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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499화 (499/1,307)

# 499

“마, 마탑주님, 아깐 정말 죄송했습니다. 마탑주님이신 줄도 모르고…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

“마탑주님, 한 번만요.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네?”

계속 고개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지만 현수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저 멀리 멋진 저녁놀이 보인 때문이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 시선을 돌린다. 그때까지도 베시는 고개를 조아린 채 엎드려 있다.

12장 어쭈! 어디서 감히

“베시.”

“네?”

“아직 결혼 안 했지?”

느닷없는 화제이기에 베시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네, 아, 아직…….”

“마음에 둔 사람은 있나?”

“아, 아뇨. 아직…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렇지? 그럼, 머피 어때?”

“머, 머피요? 길잡이 머피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가 보기에 괜찮던데. 어때? 결혼할 마음 있어?”

“가, 갑자기 말씀하셔서……. 갈게요. 머피한테 시집갈게요.”

머피에게 시집가면 용서받는다 생각한 모양이다.

“마음에 없으면 안 해도 돼. 머피는 이제부터 내가 키우려는 인물이니까. 생각해 보라는 거지.”

“네? 마탑주님이 키워요?”

“기사단장은 될 수 없을 거야. 라세안이 워낙 쟁쟁해서. 하지만 기사단의 일원은 될 수 있겠지. 안 그래?”

“네, 네, 그럼요.”

“그럼 가봐. 머피에게. 그 녀석 변태일지도 몰라. 베시가 쌀쌀맞게 군 게 마음에 든다니까.”

“……?”

“늦게 가면 다른 시녀가 차지할지도 몰라.”

“네, 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마탑주님!”

베시가 후다닥 나가자 피식 웃었다. 머피가 했던 말이 떠오른 때문이다. 방금 전 말했듯 쌀쌀맞게 굴 때 예뻐 보였다고 한다. 하여 다리를 놔줄까 했더니 반색했다. 어쩌면 방금 전 변태를 소개해 준 것인지도 모르기에 웃은 것이다.

“흐음, 여기 꽤 오래 머물렀으니 일단은 돌아가자. 마나여, 나를 지구로 보내줘.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안개처럼 스러지며 백작가에서 사라진다.

같은 시각, 마법 수정구 앞에 두 인물이 서 있다. 캐플렛 백작과 영지 마법사이다.

“어서, 어서 연결해 주게. 국왕 폐하께 소식을 전해야 하네.”

“네, 백작님. 자, 잠시만요.”

마법사가 손을 대자 투명했던 수정구 안에 안개 같은 것이 피어오른다. 그리곤 허연 수염을 기른 노인이 나타난다.

“어느 영지의 누군가?”

“아문센 궁정마법사님, 저는 캐플렛 백작가의 통신마법사입니다. 저희 영주님께서 폐하께 긴급히 보고하실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오! 그런가? 그럼 백작을 보여주시게.”

말을 마치자마자 저쪽 수정구에 캐플렛 백작이 나타난다.

“아문센 백작님, 안녕하십니까? 저, 캐플렛 백작입니다.”

“아! 오랜만이네. 자넨 왜 멀린에 안 오는가? 자네 얼굴 본 지 꽤 되었네. 아카데미를 떠나곤 처음 보지?”

캐플렛 백작은 영주가 되기 전 왕립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기사학부라 할지라도 교양과목으로 마법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었다. 당시 아문센이 그 수업을 진행했다. 그때 아문센 백작은 마법학부 학장이었다. 다시 말해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그때 이후 몇십 년 동안 본 적이 없다.

아무튼 아문센 백작은 올해 나이 여든다섯이다. 그렇기에 같은 백작이지만 편하게 말을 놓고 있는 것이다.

“네, 학장님. 몸은 건강하시죠?”

캐플렛 백작은 예전 호칭으로 부른다. 그렇게 해주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럼, 변방에 있다가 중앙에 오니 아주 편하고 좋네. 그나저나 이 시각에 웬일인가? 자네 영지는 국경에 접해 있지 않으니 전쟁 소식은 아닐 것이고, 뭐 좋은 일이라고 있나?”

“네, 백작님! 좋은 일이죠. 놀라지 마십시오. 지금 제 영지에 마탑주님께서 와 계십니다.”

수정구 안의 아문센 궁정마법사의 눈이 커진다.

“에엥? 마탑주님? 로만 커크랜드님은 조금 전까지 왕궁에 계셨네. 근데 지금 거기 계시다고?”

아문센은 현재 5서클 마스터이고 로만 커크랜드는 6서클이다. 아드리안 공국 마법사 중 첫째와 둘째이다.

하지만 둘 다 텔레포트 마법은 쓰지 못한다. 6서클 마스터는 되어야 시전할 수 있는 마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캐플렛 영지에 로만 커크랜드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멀린에서 상당히 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아뇨. 영광의 마탑 마탑주님이 아니라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뭐, 뭐, 뭐라고? 이, 이실리프? 저, 저, 정말인가?”

좀처럼 흥분하지 않기로 이름난 아문센 궁정대마법사가 상당히 놀랐는지 심하게 말을 더듬는다.

“네, 지금 마탑주님께선 제 성에 머물고 계십니다. 조만간 왕성을 향해 출발하신다 합니다.”

“그, 그래? 자, 자넨 그분을 직접 뵈었나?”

“물론입니다. 겉보기엔 이제 겨우 스물다섯 정도로 보입니다. 그런데 10서클이라고 하십니다.”

“뭐? 시, 시, 십 서클? 자네, 그 말 정말인가?”

“네, 마탑주님을 호위하는 라세안이라는 분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라세안? 라세안은 또 누군가?”

“마탑주님의 수석호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 또한 대단합니다. 소드 마스터에 8서클 마법사라고 합니다.”

“뭐, 뭐? 정말 마검사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휘유∼! 대단하시군. 8서클도 어려운데 소드 마스터라니. 과연 이실리프 마탑이네. 안 그런가?”

아문센은 혀를 내두른다. 이때 캐플렛 백작이 입을 연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마탑주님께선 10서클 마법사이시면서 동시에 그랜드 마스터라고 하십니다.”

“커헉! 뭐, 뭐라고? 내,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닌가?”

“아닙니다. 마탑주님은 10서클 대마법사이시면서 그랜드 마스터가 맞습니다.”

“허얼! 세상에!”

“어서 전하께 보고하십시오. 마탑주님께서 그곳으로 가시는데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지. 알겠네. 참, 그분께서 출발하시면 꼭 다시 연락해 주게.”

“물론입니다. 당연히 연락드려야죠.”

“그래, 그럼 이만 통신 해제하세.”

“자, 잠깐만요!”

“왜? 더 할 말 있는가?”

“네, 마탑주님을 맞이하실 때 주의하십시오.”

“뭘?”

“C급 용병 차림으로 다니십니다. 라세안님도 용병 차림이구요. 그리고 일행이 하나 더 있습니다. 피리안 영지의 카트린느 조세핀 반 피리안 양도 같이 갑니다.”

“카트린느가 마탑주님을 수행하는 건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셋이 일행입니다. 병사나 기사들에게 겉모습만 보고 실수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알겠네. 반드시 주의하도록 하지. 정보 고맙네.”

“뭘요.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웬만하면 같이 오게. 자네 공이 아닌가!”

“아이고, 아닙니다. 전 제 영지 건사하기에도 바쁩니다.”

캐플렛 백작은 현수를 수행하다 자그마한 실수라도 하면 큰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쫓아갈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알겠네. 전하께 자네의 공을 말해 드리겠네.”

“감사합니다. 조만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통신이 끝날 즈음 영지 마법사는 기진맥진해 있다. 긴 시간 동안 통신이 되도록 마나를 불어넣다 지친 것이다.

아무튼 이 통신이 끝난 후 수도인 멀린은 난리가 벌어진다. 물론 이실리프 마탑주를 환영하기 위한 준비 때문이다.

제2왕후와 잠자리에 들었던 공왕이 놀라서 튀어나왔다. 왕성에서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했던 공작들은 물론이고 후작과 백작, 자작과 남작 모두 헐레벌떡 왕성으로 몰려든다.

그중 가장 난리가 벌어진 곳은 헥사곤 어브 이실리프이다. 이실리프 마탑주는 9서클 마스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생겼으며 몇 살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제1왕후와 제2왕후가 주도적으로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에 머물 여인들 교체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아름답기로 이름난 귀족가의 여식들은 9서클 마스터라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보나마나 100살도 넘은 노인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캐플렛 백작으로부터 귀중한 정보가 입수되었다. 마탑주가 이제 겨우 25세 청년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소문이 번지자 거의 모든 귀족이 딸이나 조카를 데리고 왕궁으로 몰려든다.

이실리프 마탑주의 여인이 되면 단번에 팔자를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긴 공왕과 버금갈 권력을 지녔으니 현수의 여인이 되면 왕후와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

국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두 공주를 넣도록 했다. 하여 제1왕후의 열다섯 살 된 공주와 제2왕후의 열여섯 살 된 공주가 들어갔다.

이에 질세라 로레알 공작은 열일곱 살 된 손녀를, 필립스 공작은 열여덟 살 된 손녀를 보냈다.

공국 최고 권력자들이기에 불만이 있었지만 귀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남은 두 자리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이 벌어진다.

그러는 가운데 대대적인 청소 작업이 시작되었다. 거리의 오물은 모두 치워졌고, 지저분한 것들은 새것으로 교체되었다.

한국으로 치면 졸지에 새마을운동이 벌어진 셈이다.

이 과정에서 죽어나는 것은 평민과 노예들이다. 천 번 삽질하고 한 번 허리를 펼 정도로 중노동을 감당해야 했다.

이사이에 각국 세작들이 멀린으로 스며든다.

이실리프 마탑주가 과연 누구이며, 정말 10서클 대마법사이면서 그랜드 마스터인지 알아내기 위함이다.

전쟁 중이던 카이엔 제국과 라이셔 제국, 그리고 크로완 제국의 모든 전선이 고착되었다. 최고위급 마법사와 검사들이 대거 멀린으로 이동한 까닭이다.

대륙에 소문나기를, 이실리프 마탑주는 하인스라는 이름을 쓰며 10서클 마법사이다. 또한 지난 수백 년간 어느 누구도 이르지 못한 그랜드 마스터라고 한다.

그리고 마탑주의 수석호위 라세안은 8서클 마법사이고 소드 마스터라고 한다. 둘 다 겉모습은 25세 청년이다.

대륙으로 번져 나간 이 소문 때문에 두 종류의 인물들이 속속 멀린으로 집결하고 있다.

첫째는 일곱 개 마탑의 탑주들과 부탑주들이다. 그리고 재야에 묻혀 묵묵히 마법 공부를 하던 마법사들이다. 이들 중 최고가 7서클이다. 그런데 10서클이 나타났으니 모여드는 것이다.

7서클과 8서클은 대단한 차이가 있다. 가히 넘을 수 없는 벽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무려 10서클이라 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토끼와 호랑이 정도가 될 것이다.

토끼 수천 마리가 있다 하여도 호랑이 한 마리를 감당할 수 없듯 7서클은 감히 10서클에 맞서 대항할 수 없다.

10서클 마법사의 안티 매직 필드라는 말 한마디면 모두가 평범해지기 때문이다. 이러니 조금의 불순한 마음도 없다.

살아서 매지션 로드를 알현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라 여기며 모이는 것이다. 물론 한마디쯤 귀중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는 있다.

아무튼 모여드는 마법사들 가운데에는 유희 중인 드래곤도 여럿 포함되어 있다. 드래곤 로드조차 이루지 못한 10서클 마법사라는 소문이 호기심을 자극한 때문이다.

두 번째 무리는 소드 마스터들이다.

대륙의 최강 전력은 소드 마스터이다. 이런 소드 마스터와 그랜드 마스터를 비교하면 사슴과 호랑이 정도 된다.

사슴 수백 마리가 있다 한들 호랑이에게는 조금의 위해도 가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대이다.

따라서 도전할 생각은 꿈에도 없다. 잘못하면 목숨만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자신이 바라마지 않는 그랜드 마스터라는 경지는 대체 어떤가 싶어 모여드는 것이다.

그저 가까이서 검신(劍神)을 보고 싶은 것뿐이다.

물론 한 번이라도 대련하는 영광이 있었으면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이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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