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0
“얌마, 내가 너 여기다 데려다 놓을 때 이렇게 부려먹으려고 했겠냐? 사람은 필요한 만큼 뽑아. 넌 그저 지휘만 하라고.”
“이실리프 상사가 만들어진 이래 지금껏 단 한 푼도 못 벌어들였다. 그런데 마냥 지출만 하라고?”
회사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친구이다. 그렇기에 화를 낼 수 없었다.
“돈 때문에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통장에 충분히 넣어줄게. 그러니 그만 화 풀어라.”
“좋아, 얼마를 입금시켜 놓을 건데? 이번 달에 지출한 돈이 얼마인지나 알아? 사람 뽑고, 교육시키고, 출국시키는 데 드는 돈이 얼만지 알아?”
“……!”
“콩고민주공화국에 가면 숙소 마련해 줘야지, 먹을 거 준비해 줘야지 등등, 그야말로 매일 돈 드는 일만 있다. 너한테 얼마나 여유 자금이 있는지 몰라도 네가 천지건설에서 받은 보너스랑 연봉 다 꼴아박아도 모자라!”
민주영이 핏대를 세우고 열변을 토한다.
“알았다, 알았어. 워워! 진정해, 진정해. 돈 넣어줄게. 한 5천억 원이면 되냐? 아니다. 아예 1조 원 넣어줄게.”
“뭐?”
느닷없이 천문학적인 숫자가 나오자 민주영이 입을 딱 벌린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금액이기 때문이다.
같은 순간 현수는 드워프들에게 맡긴 금괴가 얼마나 제련되었을까 생각했다.
금 1온스당 국제 금 시세는 1,815.67달러 정도 된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12.5㎏짜리 금괴 하나의 가격은 8억 7천만 원 정도이다.
방금 언급한 5천억 원을 마련하려면 575개쯤 필요하다. 7,187.5㎏이다.
1조 원을 만들려면 1,150개가 있어야 한다. 14.374톤이다.
현수 본인이 나서서 금괴를 처리할 방법은 없다.
레드 마피아를 통하거나 러시아, 또는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에 의뢰해야 한다. 어느 것을 택하든 수수료를 지급해야 한다.
또 다른 방법이 있다면 한국은행에 매입, 의뢰를 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금괴의 소유주를 타인으로 해야 한다.
‘흐음, 처분 방법을 미리 생각해 둬야 하는군.’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정신을 차린 민주영이 묻는다.
“방금 한 말 진짜냐? 정말 그만한 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는 거야? 기왕에 그럴 거면 5천억이 아니라 1조 원을 빌려. 그걸 은행에 맡기면…….”
주영은 얼른 계산기를 꺼내 부지런히 수치를 입력한다.
시중 은행 정기예금 금리는 대략 3%대이다.
1조 원을 예치하고 1년을 기다리면 300억 원의 이자가 발생된다. 이자세를 제외한 수령액은 대략 184억 원 정도 된다.
이것은 이실리프 상사 입장에서 보면 공돈이다.
유난히 숫자에 민감한 민주영의 입이 양쪽으로 벌어진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기사가 생각난다.
2013년 2월 한국은행은 금을 매입하여 보유량을 104.4톤으로 늘렸다. 러시아도 금 보유량을 늘렸다고 한다.
‘흐음, 한국은행과 러시아 정부에 파는 게 제일 낫겠군. 근데 얼마나 팔지?’
각국이 지출할 능력을 알 수 없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의향을 물어야겠군.’
“아무튼 조만간에 돈을 보낼 거야. 알아서 잘 써라. 그리고 모든 일을 네가 하려고 하지 말고 사람을 뽑아서 써.”
“그래, 알았다.”
넉넉하게 돈 보내준다는 말에 마음이 풀렸는지 주영의 음성이 완연하게 부드러워진다.
“벌목과 개간 장비들은 다 들어갔냐?”
“그래, 보냈다. 조만간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될 거야.”
“우리 쪽 사람들 다치지 않게 해.”
“그렇지 않아도 그러고 있다. 너 없을 땐 천지약품 이춘만 사장님이 잘 협조해 주신다.”
“그래?”
지금껏 듣지 못한 내용이기에 눈을 크게 뜨자 주영의 설명이 이어진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정글엔 각종 맹수가 서식하고 있다.
이들이 습격할 경우 근로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용병대가 현지에서 활약 중이다.
이들에겐 M16 소총과 유탄발사기 등이 지급되었다.
개발 현장이 치외법권으로 지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엄연한 무기 반입이기에 단속 대상이다.
주영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수에게 연락을 했으나 닿지 않았다. 모스크바에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하여 천지약품으로 전화를 했고, 이춘만 지사장이 나서서 모든 일을 해결해 주었다.
현수를 대신하여 가에탄 카구지를 찾은 것이다. 이후로 현지에서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 중이다.
킨샤사에 마련되어 있는 임시 거주지는 킨샤사 경찰청장인 후조토 쿠아레의 배려로 엄중한 보호를 받고 있다.
킨샤사로부터 비날리아 지역과 반둔두 지역으로 가는 동안엔 콩고민주공화국 정부군의 보호를 받는다. 이들에겐 심심치 않게 출몰하는 반군 소탕 임무도 부여되어 있다. 정부 입장에선 일석이조이기에 기꺼이 병사들을 파견한 것이다.
전체적인 상황을 보고받은 현수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피력했다. 주영은 메모를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지도 못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까지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렬이는 어떠냐?”
“신세계마리타임의 김상렬? 그 자식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술도 못 마신다더라. 체중도 확 줄었대.”
“그래? 다행이다. 그 자식은 살 좀 빼긴 해야 해. 그치?”
“흐흐흐! 그렇지. 게다가 돈까지 버니 일석이조지.”
“알았다. 참, 이 실장님하곤 잘되는 거지?”
“그래, 내년 3월 1일에 날 잡았다.”
“오, 그래? 축하한다.”
“미리 말하는데, 신혼여행은 꼭 갈 거다. 그러니 아무리 바빠도 나 잡지 마라. 알았지?”
“당근이지. 참, 신혼여행은 내가 가는 데로 가라.”
“넌 어디로 가는데?”
“스위스 융프라우에 있는 멋진 별장이야.”
“흐음, 3월의 스위스라……. 생각해 볼게.”
“오냐. 난 이만 간다. 알아서 잘 꾸려주라.”
“걱정 마라. 대신 자주 와라. 상의할 게 많으니까.”
“오케이! 급한 건 문자로 보내도 돼.”
“돈도 부쳐 줘라.”
“오냐!”
손을 흔들며 자리를 뜨는 현수를 바라보는 민주영의 뇌리로 흐르는 상념이 있다.
‘얌마, 1천억만 부쳐 줘도 형님이라고 부르마.’
5천억, 또는 1조를 송금하겠다는 것을 뻥치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아무튼 이실리프 상사를 떠난 현수는 일단 집으로 향했다.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 모두 외출하고 안 계시기에 꼼꼼하게 보안을 체크했다. 자리를 비우는 동안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흐음, 이제 되었군.”
필요한 전공 서적들을 아공간에 넣은 현수는 전능의 팔찌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자아, 이제 떠나자!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르르릉―!
또 한 번 안개처럼 사라졌다.
2013년 11월 13일 수요일에 벌어진 일이다. 현수가 지구로 귀환한 지 13일 만의 일이기도 하다.
* * *
“마탑주님, 기침하셨습니까?”
당도하자마자 의복을 갈아입는데 들린 소리이다. 팬티 차림이기에 얼른 대꾸했다.
“잠깐만 기다려. 근데 누구지?”
“접니다. 베시. 소세할 물 떠왔습니다.”
“조금 기다려.”
“네.”
베시는 몹시 공손한 음성이다.
공왕과 맞먹는 권력을 지닌 이실리프 마탑의 탑주님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잠시 후 세수를 마친 현수는 베시의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내려갔다. 문이 열리고 현수가 들어서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서 오십시오, 마탑주님!”
“마탑주님을 뵈옵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가장 먼저 말한 이는 캐플렛 백작이고, 두 번째는 합창이다. 미리 연습이라도 한 모양이다.
“흐음, 모두 자리에 앉지.”
“네, 마탑주님!”
현수가 가장 상석에 앉자 왼쪽에 라세안이 자리를 잡는다. 우측엔 카트린느가 앉았다. 라세안의 곁에는 캐플렛 백작이, 카트린느의 곁에는 백작부인이 앉았다.
나머지 자리엔 백작의 자손들과 영지 귀족들이 자리했다.
현수가 자리에 앉자 장내가 고요해진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지경이다.
“흐음, 아침 식사는 언제 내오는가?”
“네, 지금 내옵니다. 뭐하느냐? 어서 음식을 들이라 일러라!”
“네, 백작님!”
캐플렛 백작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면서 시종들이 음식을 가져온다.
당연히 현수의 앞에 가장 많은 음식이 놓였다.
현수 입장에선 거의 보름 만에 보는 아르센 음식이다. 그렇기에 바로 먹기 시작했다. 모두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고요하던 식당은 이내 음식 씹어 삼키는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맛은 괜찮군. 그런데 냄새가 좀 나네.”
“마탑주님, 후춧가루 좀 주시지요.”
현수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라세안은 이제 후춧가루가 없으면 고기를 못 먹는 체질로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수가 먼저 후춧가루를 뿌리고 라세안과 카트린느가 차례대로 뿌렸다. 다음은 백작의 손으로 넘어갔다.
“오오! 냄새가 싹 사라졌어. 과연 이실리프 마탑주님다운 마법이야. 이러니까 음식 맛이 확 달라지네.”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고기에서 나던 누린내가 사라지자 제 맛이 느껴진 것이다.
“저어, 마탑주님.”
“왜 부르는가?”
“왕궁에서 언제 오시는지 여쭤보라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멀린의 좌표는 있는가?”
“네? 좌표라니요?”
“텔레포트할 좌표를 말함이네.”
“아, 그거요? 그거라면 제 집무실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식사를 마치는 대로 찾아드리겠습니다.”
“그러게.”
현수가 다시 음식을 입에 넣을 때 캐플렛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조금 전 좌표를 물었을 때 금방 대답하지 못한 건 텔레포트라는 마법을 생각지 못한 때문이다.
텔레포트는 7서클 마법이다.
그런데 공국 최고 마법사는 6서클에 불과하다. 따라서 아주 오랫동안 텔레포트라는 마법이 구현된 적이 없다.
그렇기에 그런 마법이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마법을 너무도 쉽게 언급하기에 과연 이실리프 마탑주는 다르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식사를 마친 현수는 기사단을 찾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알밴 다리를 풀고 있던 기사들이 대경실색하며 일어선다.
“마, 마탑주님을 뵈옵니다.”
“흐음, 다리는 괜찮나?”
“괘, 괜찮습니다.”
“그래? 모두 이쪽으로 모이게.”
“네, 알겠습니다.”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좁은 간격으로 모여 선다.
“바디 리프레시!”
샤르르르릉―!
현수의 눈에만 보이는 마나가 기사들에게 스며든다.
“이, 이런, 세상에…….”
“헐, 이럴 수가!”
“다, 다리가 하나도 안 아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 있는 것조차 괴로웠다. 그런데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풀리자 놀라는 표정이 역력하다.
“이제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모든 게 마탑주님의 덕입니다!”
기사들은 나이를 잊은 듯 소리친다.
“어제 했던 말을 반복하자면 평민은 우습게 볼 대상이 아니라 보호해 줄 대상이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좋아,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인가?”
“네, 검을 손에 쥘 수 있는 한 그런 삶을 살겠습니다!”
“좋아, 그런 의미에서 오늘 검술 한 가지를 알려주겠다. 모두 관람석으로!”
“네,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얼른 관람석으로 이동했다. 세상에 딱 하나뿐인 그랜드 마스터가 검술을 가르쳐 준다니 눈을 크게 뜬다.
현수는 검법 하나를 천천히 시전했다.
라오르센이라는 이름을 가진 검법을 손봐서 더 효율적으로 고친 것이다. 쾌와 중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으면서도 익히기 쉽도록 만든 것이다.
현수는 천천히 검로를 보여주면서 그때그때의 몸 상태를 이야기해 주었다. 어디에 힘을 줘야 하는지, 시선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발놀림은 어떻게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렇게 열 번을 보여주었다.
다음은 중간 속도로 열 번, 마지막은 본래의 속도로 열 번을 반복했다. 평소 기사들의 수련장으로 쓰이던 이곳은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적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