 보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평민들을…….”
기사들은 하늘같은 마탑주가 뒤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요령을 피우거나 슬쩍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평민들에게 꺼지라는 눈빛조차 보내지 못하고 있다.
“소리가 작다. 더 크게 외쳐라. 적어도 캐플렛 영지의 모든 평민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쳐라!”
“…다시는 평민들을 우습게 보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평민들을 우습게 보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평민들을…….”
기사들이 처벌받는 이 순간 영주성에선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고 있다.
“뭐, 뭐라고? 마, 마, 마탑주님께서 오셨다고?”
“네, 이실리프 마탑주님께서 아버지를 오라고 하셨어요.”
“뭐? 이, 이보시게, 라세안 경!”
캐플렛 백작이 건너편에 앉은 라세안에게 시선을 준다.
“네, 말씀하십시오.”
“저, 저 아이의 말이 사, 사실인가? 저, 정말 이, 이실리프 마, 마, 마탑주님이신 건가?”
“맞습니다. 그분은 10서클 마법사이자 그랜드 마스터지요.”
“허억! 10서클에 그, 그, 그랜드 마스터?”
라세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털썩―!
캐플렛 가의 가주 그레고리 가렌 폰 캐플렛 백작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고 만다.
이곳은 영지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할 경우 대가를 치르게 한다. 직접적인 용무가 있는 책임자는 제외한다.
수행원 가운데 C급 용병 이하는 빵과 스튜를 제공한다. 대신 마구간 청소를 하도록 한다. 지금껏 예외는 없었다.
따라서 오늘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늘처럼 떠받들어도 시원치 않을 위대한 인물에게 그랬다면 큰일이다.
백작은 아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라며 묻는다.
“마, 마, 마탑주님은 지, 지금 어, 어디에 계시느냐?”
“그야 마구간에…….”
“허어! 이런! 벌써? 안 되는데…….”
백작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어쩌면 마탑주 모독죄로 작위를 박탈당할 수도 있다. 설사 공왕이라 할지라도 이를 번복할 수 없다. 그건 마탑주의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작위를 박탈당한 자는 죄질에 따라 평민, 또는 노예로 신분이 격하된다. 이 중 공왕과 마탑주 모독죄는 무조건 노예이다.
모든 재산은 몰수되며, 다시는 공국의 귀족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완전한 파탄인 것이다.
“아버지, 어서 가세요. 마탑주님이 빨리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그래, 가, 가야지. 그런데 허얼……!”
눈앞이 깜깜해진 백작은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도 큰 때문이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백작은 헐레벌떡 마구간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다시는 평민들을 우습게 보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평민들을 우습게 보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평민들을…….”
“……!”
기사들의 구령 소리는 결코 작지 않다. 마탑주가 뒤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영지에서 이런 소리를 지르고 다닐 사람은 몇 안 된다. 더구나 오십여 명이 한꺼번에 외치니 소란스럽다.
평상시에 이러면 영지 치안을 담당하는 기사단이 출동했을 것이다. 아무튼 멀리서 오리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이들은 기사단이 분명하다.
백작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진다.
자신이 지은 죄만 해도 용서받기 힘든데 기사단까지 패악을 부렸다면 돌이킬 수 없을 대역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크으으!”
백작이 침음을 내는 순간 기사들의 뒤를 따르던 현수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이 있다.
“이봐요, 얼른 오라니까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응? 뭐라고?”
현수의 반응에 베시가 쌍심지를 치며 소리친다.
“마구간에 음식 다 갖다 놨잖아요. 얼른 먹고 청소해요. 그쪽이 얼른 먹어야 나도 그릇 가져가서 설거지해야 하니까 빨리 와욧.”
말을 하며 팔을 잡아당기자 곁에 있던 머피가 뭐라 하려는 순간 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베시라고 했지? 그거 조금 있다 먹으면 안 될까? 내가 지금 만나볼 사람이 있어서 그래.”
“안 돼요. 먹기부터 해요. 나도 할 일 많은 사람이에요. 그쪽에서 안 먹고 있으면 나는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어서 가요.”
“안 되는데. 지금 만나려는 사람이 꽤 중요해서.”
“흥! 중요하긴요. 기껏해야 마부나 길잡이 뭐 그런 거잖아요. 아무튼 난 못 기다리니까 어여 따라와욧!”
베시가 성난 표정을 짓는다. 주방에 늦게 가면 주방을 총괄하는 시녀장에게 야단을 맞기 때문이다.
허접한 C급 용병 때문에 욕먹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현수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끌어당긴다.
“허어! 안 되는데…….”
“흥! 안 되긴요. 어서 와욧! 그리고 빨랑 먹어요.”
“나 높은 사람 만나야 한다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안 와요?”
“쩝, 할 수 없지. 머피, 가서 먹으세.”
“네? 아, 네에.”
머피는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이 대체 어떤 끝을 맺으려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물론 그 끝은 기대된다.
“아! 빨랑 오란 말이에요. 나 할 일 엄청 많단 말이에요!”
“알았어. 간다고, 가!”
현수가 베시의 뒤를 따르자 머피는 여전히 구호를 외치며 오리걸음을 하는 기사들을 바라본다.
그런데 저쪽에서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온다. 머리가 허연 것을 보면 젊은이는 아니다. 하여 자세히 바라보니 캐플렛 가의 가주가 정신없이 달려오는 중이다.
머피는 잠시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짐작되었기에 피식 웃고는 현수의 뒤를 바짝 따랐다.
“하인스님, 그럼 우리 마구간에서 빵과 스튜를 먹게 되는 건가요?”
“아마도. 식어서 맛이 없을 것 같지?”
“하하, 네에. 아무튼 어서 가죠. 마구간에서 먹은 빵과 스튜는 평생 기억에 남겠지요?”
“그럼. 그렇겠지.”
“뭐예요? 왜 그렇게 느려요? 사내가 그렇게 느려서 어따 쓰나 몰라. 쳇! 암튼 빨리 와요.”
베시가 종종걸음으로 가기에 둘은 마주 보며 피식 웃는다.
그리곤 마구간으로 들어섰다. 말똥 특유의 냄새가 진하게 난다. 그러고 보니 둘의 식사는 건초 뭉치 위로 옮겨져 있다. 조금 전 대결 때문인 듯하다.
“여기 있으니까 얼른 먹어요. 기다렸다 그릇 가져가야 하니까 후딱 먹어야 해요. 아, 어서요.”
허리에 손을 얹은 베시는 빨리 먹으라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본다. 현수와 머피는 빵을 먼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