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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522화 (522/1,307)

# 522

“흠흠! 예가 아닌 줄 알지만 자리를 바꿔야겠습니다.”

“네? 뭐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국왕 전하와 가까이서 식사하고 싶은데 너무 멀리 떨어져 앉아 얼굴도 잘 안 보이는군요. 자리를 옮겨도 되겠습니까?”

“그, 그럼요. 편한 자리에 앉으십시오.”

“네, 그럼 저는 여기 앉겠습니다.”

현수가 식탁 중앙에 앉자 공왕도 얼른 자리를 옮긴다.

“국왕 전하, 이렇게 가까이 마주 앉아 이야기해야 없던 정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렇습니다. 앞으론 이렇게 해야겠습니다.”

실제로 아드리안 공국의 예법은 이렇게 바뀐다.

둘이 웃는 얼굴을 하는 사이 왕실 가족들이 들어온다.

공왕과 마탑주가 식탁 가운데에 앉아 있자 잠시 놀란 표정이었으나 이내 신색을 찾고 자리를 잡는다.

서열에 따라 공왕의 좌측엔 제1왕후가, 우측엔 제2왕후가 앉았다. 그 좌우로 왕자와 공주들이 자리를 잡았다.

두 공작도 자리를 잡았다.

“카트린느는 이쪽에 앉지.”

현수가 오른쪽 자리를 툭툭 두드리자 아니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귀족 본인도 아닌데 어찌 이런 자리에 앉나 싶은 것이다.

“카트린느 양, 긴말하게 할 건가?”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럼 앉겠습니다.”

모두가 착석한 셈이다.

“자, 그럼 왕궁 음식 맛을 볼까요?”

“시작하라!”

공왕의 말이 떨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일제히 발을 떼어 다가선다.

음식 식는 속도를 줄이고 냄새 풍기는 것을 막기 위해 덮어놓은 뚜껑이 열리자 제법 향긋한 냄새가 풍긴다.

“많이 드십시오.”

“네, 그러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국왕 전하도 많이 드십시오. 왕후 마마와 왕자님, 공주님들도 많이 드십시오.”

“네, 마탑주님.”

“두 분 공작님도 많이 드시게.”

“네, 마탑주님.”

“카트린느도 많이 먹어.”

“네, 마탑주님.”

모두가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데 카트린느는 물부터 들이켰다. 심리적으로 너무나 불편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맛있는 정찬이었습니다.”

“그렇게 평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옮긴 자리는 국정을 논하는 대전이다.

가장 상석인 공왕의 자리 옆에는 똑같이 생긴 의자가 놓여 있다.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옥좌이다.

둘이 들어서자 공국 귀족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인다.

천천히 걸어 옥좌에 앉자 두 공작을 필두로 하나하나 인사를 한다. 공국을 처음 찾은 마탑주에 대한 예절이다.

약 100여 명에 달하는 귀족들의 인사를 받고는 자리를 옮겼다. 평상시 공왕과 두 공작이 간담을 나누던 작은 방이다.

황금빛 수실로 장식된 푹신한 소파에 앉자 시녀가 주스를 내온다. 처음 맛보는 것인데 상당히 달콤했다.

지구로 치면 딸기주스 비슷한 맛이다.

“시조님은 어떠십니까? 아직도 정정하십니까?”

아민 공왕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닙니다. 스승님께서는 지난 1월에 서거하셨습니다.”

대마법사가 죽을 경우 마나의 품으로 들어갔다는 표현을 쓰지만 현수는 지구 식으로 대답했다.

아무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민 공왕이 탄식을 낸다.

“아!”

“마나의 품으로 가시기 직전 제게 공국의 위기를 알리셨습니다. 한데 이곳의 좌표를 몰라…….”

“그럼 어떻게 오신 겁니까? 마탑이 있는 바세른 산맥은 테리안 왕국의 영토잖습니까?”

“그래서 테리안 왕국과 미판테 왕국을 거쳐서 왔습니다.”

끼어든 이는 로레알 공작이다.

“그럼 라수스 협곡을 지나신 겁니까?”

멀린이 1월에 서거했다면 그때로부터 약 9개월이 흐른 셈이다. 테리안 왕국에서 미판테 왕국을 거쳐 이곳까지 오려면 1년 이상 걸린다. 제대로 된 길이 없기 때문이고, 라수스 협곡을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수는 빤히 바라보고 있는 로레알 공작을 보며 대꾸했다.

“라수스 협곡으로 질러 왔네. 그 길이 가장 빠르다 하여…….”

“네? 라수스 협곡을 지나쳐 오셨다고요? 거긴 레드 드래곤의 레어가 있어 어느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래, 그래서 몇 번이나 충돌했지. 네 번인가? 아무튼 라수스 협곡을 가로질러 왔네.”

“헐! 그럼 레드 드래곤 라이세뮤리안님과 싸워서 이기셨다는 겁니까?”

“글쎄. 이긴 건지는 모르겠네. 아무튼 그리되었네.”

“세상에!”

드래곤과 싸워 이기지 못했다면 멀쩡히 돌아다닐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에 소문난 대로 10서클 대마법사이면서 그랜드 마스터라는 것을 굳게 믿는 계기가 되었다.

“국왕 전하, 삼국의 동향은 어떤지요?”

현수의 시선을 받은 아민 공왕이 허리를 펴며 시선을 준다.

“마탑주님, 저는 국왕이 아니라 공왕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랬지만 앞으로는 국왕이 되실 겁니다.”

“네?”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국왕과 공왕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완전히 독립적인 국가의 수장이 국왕이다. 공왕은 다른 나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지역의 우두머리라는 것이 통념이다.

다시 말해 완전히 독립적이지 못한 국가의 수장이 공왕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국왕이라는 말에서 묘한 뉘앙스가 풍긴다. 하여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삼국의 동향이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아, 그거요? 로레알 공작, 마탑주님께 현재의 상황을 브리핑해 주시게.”

“네, 공왕 전하, 아니, 국왕 전하!”

공손히 고개 숙여 예를 갖춘 로레알 공작이 눈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벽에 쳐진 커튼을 좌우로 벌린다.

벽면엔 아드리안 공국을 위시한 주변 국가들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또한 병력이 어찌 배치되어 있는지 표기되어 있다.

미판테 왕국과 쿠르스 왕국, 그리고 엘라이 왕국은 현재 아드리안 공국 밖에 주둔해 있다.

갑자기 나타난 이실리프 마탑 때문이다.

현수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숨죽인 채 사방팔방에 눈과 귀를 깔아두었다. 이실리프 마탑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조차 전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촉수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하여 헛소문이라 치부하고 다시금 공국을 침략하던 순간 케발로 영지에서 8서클 마법인 헬 파이어가 시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인 미판테 왕국은 난리가 났다.

혹시라도 이실리프 마탑의 마법사가 수도에 와서 왕궁에 헬 파이어를 한 방 먹이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삼국의 마법사들이 총출동하여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그 결과 9서클 대마법사가 발현시킨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법의 구현 범위 및 뜨거운 열기를 다각적으로 따져본 후 내린 것이다.

삼국은 다시금 군사를 뒤로 뺐다. 하지만 완전히 뺀 것은 아니다. 케발로 영지에서 8서클 마법이 구현되기는 했지만 이실리프 마탑 소속 마법사의 행위인지의 여부는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유희 중인 드래곤이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대두된 까닭이다. 가능한 일이라 여겼기에 숨만 죽였을 뿐 병사들의 훈련은 계속해서 진행되는 중이다.

언제든 수도 멀린까지 진격하여 아민 공왕 및 두 공작을 체포하여 뜻을 이루려는 의도이다.

로레알 공작의 브리핑을 모두 들은 현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적이 노리고 있음에도 전력 증강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이실리프 마탑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 이제부터는 공왕이 아닌 국왕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물론입니다, 마탑주님!”

아민 공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수가 두 공작에게 시선을 주었다.

“두 공작은 작위를 잃고 싶은 겐가?”

“네? 그게 무슨…….”

마탑주는 공작의 작위를 폐할 권한이 있다. 그렇기에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다.

“나라를 잃으면 작위가 사라진다는 걸 모르나? 미판테 왕국이 공국을 점령하고도 그대들을 공작 자리에 앉혀두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 그야… 아니지요.”

“그런데 왜 병력 증강에 힘쓰지 않았나? 설마 삼국의 누군가와 손을 잡았는가?”

화가 난 듯 음성을 높이자 대마법사의 카리스마가 작은 방을 가득 채운다. 이에 놀란 공작이 얼른 고개를 조아린다.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손 놓고 아무것도 안 했나?”

“그, 그게… 죄송합니다, 마탑주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마탑주님! 저희의 무능함을 탓해주십시오. 작위를 폐한다 하시더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두 공작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으며 죄에 대한 벌을 청한다. 서늘한 예기가 전신을 짓누른 때문이다.

필립스 아인테스 반 크리엘 공작은 검사이다. 공국에서 소드 마스터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에 버금갈 포스가 뿜어지자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곁에 있던 로레알 공작은 이미 그전에 무릎 꿇고 엎드린 채이다. 현수가 뿜는 위압감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마탑주님, 두 공작이 무능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국왕 전하?”

현수의 시선을 받은 아민 공왕은 차마 입을 뗄 수 없다는 듯 잠시 주저하더니 말을 이었다.

“실은 왕실의 재정이, 재정이 거의 고갈되어… 지난 7년간 계속된 가뭄과 홍수 탓에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게다가 삼국연합이 교역로를 통제하여…….”

무슨 뜻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현수는 잠시 공왕을 바라보았다. 이에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군다.

“오면서 보니 백성들이 입은 옷도 괜찮은 듯싶고 그리 굶주리지 않는 것 같던데 그건 어찌 설명하겠습니까?”

“마탑주님, 그건…….”

잠시 필립스 공작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실리프 마탑주가 나타났다는 전갈을 받은 왕성은 수도를 대대적으로 청소시켰다. 그러면서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의복과 군량미를 방출했다. 궁핍한 왕실 재정으론 감당할 수 없어 두 공작의 사재까지 출연되고야 이루어진 일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없던 혈색이 생기지는 않는다.

하여 잘 먹지 못해 버짐이 피었던 얼굴엔 혈색 좋아 보이게 하기 위해 진흙을 물에 개어 발랐다고 한다.

“흐으음!”

모든 설명을 듣고 현수가 나지막한 침음을 내자 모두 입을 다문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렀다.

“로레알 공작, 그리고 필립스 공작.”

“네, 마탑주님.”

“이곳까지 오는 동안 들어보니 서로 권력을 쥐려고 국왕파와 귀족파로 갈려 당파 싸움을 했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

둘 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권력이 그리도 탐났나?”

“…죄송합니다. 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

“소신 또한 잘못했나이다. 부디 작위를 폐하여 주시옵소서.”

나이 든 두 공작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연신 조아리고 있다. 하지만 현수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국왕 전하도 일말의 책임이 있습니다. 두 공작이 당파 싸움을 하면 그러지 못하도록 엄히 다스려야 했습니다.”

“……!”

아민 공왕도 고개를 숙인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다. 그런데 두 공작은 수하이면서 장인이다.

그렇기에 강하게 본인의 생각을 전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것을 짐작한 현수가 한마디 덧붙였다.

“자고로 군주는 소양을 갖춰야 하며, 만백성을 두루 보살필 수 있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엄정함을 가져야 합니다.”

“……!”

뭐라 반박할 수 없는 군주론이다. 하여 할 말이 없는지 아무도 대꾸하지 못한다. 현수는 말을 이어갔다.

“또한 군주는 지혜롭고 용맹하며 자비를 갖춰야 합니다.”

“네, 각골명심하겠습니다.”

공왕이 고개까지 조아린다. 이쯤해서 끝내야겠기에 화제를 돌렸다.

“좋습니다. 그럼 군사들의 훈련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 물음에 답한 이는 필립스 공작이다.

“3만의 병사는 모두가 정예라곤 할 수는 없지만 타국 병사들에 비해선 강하다 자부합니다.”

“흐음, 그런가? 내가 시험해 봐도 되겠는가?”

“네? 아, 네에,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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