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530화 (530/1,307)

# 530

“어서 오십시오. 이실리프 마탑주님을 환영합니다.”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 제2대 이실리프 마탑주입니다. 국왕 전하의 환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로렌스 알렌 폰 테리안입니다.”

서로 45도 각도의 인사를 주고받았다.

국왕이 안내하겠다는 몸짓을 하자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를 따랐다.

대전까지 들어가는 동안 왕궁 내부를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기둥과 벽에 새겨진 조각이며 부조가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마탑주님, 이쪽은 제1왕후 베리오티, 이쪽은 제2왕후…….”

왕후와 왕자, 공주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눴다.

“이쪽은 아돌프 공작, 헤센 공작입니다.”

백작 이상 고위 귀족들과의 인사를 마치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모두 지극히 조심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국왕의 명에 따라 왕후와 왕자, 공주, 그리고 거의 모든 귀족이 물러갔다.

남은 것은 국왕과 두 공작, 그리고 시종장뿐이다. 이때 문이 열리며 나이가 90쯤 된 마법사가 들어선다.

곧장 현수에게 다가온 노마법사가 힘겹게 무릎을 꿇는다.

“이렇게 마탑주님을 알현하게 되어 일생의 광영이옵니다. 왕실마법사 베르나가 매지션 로드께 인사 올립니다.”

“흐음, 마나의 동지로군. 반갑네.”

“참고로 베르나 마법사는 6서클 마스터입니다.”

로렌스 국왕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나의 심장 부위를 돌고 있는 여섯 개의 마나 링이 느껴진 때문이다.

3장 7서클 마법사 만들기

“베르나라 했나?”

“그러하옵니다, 매지션 로드시여!”

“마나를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

너무도 막연한 질문이라 여겼는지 대꾸 없이 시선만 마주친다.

“사람은 하루라도 물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가 없네. 하지만 그 물에 빠져도 살 수가 없지. 그럼 마나는?”

“네에?”

테리안 왕국의 평균 수명은 56세이다. 베르나는 늙어 이미 은퇴한 상황이다.

대개의 마법사들이 그러하듯 베르나 역시 운동 부족이라 잘 걷지도 못한다. 하여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라 체념하고 연구실에 칩거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나온 것은 마법사로서 매지션 로드를 알현하기 위함이다.

현수는 베르나의 마나 링이 꽉 차 있음을 한눈에 파악했다. 계기가 없어 7서클이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마법사로서 서클 올리기를 바란 때가 있기에 안타까워 한마디 해준 것이다. 이때 마나의 유동이 시작되었다.

“흐음! 베르나 마법사가 깨달음을 얻은 듯하군요. 잠시 자리를 비워줍시다.”

현수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두 눈을 지그시 감은 베르나에게 쏠린다. 득도한 고승처럼 장엄한 얼굴이다.

국왕과 두 공작, 그리고 현수는 곁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종장으로 하여금 대전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을 내렸기에 어느 누구도 베르나를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마탑주님이십니다. 베르나 마법사는 지난 20여 년간 7서클에 오르기를 고대하고 또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마탑주님의 한마디에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는군요.”

“헤센 공작님의 그 말을 감당하기 어렵군요. 그저 한마디 했을 뿐입니다.”

“베르나 마법사는 제 어린 시절 스승이기도 합니다. 스승을 대신하여 마탑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국왕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기에 현수 역시 맞절을 했다.

“별말씀을…….”

“오신 김에 저희 왕국을 두루 다니시면서 개선할 점들을 지적해 주시면 각골난망이겠습니다.”

아돌프 공작의 말이다. 시선을 마주치니 고위 귀족치고는 눈빛이 맑다. 진심이라는 뜻이다.

“시간이 되면 그리하지요.”

“저희 왕국을 방문하신 목적을 여쭈어도 되는지요?”

헤센 공작의 말에 현수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다.

“테리안 왕국의 영토 중 바세른 산맥과 인접한 곳에 알베제 마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부근의 영토를 이실리프 마탑의 영지로 할양해 줄 것을 의논하기 위해 왔습니다.”

“영토는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그리고 영지라니요! 감히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영지란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귀족에게 분봉해 주는 영토를 의미한다. 따라서 영주는 영지를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과 국왕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로렌스 국왕은 9서클 마스터이면서 그랜드 마스터인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 마탑주를 휘하라 인정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없다면서 얼른 고개를 내젓는다.

매지션 로드이기에 아르센의 모든 마법사로부터 지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한 곳은 알베제 마을 인근입니다.”

“알베제 마을은 너무나 궁벽한 곳입니다. 그곳이 아니라 곡식이 많이 나는 평지도 많습니다. 그런데 굳이 그곳을 원하시는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곳을 지나치다 보니 쉐리엔이 많이 자생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마탑에서 가깝고요.”

“쉐리엔이라 하심은 왕국 길가에 흔히 자라는 잡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런 거죠.”

아공간에 있는 것을 꺼내 보여주자 의아하다는 눈빛이다. 글자 그대로 왕국 어디에나 널려 있는 잡초이기 때문이다.

“정녕 쉐리엔이 필요하셔서 그런 겁니까?”

“그렇습니다.”

“흐음, 저희에게 의논할 시간을 조금만 주십시오.”

“그러지요. 그럼 전 왕궁 구경이나 하겠습니다.”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왕궁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작은 연무장을 지나치게 되었다.

챙! 챙! 채챙! 채챙! 채챙챙챙!

약관의 사내와 사십쯤 된 기사가 대련 중이다.

“이곳은 왕자님이 검술 훈련을 받는 곳입니다.”

“그런가? 잠시 구경이나 하세.”

늙은 시종장에게 반말하는 것이 불편했지만 현재는 이실리프 마탑주라는 신분으로 방문 중이다.

“그러시지요.”

현수가 관람석에 앉았음에도 둘의 대련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교관의 검이 왕자의 검을 쳐 낸다.

채앵∼!

왕자의 손을 떠난 검이 허공으로 솟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현수에게 날아온다.

척―!

“누구……? 헉! 죄송합니다.”

누가 감히 전용 수련장에 들어왔느냐는 말을 하려던 왕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인다.

“왕자님, 누군데 그렇게…….”

“데몬트 경,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이실리프 마탑주이시다.”

“헉! 죄, 죄송합니다.”

데몬트라 불린 교관이 얼른 허리를 꺾는다.

“왕자, 검은 세게 쥘 필요가 없다. 필요할 때만 힘을 주면 되는 것이지. 그리고 상대가 두려워 자꾸 발을 빼면 진보가 없을 것이다. 보아하니 신관도 대기 중인 듯한데 머뭇거리지 말고 조금 더 과감히 하라.”

“네, 알겠습니다.”

왕자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교관은 마법사가 왜 검에 대해 논하나 생각했다. 머릿속까지 근육만 있는 자인지라 이실리프 마탑주에 관한 소문을 듣고도 잊은 것이다.

“그런데 저어…….”

말을 이으려던 현수는 중간에 끼어든 데몬트를 바라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말 꼬리를 늘어뜨렸기 때문이다.

“내게 할 말이 있나?”

“외람되다는 걸 알지만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뭔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자 데몬트가 얼른 말을 잇는다.

“마탑주님께서 어찌 검법에 대한 조언을 하시는지요? 왕자님의 화후는 이미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 이르렀습니다. 조언을 하려면 최소 중급 이상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니까 마법사 주제에 왜 끼어들어 검법을 잘 아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느냐는 뜻이다.

현수는 실소가 터져 나옴을 막을 수 없었다.

“후훗―!”

“그렇게 웃지 마십시오. 마법사는 검법을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왕자님?”

자신의 말에 동의해 달라는 뜻으로 시선을 돌리던 데몬트 경은 왕자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대체 왜 이러나 싶었다.

“왕자님, 얼굴이 왜 그렇습니까? 그리고 제가 한 말이 틀렸습니까? 마법사는 마법에 관해서만 논하고 검사는 검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맞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왜 당연한 이야기에 동의해 주지 않느냐는 듯 답답해한다. 이에 왕자가 입을 연다.

“데몬트 경!”

“네, 왕자님!”

“조금 전에 이분이 마탑주님이시라고 말했어, 안 했어?”

“네? 그야… 맞습니다. 마탑주님이라고 하셨지요.”

“내가 어느 마탑의 탑주님이라고 했지?”

“그야 이실리프 마탑이라고. 아닌가?”

말끝을 슬그머니 흐린다. 정확한 기억이 나지 않아 긴가민가하기 때문이다. 이때 왕자의 말이 이어진다.

“경은 이실리프 마탑의 탑주님은 9서클 마스터이면서 그랜드 마스터라는 소문을 못 들었나?”

“네에? 그, 그, 그랜드 마스터요? 저, 정말입니까?”

얼른 현수에게 시선을 돌린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다.

“곁에 계신 마탑주님께서는 대륙 역사상 최초의 9서클 마법사이면서 동시에 그랜드 마스터이셔. 이쯤 되면 검법을 논할 자격이 있지 않겠어?”

털썩―!

왕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도했던 데몬트 경의 무릎이 단번에 꺾인다.

“아이고, 마탑주님, 소인을 죽여주십시오. 눈이 삐어 감히 그랜드 마스터님이신 줄도 모르고……. 정말 죄송합니다.”

데몬트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한다. 현수는 이 상황이 웃겼으나 애써 참았다.

“험험, 그럼 내가 왕자에게 검법에 관한 이야길 해도 되나?”

“네에? 그, 그럼요. 어,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 3박 4일도 좋고 5박 6일도 좋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너무나 당황했기에 데몬트는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른 채 연신 고개를 조아린다.

오늘 기사 데몬트는 현수가 용서해 줘도 누군가에게 깨질 것이다. 국왕일 수도 있고 왕자일 수도 있다.

이 둘의 처벌이라면 준남작 작위를 빼앗기고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 될 것이다. 감히 이실리프 마탑주를 능멸한 죄이다.

둘 다 아니라면 헤센 공작이나 아돌프 공작에게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걸친 채 연병장 수천 바퀴를 돌게 되든지 엉덩이 살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맞을 것이다.

행운이 겹쳐 이 모든 상황을 모면하더라도 기사단장 내지는 동료 기사들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감히 하늘같은 그랜드 마스터에게 검법을 가르칠 자격 운운했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자네가 허락했으니 이제 왕자와 이야기 좀 하겠네.”

“아이고, 물론입니다. 어서 하십시오.”

데몬트는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선다. 이렇게 현장을 떠날 수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때문이다.

현수가 다시 대전으로 향한 것은 왕자와 더불어 한바탕 검무를 춘 뒤이다. 가르쳐 보니 제법 싹수가 있다. 하여 기꺼운 마음으로 검술 하나를 전수해 준 것이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데몬트 경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허약 체질의 대명사인 마법사이면서 어찌 그렇게 검을 잘 휘두르는지 놀란 때문이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뻗어낸 검강을 보고는 반쯤 기절한다.

하긴 10m에 가까운 검강을 언제 보았겠는가!

현수가 이처럼 신분을 드러내는 것엔 이유가 있다.

미판테 왕국을 비롯한 삼국연합이 오판하지 않도록 위력 시위를 하는 것이다.

“마탑주님, 알베제 마을을 포함하여 바세른 산맥 인접 영토를 기꺼이 헌납해 드리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로렌스 국왕의 말이 끝나자 헤센 공작이 지휘봉을 들고 할양해 줄 땅의 경계를 지도로 보여준다.

지도의 정교함이 지구에 비할 바 못 되는 곳이다. 게다가 축척이란 개념도 없다.

하여 서울로 치면 강남구 정도 되는 면적이라 여겨진다. 참고로 강남구 면적은 39.54㎢, 인구는 56만 4천여 명이다.

나중에 확인된 일이지만 로렌스 국왕이 할양해 준 이실리프 자치령 면적은 서울시와 비슷하다.

약 600㎢인 이실리프 자치령의 대부분은 산지와 경사지이다. 넓디넓은 이 영지엔 몬스터도 많지만 쉐리엔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제대로 받아낸 것이다.

어쨌거나 공짜로 땅을 준다니 예의는 갖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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