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5
“그래? 자네가 알아서 잘 막고 있는 거지?”
“그럼요. 한 녀석도 못 들어가게 잘 막고 있습니다요.”
발루네는 짐짓 너스레를 떤다.
“그럼 계속해서 수고하게. 참, 날씨가 조금씩 추워지지? 이거 걸치게.”
현수는 들고 있던 튜닉을 건넸다.
“이건……?”
웬 거냐는 표정이다.
“입으면 추위가 한결 가실 것이네.”
“아, 그렇습니까?”
별로 두꺼워 보이지 않는 천으로 만든 것이라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다. 고위 귀족이 내리는 하사품을 받을 땐 반드시 예를 갖춰야 한다.
“뭐하는가? 어서 가서 갈아입고 오게. 밤이 되니 조금 쌀쌀해지는 느낌이네. 춥지 않은가?”
“아, 네. 조금, 조금 춥습죠. 그럼 잠시만요. 뒤에서 갈아입겠습니다요.”
발루네가 초소 뒤로 가서 갈아입고 나타나는 데 걸린 시간은 2∼3분이다.
옷 한 벌 갈아입는데 이 정도 시간이 걸린 이유는 겉에 입고 있는 오크 가죽으로 만든 통짜 의복 때문이다.
아르센의 가난한 사람들은 추위를 막기 위해 오크 가죽 옷을 선호한다. 뻣뻣하고 냄새는 나지만 질겨서 오래가기 때문이다.
오크 가죽으로 만든 의복의 가격은 여러 종류이다. 그 기준은 냄새이다. 비쌀수록 냄새가 덜 난다.
발루네가 걸친 것은 그중 가장 싼 것이다. 가족을 부양하려면 이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아르센이나 가장들은 고달프다.
“그 옷 말이네. 그거 벗어보게.”
“네?”
“겉에 입고 있는 그 가죽옷 말이네. 냄새가 너무 심해. 그런 걸 왜 입고 있나?”
“냄새가 조금 심하죠? 다 썩은 걸로 만든 건가 봅니다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거라도 입지 않으면 추위를 막을 수 없어 밤새 달달 떨어야 합니다요.”
“알았으니 어서 벗어보게.”
“…네, 알겠습니다요.”
발루네는 의아했지만 토 달지 않고 벗었다.
그러는 동안 냄새가 진동한다. 코가 썩을 것만 같다.
“으이그, 안 되겠네. 팔다리 벌리고 이쪽에 서게.”
“네? 아, 알겠습니다요.”
명에 따라 팔다리를 벌리고 섰다. 현수는 아공간에서 페브리즈를 꺼내 뿌렸다. 금방 튜닉이 축축하게 젖는다.
발루네는 이제 곧 살벌한 추위가 느껴질 것이라 여기고 눈을 질끈 감았다. 습기가 증발하면서 열을 빼앗기 때문이다.
요즘 군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의 예전 군대에선 이런 증발 현상을 이용한 악습이 있었다.
소위 빤빠라라는 것이다.
낮에 열 받은 고참이 새벽 두 시쯤 곤히 잠들어 있던 쫄따구들을 집합시킨다. 계절은 늦가을부터 초봄까지이다.
집합 장소는 부대마다 다르다.
당직 사관이나 부사관들이 오지 않을 장소로 고른다.
빤빠라는 팬티를 제외한 모든 것을 홀랑 벗고 집합하는 것이다. 두 팔, 두 다리를 모두 벌리고 서 있는 동안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면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그렇게 10분쯤 지나 달달 떨 때 고참은 찬물 한 바가지를 퍼온다. 그리곤 목덜미나 겨드랑이 같은 곳에 살짝살짝 끼얹는다. 그때 느껴지는 냉기는 고통 그 자체이다.
이를 악물고 참으려 해도 저절로 신음이 나온다.
만일 한겨울 영하 10℃일 때 이런 기합을 받는다고 치자. 그 추위가 얼마나 되겠는가!
어쨌거나 발루네는 금방 추워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옷 갈아입기 전보다 덜 춥다.
생각해 보니 그때는 오크 가죽으로 만든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현수는 오크 가죽에 페브리즈를 듬뿍 뿌리고 있다.
매우 향기로운 냄새가 풍기기에 코를 벌름거렸다.
“흠흠! 흠흠흠! 백작님, 이게 무슨 냄새입니까요?”
“악취를 제거하는 것이네. 이게 다 마를 때까지 두었다가 입게. 알았나?”
“네, 고맙습니다요. 보잘것없는 이놈에게 이리도 인정을 베푸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잘 모시겠습니다요.”
“그래,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자, 이건 근무 끝나고 한잔 마시라고 주는 것이네. 받게.”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고맙습니다요.”
발루네가 얼른 고개 숙이며 받는다.
촉감으로 느끼기에 1실버이다. 이 정도면 한 번이 아니라 서너 번은 충분히 마실 수 있는 거금이다.
하여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자, 나는 이제 들어가네. 계속 수고하도록.”
“감사합니다요, 백작님!”
발루네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굽실거렸다.
옷도 주고 돈도 주고 냄새도 없애준 마음씨 좋은 귀족이기에 저도 모르게 고개와 허리가 숙여진다.
현수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쯤 손에 쥔 돈을 확인하던 발루네의 눈이 화등잔만 해진다.
1실버인 줄 알았는데 1골드였기 때문이다. 이 돈이면 이번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세, 세상에! 백작님, 고맙습니다요.”
보이지도 않는 현수를 향해 계속 고개를 숙이는 발루네이다.
같은 순간, 현수는 카이로시아의 집무실에 당도했다.
똑, 똑, 똑!
“누구지? 들어와.”
삐이꺽―!
문이 열리며 경첩의 마찰음이 들린다.
바깥과 달리 이곳은 포근하다. 이전에 설치해 둔 항온 마법진이 작동되는 중이기 때문이다.
카이로시아는 장부 정리 중이었는지 계속 뭔가를 기록하고 있다. 누가 왔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누구야?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
여전히 뭔가를 쓰면서 성의 없이 묻는다. 장난기가 동한 현수는 블링크 마법으로 카이로시아의 뒤로 이동했다.
“뭐냐니까? 어, 뭐야? 이상하다. 내가 잘못 들었나?”
고개를 들었지만 앞에 아무도 보이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
슬그머니 다가가 무얼 쓰나 살피려는 찰나 인기척을 느낀 카이로시아가 고개를 홱 돌린다.
“헉! 누구? 으응? 백작님?”
“대체 뭘 쓰길래 누가 들어오는지도 몰라?”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카이로시아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쓰던 것을 등 뒤로 감춘다. 사람이란 게 이러면 더 궁금한 법이다.
“뭔데 그래? 흐음, 보아하니 장부는 아닌 것 같고, 뭔가 수상한데? 설마 나 말고 다른 귀족이랑 눈 맞아서 연서를 쓰고 있던 거야?”
“네?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백작님 말고 누구에게……. 흐흑! 저를 그렇게 못 믿으시는 거예요?”
“진짜 아냐?”
“네, 정말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제겐 오직 백작님뿐이에요. 근데 정말 너무해요.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와요?”
카이로시아가 억울한지 눈물을 흘린 모양이다.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데 더없이 사랑스러워 보인다.
“미안. 내가 좀 바빠서. 그나저나 조금 전에 쓰던 건 뭐야?”
“치이, 그게 그렇게 궁금해요? 좋아요. 그럼 보세요.”
등 뒤에 감췄던 것을 내민다.
흘깃 바라보니 일기장인 듯싶다.
“일기도 써?”
“그래요. 백작님을 처음 만난 날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그래? 그럼 보면 안 되지.”
현수가 도로 집어넣으라는 몸짓을 하자 얼른 노트를 덮는다. 그런 카이로시아의 두 볼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
“근데 웬일이세요?”
“웬일이긴, 카이로시아가 보고 싶어서 왔지.”
“어머! 정말요?”
두 눈이 보석처럼 빛난다. 몹시 행복한 모양이다.
“그래, 저녁은 먹었어?”
“아뇨. 아직. 이거 쓰고 먹으려 했어요.”
“그래? 그럼 내가 맛있는 음식 만들어줄까?”
“정말요?”
“그래. 주방으로 가자. 거기서 만들어줄게.”
“네, 좋아요.”
카이로시아가 얼른 다가와 팔짱을 끼며 올려다본다. 너무도 사랑스러워 콱 깨물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잠시 후, 카이로시아는 상단 주방에서 음식을 먹고 있다. 그녀 앞에 놓인 것은 불고기와 잡채이다.
조금 짭짤할까 싶어 쌀밥도 지었다.
카이로시아는 연신 쩝쩝거리면서 엄지손가락을 내민다. 너무도 맛있어 황홀하다는 표정이다.
식사 후 잠시 담소를 나눴다.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중엔 케발로 영지에 나타난 9서클 마법사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카이로시아는 현수가 장본인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케발로 영지에 나타난 사람이 두 명이기 때문이다.
“저는 그분이 이실리프 마탑에서 나오신 분이라 생각해요. 백작님은 어떻게 생각하셔요?”
“나?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마 이실리프 마탑주일 거야.”
“그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9서클 마스터라니……. 그분은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100살? 200살?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요. 그죠? 유희 중인 드래곤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카이로시아는 계속해서 쫑알거리며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한다. 이럴 때 보면 꿈 많은 소녀 같다.
“로시아, 만일 나 만나기 전에 마탑주가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로 들어오라고 했다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적어도 아드리안 공국에선 공왕 못지않은 권력자라는 이야기가 나온 직후의 물음이다. 그리고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에 들어간다는 뜻은 마탑주의 여인이 됨을 의미한다.
“어휴! 전 싫어요. 나이가 몇인지도 모를 정도로 늙었을 거 아니에요.”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는 듯 고개를 흔든다.
“그처럼 고위 마법사가 되면 바디체인지를 하게 되어 영원한 젊음을 유지한다고 하는데?”
“정말요? 정말 청년처럼 보여요?”
“왜? 이제 관심이 생겨? 마탑주의 여인이 되면 왕후 같은 대접을 받는대. 그럼 거기로 갈 거야?”
“으음, 글쎄요? 전 같으면 어떻게 했을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아니에요. 마탑주님이 저를 불러도 안 갈 거예요. 왜냐하면 전 백작님의 여자니까요. 그죠?”
“그래? 그렇군. 고마워. 그렇게 생각해 줘서.”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묘한 웃음을 짓는다.
“자, 이제 자야지?”
“호호, 네.”
기다렸다는 듯 얼른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베이지색 천에 화사한 꽃 그림이 그려진 잠옷이다.
현수의 팔을 베고 누운 카이로시아가 쫑알거리며 이야기를 하더니 피곤한지 곧 잠들어 버린다.
현수는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짹, 짹, 짹!
다음 날 아침, 카이로시아와 로잘린, 그리고 현수가 한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얀센과 로사가 식사 시중을 들었는데 부쩍 큰 다비드는 코찔찔이 세실리아가 보고 있다고 한다.
식사 후 커피까지 마신 현수는 로니안 자작을 예방했다.
세실리아 자작부인은 조만간 백작부인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모든 것이 사위 될 하인스 백작 덕이라며 참으로 살갑게 대해주어 기분 좋은 한때였다.
“로시아, 그리고 로잘린, 볼일이 있어 잠시 떠나야 돼. 날 기다려 줄 수 있지?”
“그럼요. 얼른 볼일 보고 오세요. 저희는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어요.”
로잘린이 짐짓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현수를 자주 볼 수 있다면 애틋함이 덜할 것이다.
그런데 두 달에 한 번 꼴로 보니 자리를 비운 동안 자그맣던 애정이 샘솟듯 부풀어 지금은 너무도 행복하다 생각하고 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앞으론 더 자주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알았지?”
“네, 잘 다녀오세요.”
둘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떠나려는 순간 멀리서 누군가가 열심히 손을 흔들며 달려온다.
“백작님! 백작님! 헉헉! 하인스 백작님! 백작님!”
뛰어오는 이는 영지 마법사 롤랑이다.
현수는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헉헉! 헉헉! 헉헉! 백작님! 가시기 전에, 헉헉! 가시기 전에, 헉헉! 저 좀, 저 좀 봐주십시오! 헉헉!”
“숨부터 돌리시게.”
“헉헉! 네! 헉헉!”
“로시아와 로잘린은 이만 들어가. 난 롤랑 마법사와 이야기하고 곧바로 떠날 테니.”
“네, 부디 몸조심하셔요.”
둘은 순순히 안으로 들어간다. 그게 현수를 편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능의 팔찌』 제2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