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510화 (510/1,307)

# 510

* * *

“어서 오게.”

“네, 안녕하시지요, 회장님?”

꾸벅 고개를 숙인 현수는 준비해 온 과일 바구니를 내놨다.

“에구, 이런 건 뭐하러 사오나? 그냥 와도 되는데.”

“그래도 처음 댁으로 찾아뵙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옵니까? 저희 어머니께서 어느 댁이든 처음 찾아뵐 때는 꼭 이렇게 하라 하셨습니다. 더구나 여긴… 말씀 안 드려도 아시죠?”

“하하, 그래! 안사돈 덕에 맛있는 과일을 먹겠군.”

천지그룹 이연서 회장이 환한 웃음을 짓는다. 처조부의 집이라는 뜻을 이해한 것이다.

서울로 오는 동안 현수는 이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늦더라도 자택을 방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의아했지만 곧바로 백화점을 찾아 과일 바구니를 구입했다. 조만간 처조부가 될 사람인데 빈손으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회장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선 고운 여인이 서 있다.

“이쪽이 내 내자일세.”

나이가 많음에도 중년 여인처럼 보이는데 젊은 시절 틀림없이 미인 소리를 들었을 얼굴이다.

“아! 안녕하십니까? 김현수라 합니다.”

“어서 와요. 이이에게 말 많이 들었다우.”

“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수가 정중히 허리 숙여 절을 했다.

이 회장이 연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큰절을 해야 한다. 처조모와의 첫 대면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큰절은 조금 과하다. 그렇기에 정중함만을 표현한 것이다.

“자,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지.”

“네, 회장님!”

이 회장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들어가니 널찍한 거실이 보인다. 재벌 회사 회장 집다운 인테리어이다.

이 회장은 더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곳은 서재이다. 안에는 정장 차림 장년인 하나가 앉아 있다.

둘이 들어서자 황망히 일어선다.

“흐음, 인사하지. 우리 회사 고문변호사이네.”

“처음 뵙습니다. 김현수라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변호사 김태응입니다.”

“자, 자리에 앉지.”

무슨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앉으라니 앉았다.

자리를 잡자 가정부가 음료를 내온다. 인삼을 착즙기로 짜서 얻은 즙에 꿀을 넣었다고 한다.

“이 시간에 부른 것은 자네의 의향을 듣고 싶어서이고, 줄 것이 있어서이네. 김 변호사, 시작하지.”

“네, 회장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김태응 변호사가 테이블 위의 서류를 현수 쪽으로 돌려놓으며 입을 연다.

“이건 제주도 섭지코지에 있는 유니콘 아일랜드 별장 50채에 대한 소유권 이전 문건입니다.”

“네?”

유니콘 아일랜드에 지어진 별장은 크기가 제각기이며 디자인 또한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모두 단독주택처럼 조성되어 있어 상당히 고가이다.

분양가가 아닌 원가로만 계산해도 최소 한 채당 10억 이상은 된다. 그런 것 50채라면 500억 원이 넘는다.

현수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을 때 이 회장이 입을 연다.

“자네도 사업을 하니 아랫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때가 있을 거네. 내 선물이니 유용하게 쓰게.”

처조부로서 손서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히 고개 숙여 사의를 표하자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역시 통이 크군. 하하, 마음에 들어.”

“……!”

현수는 대답 대신 웃음만 지었다. 이보다 훨씬 통 큰 선물을 두 개나 받아 챙기지 않았는가!

MSC사의 아폰테 사장보다 이 회장이 더 부자이다. 그러니 큰 부담을 갖지 않았다. 게다가 이건 일종의 혼수이다. 그렇기에 고맙게 받겠다는 뜻으로 웃어준 것이다.

“흐음, 이렇듯 쉬운 일을……. 김 변호사는 수고했네. 이만 나가봐도 좋네.”

“네, 회장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김태응 변호사가 테이블 위의 서류들을 주섬주섬 수습하여 현수에게 건넸다.

“소유자가 정해지면 회장님께서 등록세와 취득세까지 모두 완납하실 것이니 제게 연락 주십시오.”

등기 이전만 남았다는 뜻이다.

김 변호사가 나가자 이 회장이 현수와 시선을 맞춘다.

“천지기획, 또는 천지개발이라는 회사를 새로 만들 것이네. 천지그룹을 먹여살릴 일감을 만드는 회사라 생각하게.”

“……!”

“자네가 맡아줬으면 좋겠네.”

“전 건설에 계속 머물고 싶습니다.”

“그래도 되네. 겸직하면 되니 말이네.”

“……?”

“나이가 있으니 회장은 그렇고 사장을 하게. 위로 부회장이나 회장은 없을 것이네. 자본금은 1,000억 정도로 하지.”

“회장님……!”

현수가 무언가 말을 이으려 할 때 이 회장이 먼저 말을 잇는다.

“건설엔 이창진 회장과 신형섭 사장이 있으니 부사장을 하게. 마음 같아선 부회장직이라도 주고 싶지만 신 사장이 있어 그러니 양해하게.”

“회장님, 전 괜찮습니다. 전무이사라는 직함도 지금 제겐 버겁습니다. 그런데 부사장이라니요. 괜찮습니다.”

“아냐. 자네 직급이 전무이면 천지기획, 또는 천지개발의 위상이 가벼워지네. 마음 같아선 천지기획 사장만 했으면 좋겠지만 자네가 건설에 애착을 가지니 그건 내가 양보하지.”

“회장님!”

“계열사를 떼어주고 싶지만 그건 남의 눈이 있네. 그러니 이 정도로 만족해 주게.”

“아닙니다. 저는 정말 괜찮습…….”

“어허! 어른이 주면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받는 거네. 조금 아까처럼.”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허허허!”

이 회장은 마음에 든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나저나 북한엔 언제 들어갈 생각인가?”

“신 사장님이 제게 친 러시아 인사들을 알려준다 하셨습니다. 그걸 확인하는 대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가거든 주의하게. 그리고 가스전 관련 공사를 못해도 좋네. 위험하거든 얼른 돌아오게.”

처조부로서 손서의 안위를 생각하는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온 김에 한잔해야지?”

“네?”

“안주를 준비시켰으니 가서 한잔하세. 설마 술 한잔도 안 하고 내게서 손녀를 데려가겠다고 하진 않겠지?”

“네, 그럼요! 가시죠.”

“하하! 그래, 그래야지.”

너털웃음을 터뜨린 이 회장이 몹시 기분 좋다는 듯 현수의 어깨를 두드린다.

안내를 받아 식탁으로 가니 김치찌개, 고등어구이, 그리고 빈대떡이 차려져 있다.

“난 말이네, 어려웠던 시절에 마셨던 막소주가 세상에서 제일 좋네. 자넨 어떤가?”

“저도 와인이나 양주보다 소주를 훨씬 좋아합니다.”

“그래? 하하, 그럼 같이 한잔하세.”

“네, 회장님.”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여 한 병을 비웠을 무렵이다.

“어머! 김 전무님, 오랜만이에요.”

이 회장의 손녀 가운데 하나인 이수린이다.

“어라! 네가 이 시간에 여기 웬일이냐?”

“아잉, 할아버진! 할머니가 하도 심심하다고 하셔서 놀아드리려고 왔단 말이에용.”

할아버지 앞이라 애교를 부리는 모양이다.

“헤헤, 근데 술을 보니 좀 당기네요. 저도 같이 먹어도 되죠? 그죠?”

“뭐?”

이 회장이 부러 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수린은 혓바닥을 쏙 내밀고는 얼른 빈 술잔을 내온다.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고 한잔 마시겠사옵니다. 호호!”

냉큼 현수의 곁에 앉으려 하자 이 회장이 만류한다.

“어허! 김 전무는 임자가 있어. 그러니 이쪽에 앉아야지.”

“쳇! 저도 알아요. 근데 제가 이 자리에 앉으려는 건 김 전무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여기 앉아야 할아버지 얼굴이 잘 보여서 그런 거란 말이에용.”

“그, 그러냐? 허어, 그래, 그럼 거기 앉아라.”

역시 손녀의 애교를 이기는 할아버지는 없나 보다.

“뭐해요? 저도 한잔 주세요.”

이수린이 술잔을 내밀기에 한잔 따라주었다.

“근데 진짜 크리스마스이브에 결혼해요?”

요즘 심심치 않게 뉴스로 언급되는 현수의 결혼 이야기가 무척이나 궁금한 모양이다.

“아, 네. 그날 합니다.”

“쳇! 신부가 바뀌면 좋은데.”

“뭐? 너 그거 무슨 소리니?”

이 회장이 또 한 번 엄한 표정을 짓는다.

“생각해 보니까 김 전무님 같은 신랑감이 없더라구요. 자기 힘으로 이만큼 일어난 사람이 어디 있어요?”

“……!”

“그런데 말이에요, 혹시 신부 바꿀 생각 없어요? 날 택하면 무조건 옆에 서줄게요.”

이 회장을 슬쩍 바라본 수린이 얼른 잔을 비운다.

쭈우욱―!

“쳇, 농담이었어요. 저는 이만 할머니께 가요.”

수린이 빈대떡 한 점을 입에 넣고는 쪼르르 달려간다.

“처제가 좀 철이 없지?”

“네? 아, 네. 그래도 예쁘기만 한걸요. 좋은 신랑감 찾아주세요.”

“그래야지. 저 녀석 속 안 썩일 착한 놈으로.”

이 회장과 현수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소주 세 병을 비웠다.

* * *

“미스터 드미트리, 오랜만입니다.”

“아, 보스.”

“에구, 보스라니요?”

“모스크바의 대보스께서 보스라 칭하라 했습니다. 그러니 보스인 거지요.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네, 미스터 드미트리도 잘 지냈습니까?”

“물론입니다. 한국은 따뜻해서 참 좋군요.”

“하하! 그럼요. 모스크바보다는 훨씬 낫지요.”

드미트리는 현수의 전화를 매우 반색하며 받는다.

조금 전 말한 대로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대보스로부터 사위가 되었으니 보스로 모시라는 전갈을 받은 바 있다.

하여 축하 인사와 더불어 결혼 선물을 준비했다. 하지만 통화는 물론 선물을 전해주지도 못했다.

모스크바로부터 또 다른 전화를 받은 때문이다.

레드 마피아는 일반적인 폭력 조직이 아니다.

조직원 중 구 소련 시절 KGB에 몸담고 있던 자들도 있고, 러시아 군부를 예편한 이들도 많다.

이들 중에는 스페츠나츠 같은 특수부대원도 있지만 정보를 담당하던 장교도 상당수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 첩보 기관이 현수에 대해 조사를 하였다는 것을 파악했다.

이 내용은 즉시 보고되었다.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는 다른 선을 이용하여 러시아 첩보 기관도 같은 정보를 입수했는지를 확인했다.

동일하다는 답변을 듣고는 드미트리에게 먼저 접근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혹시라도 현수의 신상에 불이익이 가해질까 싶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레드 마피아가 배려하여 드미트리가 연락하지 못했던 것이다.

“시간 되면 얼굴 한번 봅시다.”

“그러죠. 마침 서울에 올라와 있으니 제가 이실리프 무역상사로 찾아뵙겠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곤 이실리프 무역상사로 향했다.

“아! 사장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은정 실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에구, 뭐 대단한 사람 왔다고. 앞으론 이러지 마세요.”

“네? 아, 네. 그래도 어떻게…….”

“괜찮아요. 업무 보고할 거 있어요?”

“그럼요. 안에 계세요. 금방 들어갈게요.”

“흐음, 그럼 그래요.”

사장실로 들어가 컴퓨터 먼저 작동시켰다. 드미트리가 오기 전까지 궁금한 것들을 검색하기 위함이다.

부팅되는 동안 살펴보니 책이 한 보따리 쌓여 있다. 전에 주문했던 것들이 배달된 모양이다.

엔진과 보일러, 그리고 수차와 관련된 전문 서적들이다.

후루룩 책장을 넘기며 살펴보니 원한 것들이 많이 보인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슬쩍 웃는데 문이 열린다.

“사장님!”

“네, 들어와요.”

이 실장은 현수가 좋아하는 사과주스를 내놓고는 서류를 한 보따리 풀어놓는다.

“여기 이거… 결재 부탁드려요.”

“휴우! 많군요. 좋아요. 보긴 할 건데, 이중에 중요한 건이 있나요?”

“네, 신입사원을 네 명은 더 뽑아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업무용 차량도 구입해야 하구요.”

“직원과 차는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요?”

“거래처 변경이 필요한 곳도 있습니다.”

“하자가 없는 한 거래선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네. 그런데 납기에 문제 있는 제약사들이 있어요.”

“납기를 못 맞춰요?”

“네, 다국적 제약사 가운데 몇이 우리가 원하는 날짜를 계속 안 맞춰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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