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8
그리고 한 입 베어 물려는 순간이다.
“헉헉! 마, 마탑주님!”
털썩―!
황급히 달려오느라 숨이 턱에 찬 캐플렛 백작이 털썩 무릎을 꿇는다. 이때 또 하나의 인영이 그 옆에 무릎을 꿇는다.
“헉헉! 죄, 죄송합니다!”
차기 가주가 될 소영주이다. 베시는 하늘같은 백작님과 소영주님이 무릎까지 꿇는 장면을 보고 눈을 크게 뜬다.
“하, 하인스님께서 마탑주님이라는 걸 정말 몰랐습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영주님, 소영주님, 마탑주님이라니요? 가만, 마탑주님이시라면… 이실리프 마탑의? 에, 에그머니나!”
털썩―!
사납게 굴던 베시가 털썩 주저앉는다. 안색이 창백하다. 이제 남은 건 죽음뿐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영주의 무릎이 그렇게 쉽게 접히면 안 되지요. 그건 아드리안 공국의 위상을 훼손하는 일입니다. 어서 일어서십시오.”
“마, 마탑주님! 저, 정말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건 알았으니 일단 일어서십시오. 어서요.”
“네, 마탑주님!”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캐플렛 백작은 감히 시선조차 맞추지 못하고 있다. 그럴 만하기 때문이다.
눈앞에 서 있는 현수는 25세로 보인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그 나이에 10서클 마법사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법의 조종이라는 드래곤조차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최하 백 수십 살은 넘었다.
그럼에도 젊어 보이는 것은 바디체인지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더 없이 공손한 모습이다.
너무나 고요했기에 현수의 입이 열린다.
“백작, 기사들에 대한 인성교육을 조금 더 해야겠습니다. 보호해야 할 사람들을 너무 하찮게 여기니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즉각 시행토록 하겠습니다.”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깨우치셨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를…….”
백작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현수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연 때문이다.
“몬테규 가와의 분쟁은 이제 없는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쓸데없는 자존심 대결은 두 가문에도 좋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안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네! 물론 그렇지요. 그렇고말굽쇼.”
캐플렛 백작은 품위를 잃고 평민처럼 굽실거린다.
“오늘 이후로 몬테규 가와 캐플렛 가의 불화가 내 귀에 들리면 두 가문은 작위를 내놓아야 할 겁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앞으론 두 가문의 혼인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까?”
“네? 그건 왜……?”
정신없는 상황이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요구이기에 저도 모르게 반문한다.
“가까운 인척끼리의 혼사가 계속되면 후손의 형질이 점점 나빠집니다. 따라서 앞으로 10대가 지나기 전까지 두 가문의 혼인은 있어선 안 될 겁니다. 이건 두 가문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공국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알겠습니까?”
“네? 아, 네에, 명심하겠습니다.”
“소영주에 대한 인성교육도 새로 하십시오. 장차 백작위를 물려받을 사람치고는 조금 성급하고 부족하더군요.”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네, 반드시 다시 교육을 시켜 반듯하게 만들겠습니다.”
“……!”
현수의 말에 소영주는 가늘게 떤다. 앞으로 닥쳐올 지옥을 예감한 때문이다.
“보아하니 소영주는 지나치게 여색을 밝히는 것 같습니다.”
“네? 그걸 어찌 아시는지요? 오늘 도착하셨는데…….”
“눈 밑의 짙은 다크서클, 푸석해 보이는 피부가 그걸 증명합니다. 놔주면 조로(朝老)하고, 몸은 쇠퇴하며, 머리는 쾌락에 빠져 혼탁하고 우매하게 됩니다.”
“……?”
“소영주가 소드 마스터가 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영지의 미래는 소영주가 책임집니다. 영주가 반듯해야 영지민들이 행복해집니다. 영지민들이 즐거워야 공국이 발전하고요.”
“알겠습니다. 철저히 살펴보겠습니다.”
캐플렛 가는 대대로 손이 귀했다. 하여 아들이 어릴 때부터 많은 여자를 섭렵하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했다.
본인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수의 말을 듣고 보니 놔둬선 안 될 일인 듯싶다.
“편지를 쓸 것입니다. 몬테규 가에 전하시게.”
“알겠습니다.”
“라세안, 이제 떠나야지.”
“네, 마탑주님!”
“…그, 그냥 떠나시게요? 아, 안 됩니다. 저희가 잘못한 걸 만회할 시간을 주십시오. 네?”
“그, 그러십시오, 마탑주님. 시, 식사라도 한 끼… 한 끼라도 제대로 대접할 기회를 주십시오, 마탑주님!”
영주와 소영주가 하는 말에 베시는 사시나무 떨 듯 바르르 떤다. 평생 지을 죄를 한꺼번에 지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일견한 현수가 피식 웃는다.
“당연히 배는 채우고 가야지요. 굶고 갈 수는 없으니까. 단, 요리는 내가 하겠습니다.”
“네?”
“마탑주님이요?”
백작과 아들의 반문은 무시되었다.
“베시, 빵과 스튜를 주었으니 나도 음식을 주지. 따라와.”
“마, 마, 마탑주님, 쇠, 쇠, 쇤네가 잘못했습니다. 요, 요, 용서해 주십시오. 흐흐흑! 모, 목숨만 살려주세요.”
베시는 덜덜 떨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먼저 내성 쪽으로 향했다.
“크흐흐! 좋은 생각이네. 근데 오늘의 메뉴는 뭔가? 아까 이놈들이 준 음식 너무 형편없었네. 오늘은 과식해도 되지? 뭘 해줄 건가? 탕수육도 좋고 불고기도 좋네. 갈비찜도 괜찮고, 안동찜닭이라는 것도 좋네. 참! 시뻘건 그거, 그래, 떡볶이라고 했던 그것도 해주면 안 될까?”
‘내가 그동안 많이 해주긴 했군.’
현수가 피식 웃는 새에도 라세안은 계속해서 음식 이야길 한다.
“고구마라는 걸로 만든 맛탕도 좋네. 미역국도 좋고 고등어구이도 좋네. 동그랑땡, 계란말이, 파전, 빈대떡. 참, 삼겹살, 그리고 소주나 막걸리도 좀 꺼내놓게.”
“에구, 아는 게 많으니 먹고 싶은 것도 많군. 오늘 메뉴는 불고기와 파전이야. 술은 소주고.”
“우와, 생각만으로도 침 넘어가네. 어서 가세.”
잠시 후 일행은 내성 주방에 당도했다. 주방에 먼저 발을 들여놓은 건 현수이다. 여전히 C급 용병 차림이다.
“넌 누구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와? 여긴 내성 주방이다. 썩 나가지 못해!”
식칼을 들고 뭔가를 썰고 있던 주방장의 고함이다. 이 소리에 주방 보조와 시녀들의 시선이 쏠린다.
“감시 용병 따위가! 당장 나가라고 했다! 어서 썩 나가!”
“주방 좀 쓰게 해주시게.”
“뭐라고? 여기기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인 줄 아나? 어서 나가! 영주님과 귀빈이 드실 음식을 만들어야 하니까 어, 어서 썩… 아니, 여, 영주님, 어떻게 영주님이 이곳까지…….”
“론슨, 이분께서 주방을 쓰시도록 비켜 드리게. 아니, 곁에서 보조하게. 알겠나?”
“네? 아, 알겠습니다.”
주방장 론슨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인다. 그러는 사이에 현수가 주방장 자리에 들어선다.
“흐음, 조금 어둡군. 메가 라이트!”
번쩍―!
현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방이 환해진다. 수십 개의 광구가 허공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 때문이다.
“……!”
라세안과 머피를 제외한 모두가 화들짝 놀랄 때 현수의 입술이 달싹인다.
“아공간 오픈!”
말 떨어지기 무섭게 시커먼 구멍 하나가 열린다.
“백작, 내성에 있는 인원이 얼마나 되지요?”
“네?”
“노예들까지 포함한 인원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소.”
“아! 자, 잠깐만요. 헨더슨, 인원 파악! 빨리! 어서!”
“네, 영주님!”
말 떨어지기 무섭게 시종들이 흩어진다. 그사이에 조리기구들을 꺼내 정렬한다.
보조하기 위해 곁에 있던 론슨의 눈이 화등잔만 해진다. 스테인리스 재질이라 그가 보기엔 휘황찬란했던 것이다.
잠시 후, 백작의 입이 열린다.
“모, 모두 합쳐서 213명입니다.”
“그래요? 알았습니다.”
아공간에 담겨 있던 신선한 식재료들이 쏟아져 나오자 론슨의 눈이 또 한 번 커진다. 산지에서 곧바로 가져온 것보다도 더 싱싱하고 신선해 보인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란한 솜씨로 불고기와 파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라세안은 만들어지는 족족 보온 마법을 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은 시녀들의 손에 의해 식당으로 옮겨졌다. 영문도 모르고 대기하고 있던 영지 귀족들과 기사 등은 생전 먹어보지 못한 진수성찬에 눈이 커진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물론 너무도 기막힌 맛 때문이다.
음식은 시종과 시녀들에게도 배분되었다. 이들 모두 이실리프 마탑주의 위대함에 찬사를 늘어놓았다.
한편, 곁에서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론슨은 밤새 같은 맛을 재현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하지만 될 리가 있겠는가!
아르센 대륙엔 참기름과 간장이 없다. 그렇기에 끙끙대며 이것저것을 넣어보며 같은 맛을 내려 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주방 시녀들은 론슨의 짜증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결국 불고기는 포기하고 파전에 도전한다.
이것 역시 간장의 부재로 같은 맛을 못 낸다. 론슨은 스스로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좌절한다. 이를 지켜보던 시종장 헨더슨이 한마디 한다.
“이보게, 론슨! 자네가 그걸 똑같이 만들면 마탑주님은 뭐가 되나?”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마탑주님이 나이는 어려 보여도 그게 실제 나이라곤 생각지 않지?”
“그래, 아까 소영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걸 얼핏 들었는데 최소 150살은 되셨을 거라고 하더군.”
“그래! 그런 분이 모처럼 만드신 걸 자네가 어찌 재현해 내나? 조금 심한 욕심 같네.”
“그,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내 욕심이야?”
“그래, 그러니 지금은 그냥 마탑주님만의 요리로 기억하는 게 나을 것 같네.”
어린 시절 함께 자란 동무의 좌절을 보다 못해 한 말이다.
“휴우∼! 그래. 하지만 노력해서 언젠가는 꼭 같은 맛을 내고야 말겠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오늘 먹었던 기막힌 음식을 또 먹어보지. 그나저나 오늘은 내성 노예들까지 다 같은 음식이 나간 건가?”
“그러네, 앞으론 먹는 거 가지고 차별하지 말라고 하셨네. 영주님께서도 그러라 하셨으니 내일부턴 다들 호강할 것이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이네. 과연 마탑주님은 뭐가 달라도 다르신 분이네. 안 그런가?”
“아암! 마법과 검술뿐만 아니라 요리도 신의 경지에 이르신 위대한 분이시지.”
론슨과 헨더슨의 뇌리에 현수의 영상이 뚜렷이 각인되는 상황이다. 같은 시각, 현수는 나직이 혀를 차고 있다.
“쩝, 할 수 없이 여기서 하루를 묵게 되는군.”
“가다가 밤이슬 맞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하암, 난 너무 많이 먹어서 식곤증이 오나 봐. 조금 졸리네. 가서 자야겠어.”
“그래? 그럼 나는 어딜 좀 다녀올게.”
“아! 케이트에게 가려고? 그래, 다녀와. 근데 그렇게 좋아? 틈만 나면 가려고 하는 걸 보면 단단히 반한 모양이네? 그러면 내년 이맘때 조카 보는 건가?”
“뭐, 조카? 이 친구가 지금 나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보긴, 띄엄띄엄 보지. 아무튼 잘 다녀오게. 뼈와 살이 타는 밤을 보내되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하하! 하하하!”
라세안이 너스레를 떨며 제 방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자 현수는 전능의 팔찌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차원이동을 하기 위한 마나가 충진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거참, 이상하단 말이야. 전에는 안 그랬는데…….”
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누군가 노크한다.
똑, 똑, 똑!
“들어와요.”
삐이꺽―!
문이 열리자 다소 겁먹은 듯한 베시가 서 있다.
“베시? 무슨 용무 있어?”
털썩―!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베시가 무릎을 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