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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523화 (523/1,307)

# 523

대답하는 필립스 공작의 등에선 진땀이 흐른다. 그랜드 마스터가 보기에 평범한 병사들이 어떻겠는가!

파도 한 번에 허물어질 바닷가 모래성 같을 것이다.

“기사 하나를 불러들이라.”

“네, 마탑주님!”

현수의 말이 떨어지자 시종이 밖으로 나간다. 그리곤 아머를 걸친 기사가 황급히 들어서며 군례를 올린다.

“왕실기사단 소속 2급 기사 스미스 옌타니, 인사 올립니다.”

“검을 뽑으라. 내 그대의 화후를 시험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쓰으윽―!

스미스 옌타니 기사가 검을 뽑자 제법 예기가 흘러나온다.

그를 일견한 현수가 입을 열었다.

“왕실기사단에서 그대의 서열은?”

“저는 총 200명 가운데 124위입니다.”

“알았다. 검을 집어넣고 밖으로 나가도록.”

“네, 마탑주님!”

잔뜩 긴장하고 있던 스미스 옌타니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방금 나간 스미스 옌타니는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군. 과도한 훈련으로 어깨가 많이 뭉쳐 제 실력을 낼 수 없으니 며칠간 쉬도록 하게.”

“네? 그걸 어찌……?”

지난 며칠간 조금 심하게 훈련시킨 바 있다. 기강이 흐르러진 것 같아 처벌 차원에서 시킨 훈련이다.

현수는 딱 한 번 검을 뽑게 하고는 단숨에 그걸 짚어냈다. 그렇기에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이다.

“내 화후가 그대보다 높아 아는 것이네.”

“아! 그, 그렇죠. 아암, 그렇고말고요.”

필립스 공작이 얼른 고개를 조아린다.

“둘 다 일어나라. 그대들은 일국의 공작이다. 나와 국왕 전하의 명이 있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말라.”

“명을 받잡습니다, 마탑주님!”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눈짓으로 앉게 했다.

“국왕 전하, 생각보다 병사들의 상태가 괜찮을 듯싶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사실 이곳까지 더 빨리 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중간에 시간을 지체한 것은 영면에 드신 스승님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 어떤 당부를 하셨는지요?”

“공국을 왕국으로 키우라 하셨습니다.”

“……!”

모두 말이 없다. 공국을 왕국으로 키우려면 경제력도 든든해야 하고 그만한 군사력도 보유해야 한다.

그런데 그럴 만한 재원이 없다.

“하여 어떤 방법이 좋을까를 고심했습니다. 그래서 이실리프 마탑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퍼뜨려 시간을 벌었지요. 그리고 그사이에 선물을 준비하느라 늦은 겁니다.”

“서, 선물이요?”

공왕의 물음에 현수는 대꾸 대신 시종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나간 스미스 옌타니 기사를 다시 불러라.”

“네, 마탑주님!”

시종이 밖으로 나갔을 때 스미스 옌타니는 다른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기사들 모두 놀란 표정이다.

하늘같은 공작 둘이 마탑주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는 말을 들은 때문이다.

이때 시종이 다가가 다시 들어오라는 전갈을 전했다.

“헉! 다 들으셨나 보다. 나 이제 죽었군. 크으으!”

스미스 옌타니는 입 싼 자신을 탓하며 시종의 뒤를 따랐다.

어찌 보면 공작들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다. 따라서 엄한 처벌이 있을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스미스 옌타니, 마탑주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또 한 번 군례를 올리자 현수가 손짓으로 불렀다.

“네, 알겠습니다.”

후다닥 다가와 차렷 자세로 선다. 등에선 진땀이 흘러내리는 중이다. 갑자기 목이라도 칠까 싶은 것이다.

그 순간 현수가 허공에 손짓을 하자 무언가가 튀어나온다. 날이 시퍼렇게 선 검이다.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

“옌타니 경, 이것으로 갈아입고 오도록!”

“네?”

눈을 뜨니 번쩍이는 갑옷 한 벌이 있다. 웬 건가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럴 군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서 갈아입고 오게. 그리고 시종은 왕실기사단 서열 100위를 데리고 오라.”

“네, 알겠습니다, 마탑주님!”

둘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공왕과 공작들은 아무런 말도 없다. 조금 전 본 게 사실인가 싶은 때문이다.

현수가 아공간에서 꺼낸 갑옷은 분명 드워프의 솜씨이다. 그렇지 않고야 그토록 정교한 문양이 새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잠시 후 서열 100위라는 기사가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들어선다. 곧이어 아머를 풀세트로 갖춘 스미스 옌타니가 왔다.

“지금부터 대련을 시작한다. 아무리 심한 상처라도 금방 낫게 할 수 있으니 사정 봐주지 말고 대련하라.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잔뜩 군기가 든 대답을 끝으로 둘은 살벌한 전투를 시작했다. 누가 봐도 대련이 아니다.

챙챙! 채채채챙! 퍼억―!

몇 번 검끼리 부딪치더니 서열 100위의 검이 깨져 버린다. 곧이어 스미스 옌타니의 검이 그의 목에 대어졌다.

“그만! 수고했다. 그곳에 대기하도록.”

“네, 마탑주님!”

공왕과 공작들은 이런 결과를 예측했다. 드워프가 제련한 검을 인간이 만든 것으로 부딪쳤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 모습을 일견한 현수가 입을 연다.

“왕국의 병력이 3만이라 하여 3만 벌의 군장을 만들어오느라 늦은 겁니다. 보다시피 드워프가 만든 겁니다.”

“헉! 사, 사, 삼만 벌이요?”

“그것도 몽땅 드워프가 만든……?”

“헐! 세상에 맙소사! 어떻게……!”

인간과 드워프의 교류가 깨어진 지 수백 년이 흘렀다. 그렇기에 드워프가 만든 무구는 왕실 보물 취급을 받는다.

그런 걸 무려 3만 벌이나 준비해 왔다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그것도 검과 방패, 갑옷, 투구, 완호갑, 각반, 허리띠까지 완벽하게 세트로 만들어 온 모양이다.

“마, 마탑주님!”

공왕의 눈엔 벌써 눈물이 어려 있다. 무력이 약해 다른 나라에 먹히기 일보 직전인 상태로 거의 일 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피가 마르는 듯한 긴장감을 느끼며 살았다.

방금 전 보았듯 갑옷과 병장기만 바꿔도 병사들의 능력이 달라진다. 삼국연합의 병력의 공국 병력의 열 배가 넘는다고 하지만 이쯤 되면 붙어볼 만도 하다.

단 한 번의 대회전으로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드워프제 무구로 완전무장을 하면 이쪽의 병력 수는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반면 적의 병력 수는 계속해서 줄어드는 축차 감소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열 배가 넘는 적을 전멸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다.

두 공작이라 하여 어찌 다르겠는가!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서열 100위와 스미스 옌타니는 벅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키느라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다.

시종들이라 하여 다를 바 없다.

현수가 제공할 무구들을 돈으로 따지면 19조 5천억 원 어치이다. 아르센 대륙의 어떠한 제국도 지불하기 힘든 금액이다.

“잠시 심부름 보낸 수석호위가 오면 병사들의 훈련을 지시할 생각입니다. 괜찮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좋습니다.”

공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필립스 공작에게 시선을 돌린다.

“공작은 전 군에 수도 집결을 명령하라.”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시일은……?”

“흐음, 수석호위가 이곳에 당도하는 것은 대략 사흘쯤 뒤가 될 것이다. 그러니 나흘째 되는 날까지 집결시키도록.”

“충!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공작이 감격에 찬 표정으로 예를 갖추자 이번엔 로레알 공작에게 시선을 돌린다.

“오늘 이후로 아드리안 왕국엔 국왕파니 귀족파니 하는 어휘는 사라진다. 대전에서는 부국강병에 대한 의논을 주고받으라.”

“네, 알겠습니다.”

“만일 귀족 간의 알력으로 국력이 소모된다 싶으면 내 반드시 둘 다 작위를 폐하리라.”

“네, 각골명심하겠습니다.”

흔히들 조선이 패망한 이유가 당파 싸움 때문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학교에서 배우거나 드라마를 보는 동안 얼마나 지긋지긋하다 여겼는가!

그런데 사실 조선이 망한 것은 당파 싸움 때문만이 아니다.

영조와 정조 재위 시절은 당파 싸움이 극에 달한 시절이다. 그럼에도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매우 발전했다.

이에 반해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이 독재하던 때엔 몰락하게 되었다.

현재까지는 서로 대등하나 어느 한쪽으로 추가 기울면 아드리안 공국이 망할 수 있다. 현수는 이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이런 지시를 내린 것이다.

“왕명을 거역하는 자들 역시 엄벌에 처할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왕에게 강력한 권한을 줌으로써 일치단결하여 나라를 세워보라는 뜻이다. 이로써 일련의 상황이 대충 정리된 듯하다.

그때 흡족해진 현수의 뇌리를 스치는 상념이 있다.

“대전의 귀족들은 귀가했는가?”

“아니옵니다. 모두 대기하고 있사옵니다.”

시종의 대답에 현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대전으로 가십시다.”

“네, 그러지요.”

아민 국왕은 방금 전의 말을 귀족들에게 하려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현수의 말이 이어졌다.

“두 공작은 귀족파와 국왕파의 수장이라 들었다. 이곳에서 오갔던 말을 공작들이 직접 하달하라.”

“네, 알겠습니다.”

대전 가까이 다가가니 왕실 시종장이 예식용 스태프로 바닥을 두드리며 소리친다.

탕, 탕―!

“국왕 전하와 마탑주님, 그리고 로레알 공작과 필립스 공작 드십니다!”

대전에 드니 웅성거리던 귀족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인다.

“공왕 전하와 마탑주님을 뵈옵니다.”

“모두 고개를 들라!”

현수가 바라보자 공왕이 한 말이다. 숙였던 허리를 편 귀족들의 시선이 쏠리자 현수가 좌중을 둘러본다.

강한 카리스마가 뿜어지자 위압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왕국의 시조이시자 내 스승님이신 아드리안 멀린 반 나이젤 마탑주께서는 지난 1월에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

귀족 모두 충격 받은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나는 제2대 마탑주로서 스승님의 시신을 모시고 있다. 아직 안장하지 않은 이유는 마탑보다는 이곳에 모심이 더 마땅하다 여긴 때문이다. 이제 전대 마탑주님께서 영면에 드신 관을 꺼낼 것이다. 귀족들은 건국 시조께 예를 다하도록 하라!”

“……!”

모두 멍한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공간에 담겨 있던 미스릴 관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스승의 얼굴이 보인다.

그전에 보존 마법을 걸었다.

그리곤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국왕과 왕실 가족이 먼저 알현하도록 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시종은 가서 왕후들과 왕자, 공주들을 모두 불러오라.”

“네, 알겠사옵니다.”

대전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공왕을 필두로 하여 왕후들과 왕자, 공주들이 건국 시조께 예를 표했다.

다음은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준남작의 순서이다.

모든 귀족이 예를 갖추고 물러나자 왕실기사단이 입장하였다. 경건한 표정으로 예를 갖추고 물러난다.

700살 가까이 산 사람이고, 공국을 떠난 지 오래되어 그런지 대성통곡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예를 갖추자 관 뚜껑을 덮어 아공간에 넣었다.

“그럼 이제부터 스승님의 유체를 어떻게 모실 것인지에 관한 의논을 하라.”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의견이 분분하다.

12장 피자가 좋아, 만두가 좋아?

최종 결론은 공왕의 권력도 미치지 못하는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의 후원으로 결정되었다. 이실리프 마탑주만을 위한 공간이니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현수는 반대 의견이다. 스승님을 그곳에 안장하면 몇몇 인물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괜찮지만 후대에는 도굴 위험성이 있다는 의견을 듣고 뜻을 접었다.

마법으로 결계를 치면 그깟 위험 정도는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승은 9서클 대마법사였다.

대륙의 모든 마법사가 스승의 마법을 탐할 것이다.

서클을 올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흑마법사도 있다. 그렇기에 위험을 줄이기 위해 뜻을 접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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