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7
현수는 하루가 지난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는 여드레가 지났다. 문제 풀이에 빠져 있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처음엔 배가 고팠으나 그 느낌은 금방 사라졌다. 그렇기에 시간의 흐름을 잊은 것이다.
박진영 과장 등은 현수가 무언가에 몰두해 있기에 조용히 출근했다가 퇴근하기를 반복한 것이다.
“…고마워요.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내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야? 만 하루가 지났나?’
현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 조 대리가 생긋 웃는다.
“네, 전무님도요.”
생글생글 웃는다. 현수가 며칠 동안 문제 풀이에 몰두해 있는 동안 건축사 한창호와 즐거운 데이트를 한 결과이다.
조 대리가 건넨 커피를 받아 든 현수는 기지개를 켜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곧장 모교로 향했다.
“교수님이 믿어주실지 모르겠네.”
운전을 하며 피식 실소를 지었다. 대학 시절 별반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알바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전 세계 어느 수학자도 풀지 못한 난제 여섯을 모두 풀어왔다고 하면 얼굴이 어찌 변하겠는가.
생각만 해도 웃겨서 피식 웃은 것이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어! 자넨… 아! 그래, 반갑네, 반가워. 어서 오게.”
“그동안 안녕하셨지요?”
“하하, 그럼, 그럼. 자네가 승승장구하는 소식은 잘 듣고 있네. 얼마나 기쁜지 몰라. 하하하하!”
학창 시절 대수학 이론을 가르쳐 주셨던 스승이 환히 웃는다.
“저어, 이거…….”
“에구, 그냥 오지 뭘 이런 걸…….”
현수가 건네는 양주를 받아 든 교수는 또 한 번 웃는다. 애주가라는 걸 알기에 사온 술이다.
현수가 가져온 것은 발렌타인 30년산이다. 시중에선 110만 원 정도 하지만 면세점에서 36만 원쯤 주고 구입한 것이다.
외국을 자주 드나들기에 선물할 곳이 있을까 싶어 올 때마다 몇 병 구입해 둔 것 중 하나이다.
“오! 이건 발렌타인 30년산이군. 고맙네. 자네 덕에 내 입이 호강하겠어.”
교수의 입이 헤벌쭉해진다.
“그나저나 바쁠 텐데 웬일인가? 내가 뭐 도와줄 일이라고 있는 건가? 참, 이거 하나 들게.”
책상 위에 있던 주스 캔 하나를 건넨다. 아마도 학생들이 드나들면서 놓고 간 것일 것이다.
“네, 고맙습니다. 그리고 교수님께 도움 청할 일이 있어 온 거 맞습니다.”
“그래? 뭐지? 내 힘닿는 데까지 돕겠네.”
“우선 이것 좀 봐주십시오.”
가방에서 꺼내 건넨 것은 6대 난제 중 하나인 P대 NP 문제이다. 이것은 ‘알고 보면 쉬운 문제가 답을 알기 전에도 쉬운 문제인지를 증명하라는 것’이다.
처음 무심코 몇 장을 들춰보던 교수가 안경을 고쳐 쓰곤 내용에 빠져들고 있다.
현수는 조용히 주스 캔을 비우곤 두리번거렸다.
학창 시절에 드나들었던 그 모습 그대로이다. 달라진 것이라곤 책이 많이 늘어 있다는 정도이다. 책장은 이미 꽉 차 있고, 책상 위는 물론이고 테이블과 바닥에까지 쌓여 있다.
현수의 풀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교수는 MIT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고작 삼류대학에 머물고 있다.
한국의 대학들은 교수의 실력보다는 다른 것에 더 중점을 두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현수가 스승을 찾은 이유는 자신의 증명을 확인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이다. 그리고 그만한 실력이 있기 때문이다.
“흐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흐음! 대단해. 대단하군.”
교수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 중얼거린다.
그러면서 종이를 끌어당겨 뭔가를 계산해 보기도 하고,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을 뽑아내 뭔가를 확인하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도 교수는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간식거리라도 사올 생각이다.
계절은 스산한 가을이지만 캠퍼스엔 낭만이 넘친다.
생기발랄한 남녀 학생들이 손잡고 걷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보인다.
한쪽엔 열심히 남의 리포트를 베끼는 학생도 있다.
현수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자신도 저런 경험이 여러 번 있기 때문이다.
증명을 다 보시면 연락해 달라는 쪽지를 남기고 왔으니 시간은 넉넉하다. 그렇기에 캠퍼스 구석구석을 돌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4년을 다닌 교정이다. 그런데 처음 가보는 곳도 있다.
알바하느라 돌아다닐 시간조차 부족했던 때문이다.
말끔한 양복 차림인지라 학생들과 차별되었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특히 여학생들의 시선이 많다.
의복 때문이라 생각한 현수는 그러거나 말거나 낙엽 지는 교정을 거닐었다.
붉게 물은 단풍나무 아래에서 나뭇잎을 살피던 현수에게 말을 거는 여학생이 있다.
“저어, 혹시… 천지건설의 김현수 전무님 아니신가요?”
“…저를 알아요? 어떻게……?”
“아! 맞구나. 반갑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사진 한 장 찍어주시면 안 될까요?”
“네?”
“친구들에게 자랑하려고 그래요. 전무님 같은 유명 인사를 만나기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아, 그래요? 그럼 그럽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휴대폰을 꺼낸다. 그리곤 현수 곁에 바짝 달라붙어 뺨과 뺨을 대곤 셀카를 찍는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 내년에 졸업하는데 이실리프 무역상사에 취직할 수 있을까요?”
“네?”
“저, 무역학과 3학년이에요. 내년이면 졸업하는데 선배 언니들이 거기 좋다고 해서요. 꼭 가고 싶은데 뽑아주시면 안 돼요? 인턴도 괜찮은데.”
느닷없는 요청이기에 잠시 대꾸하지 못한 현수가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그, 그래요. 내년에 오세요. 근데 이름이 뭐죠? 이름을 알아야 미리 써놓지요. 내년 신입사원으로.”
“어머! 정말요? 호호! 고맙습니다.”
쪽―!
팔짝팔짝 뛰더니 뺨에 뽀뽀를 한다.
“헤헤, 저 신은희예요. 신은희! 내년에 저 꼭 뽑아주셔야 해요? 잊지 마세요.”
“하하! 그래요. 대신 열심히 공부해서 쓸 만한 실력 갖추고 와야 합니다.”
“호호! 그럼요.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신은희는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연신 고맙다고 한다. 현수는 피식 웃고는 캠퍼스 밖으로 향했다.
이때 등 뒤로 들리는 소리가 있다.
“엄마! 나 취직했어! 나 취직했다고!”
목소리가 너무나 생기발랄하여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응! 이실리프 무역상사라고, 우리 학교 선배님이 만든 회산데 거기 너무 좋대. 응! 진짜야. 거짓말 아냐. 나 방금 전에 김현수 전무님 만나서 같이 사진도 찍었단 말이야. 뭐라고?”
은희의 목소리가 소프라노처럼 올라가고 있다.
“치! 하나밖에 없는 딸의 말을 왜 그렇게 안 믿어? 좋아, 그럼 내가 지금 엄마한테 사진 찍은 거 보낼 테니까 봐. 진짜 김현수 전무님이야. 국민전무인 천지건설의…….”
모녀간의 대화를 들으며 교문을 나섰다.
멀지 않은 곳에 알바 하던 카페가 보인다. 그곳에서 뭔가를 사려다가 말았다. 사람이 많아서이다.
들어가면 금방 못 나올 것 같다. 하여 인근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음료수와 갓 구운 빵을 샀다.
천천히 걸어 교수 연구실로 갔는데 여전히 삼매경에 빠져 있다. 하긴 한두 페이지도 아닌 걸 일일이 확인하려면 시간깨나 걸릴 것이다.
공용 복사실에 들러 증명 자료를 여러 부 복사했다.
머릿속에 다 있지만 다시 쓰기 귀찮아서이다. 연구실로 되돌아왔지만 교수는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이다.
“끄응!”
나직한 침음을 내고는 빵과 음료수를 권했다. 읽으면서 먹고 마신다. 아마 무의식에서 행해지는 행동일 것이다.
하릴없기에 또 나왔다. 도서관 열람실로 들어가 읽을 만한 책들을 찾았다.
9장 이것도 검토해 주십시오
현수가 뽑아 든 책은 마이크로웨이브와 레이더, 그리고 안테나와 관련된 원서들이다.
자리를 잡고 앉아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이번 IQ검사 결과 머리가 좋아졌다는 판정은 받았지만 이처럼 좋아졌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할 정도로 쉽게 읽힌다.
물론 이해와 암기를 동반한 읽기이다.
현수는 시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연구실에서 자료를 검토하고 있는 교수님은 퇴근 늦게 하기로 이름나신 분이다.
학창 시절을 되돌려 떠올려 보니 연구실에서 철야를 하신 날이 엄청 많았다.
게다가 교수님 탁자 위엔 또 하나의 골치 아픈 검토 자료가 얌전히 올라 있다.
액체와 기체의 흐름을 기술하는 편미분 방정식의 해를 구하라는 내비어―스톡스 방정식의 풀이가 기록된 것이다.
이것 역시 아직 풀리지 않는 문제의 해이다.
수학자들은 지금까지의 편미분방정식 이론만 가지고는 원하는 만큼의 유체의 운동에 관한 지식을 얻는 것이 어렵다고 여기고 있다. 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와 방법이 필요하다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의 풀이는 A4 용지로 132장이나 된다. 따라서 도서관에서 밤을 새워도 교수님에게 실례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현수가 뽑아온 서적들을 다 읽고 고개를 든 시각은 새벽 3시 30분이다.
“시간이 꽤 흘렀네. 교수님은 다 보셨을까?”
교수 연구실로 가보니 여전히 그 자세이다. 아직 첫 번째 것도 다 읽지 못한 모양이다.
“교수님! 교수님!”
“으응! 아, 그래, 아직 안 갔나?”
“퇴근 안 하십니까?”
“나? 난 이것 좀 더 보고. 그나저나 이거 정말 자네가 푼 거 맞나?”
교수는 믿음이 안 간다는 표정이다. 현수의 학창 시절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제가 푼 것 맞습니다.”
“자네 천지건설 전무이사 되기까지 엄청 바쁘지 않았나? 콩고민주공화국을 드나드느라…….”
신문 기사로 하도 많이 보도되어 대한민국 국민 거의 전부가 아는 사실이다. 교수는 현수가 틈틈이 시간을 내서 문제를 푼 것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
“전무가 된 다음부터는 그리 바쁘지 않았습니다. 이건 그때 이후로 푼 거구요.”
“뭐? 자네 전무 된 지 얼마 안 되었잖은가?”
놀라움을 넘어 당혹스럽다는 표정이다.
“졸업 후에 머리가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거 제가 푼 것 맞습니다. 근데 오류가 있나요?”
“오류? 아직까진 없네. 그나저나 참신하네. 어떻게 이런 생각으로 접근했어? 아직 다 본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본 건 다 맞네. 대단해. 정말 대단해.”
교수는 흐뭇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때 현수는 종이 뭉치 하나를 더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이건 내비어―스톡스 방정식을 풀어본 겁니다. 다 보신 다음에 이것도 검토해 주실 거죠?”
“뭐? 내비어―스톡스 방정식도 풀었어? 정말인가?”
현수가 내민 두툼한 A4 용지 철을 받아 든 교수는 정신없이 뒤적인다.
“네. 나머지 네 문제도 모두 풀었습니다. 그것도 여기에 두고 갈 테니 읽어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뭐, 뭐라고? 나, 나머지 네 문제도? 그럼 리만 가설, 양―밀스 이론과 질량 간극 가설, 버치와 스위너톤―다이어 추측, 호지 추측을 모두 풀어냈단 말인가?”
“네. 한번 해보았는데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세, 세상에!”
“참,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도 풀어봤습니다. 이건 누가 증명했다고 들었는데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검토 부탁드립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까지?”
너무나 놀라 벌떡 일어난 교수가 이마를 짚으며 털썩 주저앉는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영화 한 편이 있다.
‘굿 윌 헌팅’이라는 1997년에 개봉된 영화이다.
영화의 내용은 보스톤 남쪽의 빈민가에 살던 윌에 관한 이야기이다.
MIT공대에서 청소부 일을 하는 윌은 대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는 청년이다.
이 대학의 수학과 교수 램보는 노벨상을 수상한 교수들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어려운 문제를 복도의 칠판에 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