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526화 (526/1,307)

# 526

1장 미친 마법사는 성난 마법사보다 무섭다

“백작님, 전에 말씀하셨던 분 혹시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전에 말했던 분? 누굴 말하는 겐가?”

“백작님 영지 마법사님 말입니다. 전에 텔레포트 스크롤을 만들어주셨다는 그분이요.”

테세린 영지 마법사인 롤랑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깨달은 현수는 피식 웃었다.

“아, 라세안을 말하는 건가?”

“그분 성함이 라세안이셨습니까? 백작님, 그분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꼭 좀 뵙고 싶습니다.”

“그건 왜 그러나? 라세안을 만나서 뭘 하려고? 그 친구, 타인에게 마법 가르쳐 주고 그러지 않아. 제자도 안 받고.”

“아닙니다. 마법을 배우려는 게 아닙니다. 제 마법의 성취를 인증받으려는 겁니다. 그러니 어디 계신지 말씀해 주시면…….”

“롤랑, 서클 인증이야 천천히 받아도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미판테 왕국엔 마탑이 없나? 거기 가면…….”

“마탑이야 있습죠. 그런데 라수스 협곡 너머라……. 거기까지 갔다 오기가 너무나 멀어서요.”

롤랑은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다. 사정이 있어서이다.

“근데 왜 이리 급하게 인증을 받으려 하나?”

“그건 저희 영주님이 곧 백작으로 승작하시는데…….”

사정을 들어보니 이러하다.

롤랑은 로니안 자작이 소영주이던 시절부터 영지 마법사였다. 그런데 미판테 왕국의 모든 변경에는 4서클 이상 마법사들이 배치된다.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함이다.

영지에 그만한 인물이 없으면 중앙에서 마법사를 파견한다. 당연히 영주보다 국왕을 따르는 인물들이다.

그간은 변경백의 임무를 맡기는 했지만 로니안이 정식 백작이 아닌 자작이었기에 롤랑이 영지 마법사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만일 정식 백작이 되면 그 자리를 빼앗긴다.

그간은 비공식 변경백으로 묵인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4서클에 올랐는데 인증받지 못해 자리를 빼앗기면 얼마나 억울한가!

참고로, 변경 영지의 마법사 수장은 엄청난 특혜를 받는다. 마법 시약이나 실험 재료 등을 거의 무제한으로 공급받는다.

또한 6서클 마법서까지 제공된다. 물론 엄청난 보안 속에서 진행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 자리를 빼앗기면 뒷방 늙은이처럼 어디에선가 홀로 늙어가야 한다. 마법을 익히느라 장가도 안 간 때문이다.

그런 쓸쓸한 삶이 싫기에 이토록 달려온 것이다.

“그러니까 4서클 마법사인 것만 인증받으면 된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 라세안이라는 분이 계신 곳을…….”

롤랑이 말을 이을 때 현수는 이모저모를 살피는 몸짓을 했다. 그리곤 별일 아니라는 듯 입을 연다.

“흠, 4서클 맞군. 4서클 비기너라고 내가 써주면 되는가?”

“네?”

롤랑이 웬 소리냐는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희디흰 A4용지다.

“잠시 가만히 있게.”

펜을 꺼내 쓱쓱 글씨를 쓴다. 내용은 테세린의 영지 마법사 롤랑이 4서클 마법사라는 것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내용의 말미엔 ‘이실리프 마탑 제2대 탑주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이라고 쓰고 사인을 했다.

그 밑에는 누구든 이 의견에 이의가 있을 경우 아드리안 공국의 헥사곤 오브 이실리프를 찾아오든지 바세른 산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이실리프 마탑을 찾으라고 썼다.

“자, 이거 받게. 그거면 될 것이네.”

“네? 이건……!”

얼떨결에 반으로 접힌 종이를 받아 든 롤랑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 순간 현수의 입술이 달싹였다.

“텔레포트!”

샤르르르르릉―!

“헉!”

롤랑의 눈이 화등잔만 해진다. 텔레포트는 7서클 마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현수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상황을 목격한 롤랑의 뇌는 이 순간 정지해 버렸다. 너무나 놀란 탓이다.

그렇게 잠시 멈춰 있던 롤랑이 손에 쥔 종이를 펼친다.

“허억!”

털썩-!

이번엔 놀라 다리의 힘이 풀림과 동시에 주저앉는다.

그런 롤랑의 눈은 더 이상 크게 뜰 수 없을 정도로 부릅떠져 있다.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다.

이실리프 마탑 제2대 마탑주라는 글귀 때문이다.

“마, 마법사셨습니까? 게다가… 아아! 아아아!”

롤랑은 제 머리를 쥐어뜯는다. 이실리프 마탑주는 이 세상 모든 마법사의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소문에 의하면 9서클 마스터이다. 그런 그에게 단 한 마디라도 마법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마법사들이 널리고 널려 있다.

하여 이실리프 마탑을 찾는 마법사들이 바세른 산맥으로 스며드는 중이다.

많은 이가 몬스터와의 조우로 목숨을 잃었지만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산맥에 발을 들여놓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마탑주를 눈앞에서 놓쳤다. 그렇기에 몇 올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는 것이다.

평상시 그가 머리카락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알고 있는 시녀들이 본다면 화들짝 놀랄 일이다.

“아아! 마탑주님! 마탑주님인 줄도 모르고……! 아아! 이 바보! 눈이 있어도 하늘을 보지 못하는 이 바보! 허엉! 허어어엉!”

롤랑이 길 한복판에서 실성한 사람처럼 고함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자 사람들이 얼른 비켜선다.

미친 마법사는 성난 기사보다도 무섭기 때문이다.

같은 순간, 현수는 바벨 강 건너 올테른에 나타난다.

샤르르르릉―!

“흐음, 제대로 왔군. 후후, 롤랑이 조금 놀랐으려나?”

입가에 미소를 베어 문 현수는 잠시 두리번거리다 에릭 마이스진 백작이 기거하는 영주성을 찾았다.

지난 2월에 오고 처음이니 거의 9개월 만이다.

“멈춰라! 이곳은 영주성이다! 누군지 신분을 밝혀라!”

성 앞에 다가서자 수문위병이 내지른 소리다. 다분히 권위적으로 느껴졌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히 대꾸했다.

“흐음, 난 하인스라 하네. 마이스진 백작을 만나러 왔으니 안에 전갈을 넣어주게.”

“하네? 넣어주게? 마이스진 백작? 어디서 이게……. 보아하니 C급 용병쯤으로 보이는데, 장난해? 그러다 뒈지고 싶어?”

하루 종일 성문 앞에 서 있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장난치는 용병이라 생각한 병사가 노성을 터뜨린다.

하지만 현수는 웬 개가 짖느냐는 듯 느긋한 표정이다.

“나는 에릭 마이스진 백작에게 용무가 있다. 지체하지 말고 전갈을 넣어주게.”

“뭐야? 이게 어디서! 어서 썩 꺼지지 못해! 정말 죽고 싶어? 니들 또 내기했지? 어디야? 이번에도 세실리아 여관에 몰려 있으면서 나 갖고 장난치는 거야? 그런 거야?”

눈을 부라리며 소리친다. 누가 봐도 성난 얼굴이다.

“내기 그런 거 아니네. 흐음, 그럼 기사 데이몬은 있나?”

“뭐? 데이몬 기사님까지……. 오냐,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라. 원하는 대로 불러주마.”

말을 마친 병사가 쪽문 옆 노란색 줄을 잡아당긴다. 그런 그의 얼굴엔 분노의 빛이 서려 있다.

최근 이곳 올테른에는 용병들이 집단으로 유입되었다. 이웃 영지에서 벌일 몬스터 토벌에 참가하기 위한 자들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토벌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기에 인근 영지 용병들이 대거 모여든다. 쏠쏠한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 건너 테세린에서 온 용병들도 다수다.

이들은 세실리아 여관 등에 머물면서 영주성 병사들을 조롱하는 내기를 한다. 위치를 이탈할 수 없는 수문위병들이 주된 놀림감의 대상이 된다.

걸리면 작살날 것이 뻔한 이런 장난이 횡행하는 이유는 용병들이 거의 비슷한 복장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겉보기엔 누가 누군지 구별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장난친 용병을 쫓아 여관으로 들어가 보면 모두가 똑같아 보인다. 당연히 범인은 찾기 힘들다.

하여 방금 들어온 놈이 누구냐고 물으면 모두가 모른다고 시치미를 뗀다. 화가 나 펄펄 뛸 지경이지만 용병들을 처벌하지는 못한다. 병사보다 용병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흉포한 몬스터 사냥에 나설 용병들인지라 C급 미만이 드물다. 어떨 때엔 전원 A급과 B급 용병들일 때도 있다.

이들은 서임받은 기사도 감당하기 힘든 존재들이다.

아무튼 방금 전의 현수처럼 말도 안 되는 전갈을 안에 넣으라는 것도 장난 중 하나다. 그래서 당사자를 데리고 나오면 사라지고 없다. 말 몇 마디로 두 사람을 놀려먹은 것이다.

어찌나 교묘한지 번번이 속는다. 하여 수문위병들에 의해 불려온 높은 분들에게 걷어차일 조인트가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다.

어제는 기사단장을 불러냈다가 작살났다. 그렇기에 다짜고짜 성난 표정을 지어 보인 것이다.

용병들이 이런 장난을 시작한 이유는 소영주 피어슨 때문이다. 지난 2월 이후 올테른 영지에선 1인당 술 판매량이 정해졌다. 한국식으로 따지자면 맥주는 일인당 1,000㏄가 제한량이다. 소주와 같이 알코올도수가 높은 술은 하루에 딱 두 잔이다.

웬만해선 취하고 싶어도 취할 수 없는 양이다.

하나뿐인 아들이 술에 취해 난동 피운 것으로 오인한 총독의 명령이기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이곳의 왕은 마이스진 백작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잡아당긴 줄이 안쪽에 있던 기사를 부르는 신호였는지 금방 문이 열리며 갑옷을 걸친 누군가가 튀어나온다.

삐이꺽―!

“어떤 녀석이야?”

“이, 이놈입니다. 이놈이 발칙하게도 영주님을 만나러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까불지 말라고 했더니 데이몬 기사님을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오, 그래? 데이몬을 아나?”

기사의 시선이 현수에게 향한다.

“일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다.”

“있다? 하찮은 용병 주제에 감히 기사인 내게 있다? 네 이놈! 네놈은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느냐?”

“목숨은 하나뿐이고, 데이몬 기사를 불러주든지 에릭 마이스진 백작을 만나게 해주게.”

“뭐, 뭐, 뭐라? 오냐, 좋다. 이봐, 안에 들어가서 데이몬을 불러와. 말 안 해도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알지?”

“네, 네! 네, 알겠습니다.”

수문위병이 얼른 쪽문을 열고 안으로 튀어 들어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먼 산 위로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다.

오늘따라 유난히 날씨가 좋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삐이꺽―! 끼이이이이익―!

녹슨 경첩의 마찰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거대한 성문이 열린다. 그러자 흉흉한 기세로 검을 뽑아 든 기사들이 보인다.

현수는 낯이 익은 자를 찾았다. 데이몬이 눈에 띄었다. 이곳 영주의 아들인 피어슨 마이스진과 불미스런 일이 있을 때 따라왔던 자이다.

“오, 데이몬. 오랜만이군.”

현수가 정확히 데이몬을 바라보자 기사들이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진짜 데이몬을 아는 자가 찾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데이몬은 어리둥절해한다.

기억에 없는 인물이 아는 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냐, 넌?”

시간이 많이 흘러 얼굴을 기억 못하는 듯하다. 아니면 치욕스런 패배를 준 그 현장 자체를 기억에서 지운 듯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런 기억을 지울 능력이 있다. 자신이 더 이상의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1)이다.

“데이몬, 날 모르나? 지난 2월 1일, 세실리아 여관에서의 사건을 잊었나?”

“세실리아 여관? 2월 1일?”

“그래, 피어슨 마이스진이 당한 걸 보복하겠다고 왔다가 나한테 깨졌는데 기억 안 나?”

“피어슨 공자님이 당한 걸 보복? 윽! 그, 그러고 보니 넌… 그, 그때 그 자식?”

“호오, 이제야 기억나나 보군.”

현수가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이몬은 부르르 떤다. 그때 개망신을 당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딱 한 방 맞고 갑옷이 함몰되는 바람에 갈비뼈 세 대가 나갔었다. 그날 이후 데이몬의 별명은 ‘마애기’이다.

풋내기 마법사에게 맞고 다니는 애송이 기사라는 치욕스런 별명의 준말이다.

허약의 대명사인 마법사의 주먹에 맞고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놀림감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현수가 주먹으로 갈긴 것으로 알고 있다.

2서클 마법인 헤비 펀치가 시전된 것은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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