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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528화 (528/1,307)

# 528

2장 땅 좀 주시겠습니까?

기사들이 달려들어 백작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거의 동시에 달리기 시작한다. 홀로 남은 백작부인은 대체 왜 이러나 하는 표정이다. 테리와 백작 간의 대화를 듣지 못한 때문이다.

같은 순간, 내성 입구는 침묵에 잠겨 있다.

위병 근무를 서던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난치는 용병을 징치하겠다고 튀어나왔던 기사 모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뜻이다.

9서클 대마법사인 이실리프 마탑주가 헬 파이어 한 방 날리면 올테른은 단숨에 쑥대밭이 된다.

사랑하는 가족 모두 목숨을 잃는다. 그렇기에 두려움에 떨며 용서를 청했다. 그런데 징징 우는 소리가 시끄러워 조용히 하라고 한마디 했더니 이렇게 조용해진 것이다.

기사 데이몬은 여전히 현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이제 죽은 목숨이지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기 위함이다.

이 순간 내성으로부터 일단의 무리가 달려온다.

다다다다! 다다다다다! 우다다다다!

“헉헉! 헉헉! 헉헉!”

“……!”

현수가 말없이 바라보는 사이 마이스진 백작과 기사단장이 당도했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무릎을 꿇는다.

“마탑주님, 부디 저희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영지 최고 권력자인 영주와 기사단장이 무릎을 꿇었다. 뒤늦게 당도한 인물들 역시 곧바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부디 한 번만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현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땅을 딛고 서 있지 않다. 모두가 엎드려 있는 것이다.

한편으론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마이스진 백작은 고개를 들라.”

“네, 마탑주님! 헉! 하, 하인스님이 아니십니까?”

마이스진 백작은 현수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전에 만났을 때 선물로 준 향수 덕에 부인으로부터 큰 점수를 땄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수는 이곳 사람들과 다른 검은 머리에 짙은 갈색 눈동자를 가졌다. 그렇기에 더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실리프 마탑의 제2대 마탑주이네.”

이전에도 이럴 것이라는 예상은 했다. 하지만 마탑주일 것이라고는 상상치 못했기에 심히 당황하는 표정이다.

무례라면 자신이 이미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 그렇습니까?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군. 피어슨은 얌전히 잘 있는가?”

“그, 그럼요. 그 녀석, 요즘은 정신을 차려 열심히 공부하고 수련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술도 마시지 않고 계집애들 꽁무니를 쫓아다니지도 않고 있습니다.”

“흐음, 다행이군. 그건 그렇고, 백작과 할 말이 있어 왔네.”

“그,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권력자이자 장인인 바론 후작이 왔을 때에도 이렇듯 공손하지 않던 백작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시종처럼 더없이 조심스럽고 겸손한 모습을 보인다.

현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라! 오늘의 무례는 다 용서했으니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도록 하라.”

“감사하옵니다, 마탑주님. 감사하옵니다.”

“데이몬, 네 죄도 사하겠다. 용서할 테니 일어서라. 앞으로는 함부로 칼을 휘두르지 말도록.”

“흐흑! 감사하옵니다. 정말 감사하옵니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겠사옵니다.”

데이몬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지옥에 반쯤 갔다가 되돌아온 그는 의복은 축축하게 젖어 있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때문이다. 아랫도리까지 젖은 이유는 겁에 질려 지려 버린 소변 때문이다.

“이,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이전에 만났을 때는 동등한 백작으로 만났다.

마이스진은 홈그라운드이고 현수는 어웨이였다. 하여 마이스진이 조금 더 높다는 느낌이 든 만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연히 다르다. 이실리프 마탑주는 아드리안 공왕과 버금간다.

공왕은 공작보다 높다. 따라서 당연히 절절매야 한다.

그런데 단순히 그것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다. 9서클 마스터는 대륙 전체에 딱 하나뿐인 마법사들의 정점이다.

각기 다른 나라에 흩어져 있지만 모든 마법사를 단숨에 휘하로 끌어들일 수 있다. 억만금을 들여 동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마법을 전수해 주겠다는 말 한마디면 된다.

아르센 대륙의 어느 국가가 모든 마법사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힘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물론 마법사의 대척점에 서 있는 기사들이 힘을 합쳐 대항하는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실리프 마탑주는 9서클 마법사이면서 딱 하나뿐인 그랜드 마스터이다.

모든 기사를 휘하로 끌어 모을 힘을 지닌 사람이다. 소드 마스터가 되는 길을 일러준다는 말 한마디면 된다.

모르긴 해도 거의 모든 기사가 기꺼이 충성 맹세를 바칠 것이다. 따라서 이실리프 마탑주는 일인 제국이다.

그것도 가장 강력한 힘을 보유한 제국과 같다. 그러니 당연히 절절매야 하는 것이다.

“흐음! 백작, 전처럼 편히 대해도 되네.”

“아,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어찌……. 말씀만으로도 황공합니다. 그저 편히 말씀하십시오.”

굽실거리는 마이스진 백작을 본 현수는 더 말해봤자 소용없음을 깨닫고 용건만 간단히 말하기로 했다.

“좋아, 테리안의 수도로 가야겠네. 좌표가 있는가?”

“네? 수, 수도로 가신다고요?”

헬 파이어나 미티어 스트라이크 같은 마법 한 방이면 수도는 단숨에 쑥밭이 된다. 나중에라도 수도의 좌표를 누설했음이 밝혀지면 제명에 못 죽는다.

그렇기에 부들부들 떨면서 묻는 것이다.

“그러하네. 테리안 국왕과 할 말이 있어서이네.”

“저어, 아, 아까 저희가 저지른 죄를 용서하신다 하셔놓고……. 그, 그게 아니라면 소인이 감히 마탑주님께 무슨 용무 때문인지 여쭤도 되는지요?”

현수는 왜 이러는지 눈치를 챘다. 하여 피식 실소를 지었다.

“국왕에게 영지를 달라고 할 셈이네.”

“네? 네? 그럼 저희 테세린의 귀족으로……. 아, 아닙니다. 소인의 말실수입니다.”

아드리안 공왕과 같은 반열인데 테리안에서 어떤 작위를 내릴 수 있겠는가!

같은 공왕에 봉한다 하더라도 그건 크나큰 실례가 된다.

세상 모든 마법사의 정점인 이실리프 마탑주를 감히 수하로 두겠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본인이 가만있다 하더라도 다른 마법사들이 들고일어난다. 감히 매지션 로드를 휘하로 두겠다는 테리안 왕국을 용서할 수 없다며 대들 것이다.

왕국으로선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얼른 자신의 실수라 말을 주워 담은 것이다.

현수는 말하지 않은 내심을 짐작하고는 젊잖게 말한다.

“억하심정이 있거나 해를 끼치려 하는 것이 아니네. 그러니 수도의 좌표를 알려주어도 백작에게 해가 되진 않을 것이네.”

“그, 그러십니까?”

“그리고 백작에게 협조를 구할 것도 있네.”

“무,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나와 인연이 있는 케이상단이 이곳 올테른에 있네. 내가 그들에게 연구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해달라고 했네.”

“아, 그러십니까? 케이상단이라고요. 알겠습니다.”

백작이 얼른 메모를 한다. 정신이 없어 자칫 까먹을까 싶은 모양이다.

“그들이 이곳 올테른에서 내 연구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백작에게 보살펴 달라고 말하면 무리인가?”

“네? 아이고, 아닙니다. 오히려 영광이죠. 케이상단이 무슨 일을 하든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백작의 호의를 기억해 두겠네.”

“감사합니다. 케이상단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마이스진 백작은 비로소 웃는다. 이실리프 마탑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너무도 반가워서이다.

실제로 마이스진 백작은 케이상단을 위한 조치를 취한다. 이날 이후 올테른에서 모든 상행위의 우선은 케이상단이 된다.

영주성에 필요한 모든 물품은 케이상단을 통하도록 바뀐다.

그동안 중간에서 뇌물을 받아먹던 행정관들은 관행대로 요구했다가 호된 처벌을 받는다.

다른 상단들은 볼멘소리를 한다. 케이상단이 취급하지 않는 품목이라도 반드시 그곳을 통하라는 지시 때문이다.

이에 마이스진 백작은 상단 대표들을 영주성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곤 케이상단과 이실리프 마탑 간의 인연에 대해 설명을 한다. 물론 약간 과장된 설명이다.

마치 케이상단의 주인이 이실리프 마탑인 것처럼 이야기한 것이다. 설명을 들은 모든 상단은 기꺼이 명대로 하겠노라고 대답하며 물러난다. 이실리프 마탑을 거슬렸다간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그간의 마법사들의 행태 때문이기도 하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온갖 패악을 부렸기에 마법사들은 대하기 어려운 존재로 자리매김한 덕에 케이상단만 좋아진 것이다.

어쨌거나 현수의 말 한마디로 케이상단은 미판테 왕국 전역을 커버하는 거대 상단 스페른과 맞먹는 규모로 성장한다.

실제론 서열 11위였던 케이상단이 테리안 왕국 서열 1위로 올라선다. 성공의 열쇠가 알론이라는 것은 금방 밝혀진다.

결국 알론은 거대 상단인 케이상단의 상단주가 된다. 물론 이는 나중에 있을 일이다.

“올테른이 알베제 마을과 가장 가까운 영지라는 소리를 들었네. 맞는가?”

“네, 맞습니다. 제 영지가 가장 가깝지요.”

“국왕에게 알베제 마을과 인근을 영지로 달라고 할 생각이네. 받아들여지면 이 영지와 가장 가깝게 되니 잘 부탁하네.”

“네? 아이고, 물론입죠.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영지를 얻으시면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제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보필토록 하겠습니다.”

“흐음, 고맙군. 아무튼 수도의 좌표가 필요하네. 시간을 줄 테니 알아봐 주게. 수도와 통신을 해도 좋네.”

“알겠습니다. 확인되는 대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케이상단에 가 있을 테니 그곳으로 연락 주게.”

“네? 제 성에서 식사라도 한 끼…….”

“떠나기 전에 하지. 일단은 수도의 좌표부터 알아봐 주게.”

“네, 알겠습니다.”

영주성을 벗어난 현수는 천천히 걸어 케이상단으로 향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뒤를 따른다.

“헉! 마법사님, 어서 오십시오.”

일전에 물을 떠다주었던 상인이다.

“그간 잘 있었는가?”

“아이고, 그럼요. 잘 있었습니다요.”

“그래, 알론을 보러 왔네. 말링코도 있으면 불러주게.”

“네, 잠시만요.”

상인이 뒷문을 열고 사라진 지 불과 2분 만에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벌컥―!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또 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말링코! 잘 있었는가? 몸이 불편하다 들었네. 지금은 좀 어떤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고맙습니다. 관심 가져주셔서.”

이들은 내일모레 출발할 상행을 준비하느라 올테른에 이실리프 마탑주가 출현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렇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어디 보세. 마나 디텍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나가 말링코의 체내로 스며든다. 그리곤 현재의 상태를 보고해 왔다.

심각한 중상의 후유증을 겪는 중이다. 왼쪽 다리 전체에서 저림 증상이 일어나고 있다. 신경에 문제가 생긴 때문이다.

“흐음! 컴플리트 힐!”

샤르르르르릉―!

서늘한 푸른빛 마나가 말링코의 전신으로 스며든다.

“어때, 괜찮아졌는가?”

“헐! 어떻게 이런……. 다리가 저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요.”

말링코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의 뜻을 표한다.

“알론, 쉐리엔 수집은 잘 되어가나?”

“네? 아, 네, 그럼요. 가을로 접어들면서 열매가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아직까진 그런대로 수확이 되고 있습니다.”

“가급적 많이, 그리고 빨리 수확해 주게. 곧 겨울이 되니.”

“그럼요. 당연한 일입니다요. 그나저나 중간 정산 때문에 오신 거죠? 먼저 접시부터 보고 드리자면…….”

알론의 말이 이어지려 할 때 현수가 먼저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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