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5
먹지도 자지도 않으니 완전히 썩기 전까진 보급이 필요 없는 병사 역할을 한다.
낮엔 활동할 수 없지만 야간이 되면 병사들을 대신한 경계근무를 서서 충분한 휴식을 갖게 한다. 어떠한 명을 내리든 항명하는 놈도 없고 꾀를 부리는 녀석도 없다.
어쨌거나 좀비와 구울에게 파이어 애로우가 비처럼 쏟아지는 상황이다. 항 화염 마법진만으론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몇몇 놈의 몸뚱이가 화염에 휩싸인다.
처음엔 서넛이었으나 점차 그 숫자가 늘고 있다. 거의 100여 개체가 불타오르자 뒤쪽의 움직임이 달리진다.
“그럼 그렇지.”
현수는 생각대로 된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파이어 애로우는 비처럼 쏟아졌고, 불타는 좀비의 수효가 늘어나고 있다.
좀비들이 성벽 가까이에 당도했다. 선두에 있던 놈들이 일제히 엎드린다. 그리고 그 위로 또 다른 녀석들이 엎드린다.
시체로 이루어진 계단이라도 만들 모양이다.
누마 백작이 연신 현수에게 시선을 준다.
왜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느냐는 표정이다. 이러는 사이에도 파이어 애로우가 비처럼 쏟아진다. 더 많은 좀비와 구울이 불타자 마치 횃불을 밝힌 듯 전장이 밝아진다.
“베르나! 더 빨리! 더 많이!”
현수의 전음을 들은 베르나가 전력을 다해 파이어 애로우를 날리기 시작한다.
곁에 있던 마법사들의 안색은 어느새 창백해져 있다. 과도한 마나 사용으로 인한 고갈 상태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브론테 왕국 진영의 흑마법사들은 좀비와 구울 사이에 섞여 은밀히 전진 중이다.
한곳에 모여서 파이어 애로우를 끊임없이 쏘아대는 마법사들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백작, 지금이네. 보유한 기름을 쏟아붓게.”
“네! 지금 즉시 기름을 쏟아부어라!”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촤아악! 촤아아아악!
성벽 인근에 당도한 좀비와 구울에게 기름을 쏟아붓자 흑마법사들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좀비들에게 항 화염 마법진이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의복에 젖어든 기름에 붙은 불을 끄는 기능은 없기 때문이다.
놔두면 불이 붙을 것이고, 그럼 병사 하나를 잃는 셈이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이 파이어 애로우를 난사하지 못하도록 빨리 막아야 한다. 그리고 단번에 제거해야 한다.
좀비들 틈에 섞인 흑마법사 300여 명이 성벽 인근에 당도했을 때이다. 지금껏 상황만 살피던 현수의 입이 열린다.
“마나여, 불의 바다로 모든 것을 정화하라! 헬 파이어!”
현수의 손을 떠난 마나가 허공에서 배열을 마치는가 싶더니 거대한 화염구가 흑마법사들이 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린다.
고오오오오오오―! 콰르르르르르―!
콰아아아아아앙―!
작렬하는 화염이 모든 것을 삼키려는 듯 사방으로 번지지만 비명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폭발음이 너무나 큰 까닭이다.
좀비와 구울은 소리를 낼 수 없고, 흑마법사들은 단숨에 이승을 떠난 저승의 고혼이 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현수가 날린 헬 파이어는 소규모 전술핵(Tactical Nuclear) 정도의 위력이다.
그렇기에 폭심부에 있던 흑마법사들은 순식간에 증발되어 버렸다. 비명을 지를 시간적 여유조차 없이 사라진 것이다.
성벽 위에서 이러한 장면을 지켜본 모든 이의 입이 딱 벌어져 있다. 눈알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정도로 부릅떠져 있는 눈엔 불신의 빛이 가득하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믿을 수 없는 광경이기 때문이다.
충천하는 화염의 바다로 인해 대낮처럼 환하다. 사방으로 번지는 화염이 좀비와 구울을 삼키자 금방 오그라든다.
사람의 몸은 본시 가연성 물질이다. 특히 피하지방과 복부지방은 불에 잘 타는 물질이다.
이런 좀비와 구울만 5만이다. 여기에 흑마법사 300여 명이 플러스되어 있고, 기회가 생기면 전공을 세우려 좀비들의 뒤를 따르던 야심찬 기사와 병사들도 있었다.
화염은 삽시간에 이들 모두를 집어삼켰다. 다 합치면 5만 5천이 조금 넘을 것이다.
화르르르! 화르르르! 화르르르르!
고요한 가운데 화염이 공기 흔드는 소리만 번지고 있다.
헨탈 성 기사와 병사, 그리고 귀족들과 영지민들은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다. 눈을 비비는 사람들도 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때문이다.
“세, 세상에……!”
“역시……!”
“어떻게 이런 일이……! 헐!”
첫째는 누마 백작이 낸 당혹성이고, 둘째는 베르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린 말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헤센 공작이 두 눈을 비비면서 뱉어낸 말이다.
화염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기왕에 붙은 불이니 가연성 물질을 모두 태워야 한다는 듯 말라붙은 풀과 잡목까지 태우는 중이기 때문이다.
“마탑주님, 존경합니다.”
베르나가 고개를 숙이자 모든 마법사가 저도 모르게 따라서 고개를 숙인다.
“마탑주님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이실리프 마탑 만세!”
이때 함성이 터져 나온다.
“와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적들이 사라졌다. 만세, 만세, 만세!”
“헨탈 성 만세! 테리안 왕국 만세!”
“마탑주님, 정말 고맙습니다.”
헤센 공작이 정중히 고개 숙여 예를 갖춘다.
내심 마탑주가 요구했던 영토를 조건 없이 할양해 준 일이 정말 잘된 결정이라 생각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하인스 마탑주가 이곳에 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헨탈 영지를 빼앗기고 수많은 병사 및 영지민들이 목숨을 잃어 적의 병력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인세에 있어선 안 될 존재들을 지운 것뿐입니다.”
“네, 그렇지요. 그럼에도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헨탈 영지가 무사합니다.”
현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멀리 보이는 브론테 왕국군을 보게 되었다.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인 헬 파이어 한 방에 질려 여러 갈래로 나뉘어 허겁지겁 도주하는 중이다.
“잠시 다녀오겠소. 플라이!”
현수의 신형이 둥실 떠오른다. 그러더니 쏜살같은 속도로 가장 많은 패잔병 무리를 향해 날아갔다.
성벽 위의 사람들은 대체 왜 저러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브론테 패잔병 위로 날아간 현수는 행렬의 선두 앞에 내려선다.
“모두 멈춰라!”
“……?”
“너는 누구냐? 썩 비키지 못하겠는가?”
C급 용병 차림이기에 선두에 있던 기사가 노성을 지르며 칼을 뽑아 든다.
“모두 병장기를 내려놓아라! 너희는 내 포로다!”
“무슨 개소리야? 뭐해, 저 미친놈을 끌어내지 않고!”
기사의 명령에 좌우에 있던 다른 기사들이 달려든다.
“홀드 퍼슨! 홀드 퍼슨!”
“……!”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멈춘 기사들이 당혹스런 표정을 짓는다. 뒤에 있던 자들 또한 표정이 변한다.
한낱 C급 용병으로 알았는데 마법사인지라 놀란 것이다.
“또 한 번 도발하면 조금 전의 헬 파이어 못지않은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고 싶나?”
“……!”
“누, 누구십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시선을 돌려보니 겁먹은 듯한 병사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이실리프 마탑의 제2대 탑주인 하인스 멀린 킴 드 셰울이다. 이 순간 너희 전부 내 포로가 되었다. 모두 뒤로 돌아 헨탈 성으로 향한다. 알겠는가?”
“헉! 이, 이실리프 마탑?”
“끄응! 우린 끝났군.”
“그렇다면 조금 전의……?”
“무엇들 해? 어서 뒤로 돌아! 뒤로 돌자고! 안 그러면 우리도 숯덩이가 될 수 있어!”
“……!”
누군가의 말에 모두 뒤로 돌아선다.
모두의 표정은 각각이다. 겁먹거나 당혹스런 표정, 그리고 경악 내지는 당황하는 표정, 체념하는 등 다양하다.
“가는 동안 병장기는 모두 챙긴다. 알겠는가?”
“네.”
언뜻 살펴보니 최소 5,000명은 되어 보인다. 그런데 단 하나의 존재에 의해 모든 의욕을 잃은 표정으로 걷는다.
패잔병들은 헬 파이어가 펼쳐졌던 현장에 당도하자 부르르 떤다. 아무리 이실리프 마탑의 탑주라고 하지만 인간이 어찌 이런 위력을 보일 수 있겠는가!
전투에 필요한 각종 물자를 운반하던 수레엔 검, 방패, 창, 투구 등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이것들의 뒤에는 식량 실린 수레들이 따른다.
처음 이들을 발견한 헨탈 성 성벽 위에 있던 누마 백작은 적의 재침공인 줄 알고 잔뜩 긴장하였다.
그러다 현수를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휴우! 마탑주님이시군.”
나직이 중얼거린 누마 백작이 얼른 소리친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어서!”
백작의 명에 따라 육중한 성문이 열렸고, 패잔병들이 들어섰다. 삼엄한 기세로 이들을 맞이한 테리안 왕국군은 별도의 명이 없기에 보고만 있을 뿐이다.
헤센 공작이 나오자 현수의 입이 열린다.
“헤센 공작님, 이 포로들을 이실리프 영지로 보내주실 수 있는지요?”
“네?”
“땅은 넓은데 사람이 너무 없으니 이들이라도 데려다 써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마탑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헤센 공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곳으로부터 알베제 마을 인근까지 이들을 데리고 가려면 꽤 오래 걸릴 것이다.
왕국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이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기준으로 하자면 신의주에서 제주도까지의 거리 두 배 정도 된다.
변변한 도로조차 없는 곳이므로 오래 걸릴 일이다.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인 것은 마탑주 혼자의 힘으로 잡은 포로들이기 때문이다.
헨탈 성 병사들에 의해 포로들이 감옥으로 보내지는 동안 현수는 누마 백작의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마탑주님,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누마 백작이 정중히 허리 숙여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실리프 마탑의 작은 성의라 생각하십시오.”
현수의 시선을 받은 헤센 공작 역시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왕국을 대표하여 감사드릴 뿐입니다.”
헤센 공작의 말이 끝날 때 문이 열리고 시녀들이 음식을 내온다.
“마탑주님 입에 음식이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경황 중인지라 제대로 준비를 못했습니다. 양해하여 주십시오.”
“아닐세. 잘 먹겠네.”
차려진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헤센 공작과 누마 백작도 앞에 놓은 빵을 찢어 입에 넣는다.
그렇게 10여 분쯤 지났을 때다.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
가슴 속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뭔가 싶었던 현수가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는 통신용 수정구를 꺼냈다.
로니안 자작의 얼굴이 보인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탑주님, 도와주십시오.”
“……?”
“케일론 영지의 칼멘 후작이 우리 테세린을 집어삼키려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들이 왜……?”
현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로니안 자작의 다급한 말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곡창지대와 마나석 광산을 노리고 있습니다.”
“흐음, 알겠습니다. 바로 가지요.”
현수가 수정구를 품에 넣자 로니안 자작 간의 통신을 듣고 있던 헤센 공작이 먼저 입을 연다.
“급한 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여기는 신경 쓰지 말고 가십시오. 포로들은 책임지고 알베제 마을까지 보내 드리겠습니다.”
“일단 포로들을 먼저 보겠습니다.”
“네, 그러시지요.”
누마 백작의 안내를 받아 임시로 만든 포로수용소를 찾았다.
“누가 너희의 대표인가?”
“드리튼 백작입니다.”
“좋아, 백작을 불러오도록.”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40대 중반인 사내가 나선다.
“부르셨습니까?”
“좋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지.”
현수는 드리튼 백작과 20여 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곤 곧장 테세린으로 텔레포트했다.
* * *
“어서 오십시오, 마탑주님!”
전에는 반쯤 말을 내리던 로니안 자작이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는다. 국왕 대하듯 몹시 정중하다.
롤랑 마법사로부터 현수가 이실리프 마탑주라는 사실을 전해 들은 이후 대경실색했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그간 사위 될 사람이라고 약간은 낮춰봤던 것들이 떠오르자 식은땀이 절로 났다. 그렇기에 이토록 정중한 것이다.
“흠, 케일론 영지의 칼멘 후작군은 어디에 있습니까?”